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참여 건축설계 (5) _ 과정에서 찾아내는 가치, 공동체 참여 건축디자인 2018.02

2022. 11. 9. 16:44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The Value found in the process, Community Participation Architectural design

 

“건축사는 건축적 해법을 내놓을 때마다 공간의 조건이 평등하게 분배됐는지, 
 그리고 우연이든 의도적이든 혹시 건축사가 내놓은 해법이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불평등을 
 공간적 측면에서 강화할 위험은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 헤르만 헤르츠버거(Herman Hertzberger)


1. 퍼실리테이터, 건축 퍼실리테이터 

그림 1) IIFAC(International Institute for Facilitation and Change)에서 만든 교육 비디오 “퍼실리테이터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나요?”(화면 갈무리 필자 편집)

퍼실리테이터는 ‘조력자’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퍼실리테이터가 담당해야 할 일을 퍼실리테이터교육기관인 IIFAC(International Institute for Facilitation and Change)의 교육 자료에서 찾아보면 크게 세 가지로 쉽게 설명하고 있다. 첫째, 요구를 받아 기획하고 적절한 재료(주제들)로 구축하는 ‘건축사’의 역할, 둘째, 구축된 회의를 준비하고 이끌어 항로를 찾아가는 ‘항공기장’의 역할, 마지막으로 새로운 영역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안전하게 탐험하고 도전하게 하는 ‘여행안내자’의 역할로 설명하고 있다. 물론 비유이지만 건축사가 지니는 기본적인 역량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건축사가 퍼실리테이션에 적합한 능력을 상당부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여러 단계의 회의와 워크숍을 이끌어가는 퍼실리테이션과 건축물을 설계하고 건설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건축 퍼실리테이션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건축사의 고유한 능력을 발휘 할 수도 있다.
건축 관련 사업