2022. 11. 9. 15:12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Virtual Reality and Virtual Places
본 연재는 뉴 미디어와 건축 디자인 실험 연재의 두 번째로, 가상현실과 가상의 장소를 구현하는 뉴미디어 기술을 다룬다. 이런 기술들이 신체 및 사회적 인지를 통하여 어떻게 정성적 분석과 평가를 돕고, 건축 디자인 실험에 응용되는지 그 사례를 살펴본다. 또한, 이러한 기술들이 궁극적으로 새로운 건축설계업역 확대에 기여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고찰한다.
1. 가상현실과 건축 디자인 실험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은 물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환경 속에서 사용자 자신이 존재(sense of presence)한다고 지각하는 수준까지 환경을 재현하는 매체 혹은 기술을 의미한다. 기술적인 의미에서의 가상현실은 이미 1984년 윌리암 깁슨(William Gibson)이 최초로 창안하고, 그의 소설 ‘뉴로맨서’를 통해 유행시킨 용어인 ‘사이버스페이스’의 묘사와 일치한다. 깁슨은 가상현실장비를 이용하여 데이터베이스와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통해 구축된 가상의 환경인 사이버스페이스로 접속하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깁슨의 소설과 발맞추어, 1993년 멜 슬레이터(Mel Slater)는 컴퓨터 그래픽스로 재현된 3차원 공간 속에 둘러싸여 있을 때 느끼는 실존감각을 ‘이머션(immersion)’이라는 기술적인 용어로 정의했고, 이러한 몰입감을 높이기 위한 기술적인 로드맵이 제안되기 시작했다.
건축설계분야에서는 건축물이 지어지기 이전, 공간의 규모와 질을 파악하기 위하여 제작하는 투시도와 실규모의 벽화 등이 가상의 환경 속에 존재하는 감각을 만드는 보편적인 매체였다. 하지만, 투시도와 벽화 속에서 재현된 공간을 신체지각을 통해 직접 경험하기란 사실상 어렵다. 이러한 관습적인 매체를 통해 발생하는 몰입감과 존재감각은 상상과 해석에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관습적인 매체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설계안에 관한 경험과 성능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지난 회에서 언급했듯이, 건축 디자인 실험에서 체계적인 분석과 평가의 과정은 필수적이다. 이 과정을 통해 실험목적과 설계결과물의 성능 간의 비교, 설계결과물의 창의성 판단, 디자인 실험을 진행하기 위한 추가적인 단서의 발견 등이 이루어진다. 신체지각과 인지를 통한 경험은 분석과 평가의 일차적인 수단으로, 이를 통해 설계안의 질과 잠재적인 사용성을 판단할 수 있다(Norman, 2013). 가상현실에서는 컴퓨터 그래픽스로 재현된 물체의 물리적 속성(예를 들어, 거리감, 충돌, 재질 등)과 사용자의 행동(예를 들어, 걷기, 만지기 등)과의 관계를 빠르게 연산하여, 시각, 청각, 촉각 등으로 지각할 수 있는 정보로 사용자에게 전달한다. 이를 통해 사용자는 마치 가상의 설계 안 속에 존재하고, 직접 경험하는 듯한 실존감각과 몰입감을 가질 수 있다 (그림 1).
이러한 가상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직접 경험 시뮬레이션(direct-experience simulation)은 사용자의 심리적인 반응, 아름다움, 길찾기와 같은 설계결과물의 정성적 평가(qualitative evaluation)에 주로 응용된다. 설계안의 외부평가와 설계의뢰인과의 커뮤니케이션에도 사용되는 추세이다. 이러한 시뮬레이션을 위하여 최근에는 공간의 깊이를 재현하는 스테레오스코픽 기술(stereoscopic virtual reality)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HMD(head mounted display), CAVE 형식의 가상현실장비와 물리적인 충돌과 상호작용을 연산하는 컴퓨터 게이밍 엔진(Unity 3D, unreal 등)이 복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가상현실이 인간의 신체지각을 매개하는 장비를 이용해 몰입감을 높이는 방식을 중점을 두는 반면에, 또 다른 방식의 가상환경에서는 사회적인 인지와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실존감각을 높이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 방식의 가상환경에서는 다수의 사용자가 가상의 신체를 이용하여 같은 환경에 동시에 접속하고, 다른 사람들과 그 환경을 경험하고, 공유할 수 있다. 이는 현실세계에서 장소가 가지는 성격과 유사하다고 하여, 이른바 ‘가상의 장소(virtual places)’로 통칭한다(Kalay, 2004). 가상현실과 직접경험 시뮬레이션이 주로 설계안의 실현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반면, 가상의 장소는 건축적인 기능을 가상에서 직접 제공하기도 한다. 본 기고문에서는 가상현실뿐만 아니라 가상의 장소에 관한 응용범위를 다루며, 다음 장에서는 우선 가상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직접경험 시뮬레이션의 응용범위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2. 직접경험 시뮬레이션 : 신체지각과 정성적 평가
가상현실의 기본적인 구조는 장비를 통해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된 가상의 환경을 지각하는 것이다. 신체지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시각정보처리로, 센서를 이용하여 가상환경 속에서 사용자의 위치를 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주변 물체들과의 거리를 계산하여 공간의 깊이감을 재현한다. 소리 역시 센서의 위치를 기준으로 음원과의 감쇠효과를 구현하며, 손과 신체에 부착된 센서를 통해 가상의 물체와의 충돌과 접촉 등을 연산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사용자는 가상의 신체를 선택하여, 그 신체의 경험을 근거로 설계안을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매개된 신체지각(mediated perception)은 건축 디자인 실험에서 도출된 결과물의 정성적 성능을 분석하고 평가하는데 사용되며, 그 응용범위와 사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건축 디자인 실험에서 가상현실은 사용자의 공간인지 및 길찾기 성능(way-finding performance)을 평가하는데 응용된다. 설계안의 형태 및 공간구조가 전례에 없을 경우와 병원과 같이 복합적인 기능으로 인해 공간배치가 복잡할 경우, 가상현실을 통해 사용자의 길찾기 편의를 분석할 수 있다. 특히, 화재 및 재난대피와 관련한 공간일 때, 인지와 길 찾기 성능평가는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다. 예를 들어, 화재 시 탈출구의 형태와 사용자의 길 찾기 간의 관계를 가상현실을 이용하여 분석됐으며(Sun & de Vries, 2013), 또 다른 프로젝트에서는 BIM모델을 가상환경으로 불러들인 후, 이를 화재 시 탈출구와 소화 장비의 인지를 평가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둘째, 신체의 특수한 조건을 고려하여 설계안 분석과 평가를 수행할 수 있다. 가상현실에서 사용자는 가상의 신체(avatars)와 그 특징을 설정한 후, 이를 통해 설계안의 사용성과 심리적인 편의를 경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하대학교 건축학과의 학생들은 휠체어를 탄 가상의 신체가 탑재된 가상현실 플랫폼으로 자신들이 설계한 BIM모델을 불러들인 후, 건물의 장애인 진입로의 형태와 크기, 경사도 등을 평가했다. 이런 무장애 설계(barrier-free) 평가를 위하여 학생들은 HMD를 착용한 채 의자에 착석하여, 휠체어의 물리적인 회전범위와 경사로 운행을 비롯한 장애인의 보행시야와 가시성을 체험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건축법규와 응용된 설계안의 차이를 판단하게 되었고, 신체 장애인이 겪는 불편함, 심리적 위축 등을 공감할 수 있었다(그림 2).
셋째, 가상현실은 건축 디자인 실험결과물의 ‘잠재적 사용성’을 분석하는데 유용하다. 건축 디자인 실험에서는 전례에 없는 형태와 공간구조가 다루어지며, 결과물의 사용성과 추후 실험방향의 단서를 발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1987년 인지심리학자 제임스 깁슨(James Gibson)은 인간은 우선적으로 신체경험과 지각을 통해 물체의 잠재적인 사용성과 지원성, 즉 ‘어포던스(affordance)’를 인지한다고 기술했다. 이러한 어포던스 탐구는 역운동학(inverse kinematics) 등과 같은 인체관절의 연산과 지각의 기술적인 구현을 통해 가상현실에서도 가능해졌다. 예를 들어, 학생들은 3차원 모델러를 통해 독창성은 높으나, 사용성이 불분명한 비정형의 조형물을 만든 후, 가상의 신체를 이용하여 조형물의 잠재적인 용도(예를 들어, 누울 수 있는 공용의자 등)를 발견할 수 있다(그림 3). 또 다른 예로는 컴퓨터 연산을 통해 전례없는 형태를 생성 후, 직접 경험을 통해 생성 결과물의 기능을 탐구하기도 한다(그림 4).
3. 가상의 장소 : 가상현실응용설계의 로드맵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재현된 가상환경에서 실존감을 만드는 하나의 로드맵은 그 환경을 보다 사실적으로(photo-realistic) 재현하고, 사용자가 그 환경요소를 신체지각과 인지를 통하여 현실처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반면에, 가상환경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각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같은 공간에서 타인의 존재를 인지하고, 경험과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다. 즉, 타인과의 비교, 사회적인 상호작용과 유대감을 통하여 실존감과 몰입도를 높이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식의 가상환경은 네트워크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많은 사용자가 하나의 환경에 존재할 수 있다는 기술적인 특성으로 인해 ‘온라인 다중사용자 가상환경(online multiuser virtual environments, MUVEs)’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방식의 가상환경은 현재 유행하고 있는 블리자드의 ‘오버워치’나 블루홀의 ‘배틀 그라운드’와 같은 온라인 게임의 예로 확인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건축학과의 예후다 칼레이(Yehuda E. Kalay) 교수는 사회적인 인지를 기반으로 하는 가상환경을 ‘가상의 장소’로 정의했다(2004). 그는 1977년 환경심리학자 데이비드 칸터(David Canter)가 분석한 ‘장소성’의 세 가지 요소인 공간(objects), 사용자(actors), 상황(contexts)이 온라인 다중사용자 가상환경에서도 동일하게 존재하고, 사용자들은 이를 공유하여 같은 장소에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사회심리학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가상의 장소’에서는 여러 명의 사용자가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명시적으로 재현된 동일한 환경을 각자의 신체를 통해 경험할 수 있으므로, 설계안에 관한 공동평가와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 이러한 기제를 통해 창의적인 결과물 탐구를 전제로 하는 건축설계협업에 미치는 실효성이 기존연구를 통해 밝혀졌고(Hong et al., 2017),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건축학과에서는 이 가상환경을 협업설계 스튜디오에 응용하기도 했다(그림 5). 이외에도 이 가상환경은 7번가 오클랜드, 캄보디아 고대사원 등 문화재 복원에 사용되기도 했다. 이 문화재 복원 프로젝트에서는 물리적인 공간의 재현뿐만 아니라, 다수의 사용자가 접속하여 복원된 문화재 속의 인물, 상황, 의식 등을 경험하고, 그 관람 경험과 학습 내용을 서로 공유할 수 있다.
‘가상의 장소’는 가상현실기술의 보급이 가속화되는 현 시점에서 재고할 필요가 있는 기술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현실세계의 건축물의 기능처럼 가상환경을 통해서도 특정기능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건축설계의 업역을 확대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초기에는 ‘페이퍼 아키텍쳐’를 단순히 가상환경으로 구현하려는 시도들이 많았지만, 상상속의 건축물을 경험하는 용도 이외에는 다른 기능을 부여하기 어려웠다. 이후, 중력과 충돌이 존재하지 않거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구조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이색적인 ‘비물질 공간’을 수학교실 등의 용도로 사용하려고 했지만, 이런 공간에서는 사용자의 공간인지와 길찾기가 난해하여, 실용성이 낮았다.
최근에는 서점, 박물관, 상업시설 등 장소성과 목적이 명확한 공공건축물의 기능을 온라인 다중사용자 가상환경을 통해 제공하려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이 가상환경에서는 다른 사람과 같은 공간에 존재하므로 심리적인 유대감을 기대할 수 있고, 사용자들 사이에서 다양하고 흥미로운 상호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가상환경에서의 기능과 경험이 사용자 중심으로 갱신되고, 따라서, 지속적인 사용과 유지를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프로젝트에서 현실세계 건축물의 양식과 사용성을 그대로 차용하는 경우가 많아, 가상환경에서만 가능한 특수한 경험과 그 경험에 맞는 기능의 탐구가 필요한 시점이다(그림 6).
본 기고문에서는 가상현실과 가상의 장소를 소개했고, 건축 디자인 실험에서의 사례와 응용범위 역시 살펴보았다. 또한, 건축설계업역을 확대할 수 있는 하나의 전략으로 가상의 장소에 관한 가치를 고찰했다. 다음 회는 본 연재의 마지막으로 ‘다양성과 감정, 사회성의 연산, 그리고 디자인 프로세스의 진화’를 다룰 예정이다.
감사의 글
본 기고문은 인하대학교 건축학과에서 2015년부터 현재까지 개설된 ‘디지털디자인과 미디어 1, 2’, ‘BIM설계와 시공’, 2017년 대학원에 개설된 ‘가상현실응용설계’ 과목에 참여한 학생들의 프로젝트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가상의 장소에 관한 이론과 프로젝트는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건축학과의 명예교수이자 이스라엘 테크니온 공대 건축대학의 학장이신 Yehuda E. Kalay 교수님과 함께 수행한 내용임을 밝힌다. Kalay 교수님을 비롯하여, 본 과목에 참여한 모든 학생들과 대학원 조교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 기고문은 2016년도 정부(미래창조과학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기초연구사업(No. 2016R1C1B2011274)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1. Canter, D.(1977). Psychology of Place, London : Architectural Press.
2. Gibson, J.(1987). The Ecological Approach to Visual Perception. NY : Psychology Press.
3. Gibson, W.(1984). Neuromancer. NY : Ace Books.
4. Kalay, Y.E.(2004). Architecture’s new media : Principles, theories, and methods of computer - aided design. Cambridge, MA: MIT Press.
5. Hong, S., Antably, A.E., & Kalay, Y.E.(2017). Architectural design creativity in Multi-User Virtual Environment : A comparative analysis between remote collaboration media, Environment and Planning B : Urban Analytics and City Science, pp. 1-19.
6. Norman, D.(2013). The Design of Everyday Things. PA : Basic Books.
7. Slater, M., & Usoh, M.(1993). Representation systems, perceptual positions, and presence in immersive virtual environments. Presence, 2, pp. 221-233.
8. Sun, C., & de Vries, B.(2013). Width : an indispensable factor in selection of emergency exit door. Environment and Planning B : Planning and Design, 40, pp. 63-67.
글. 홍승완 Hong, Seungwan 인하대학교 건축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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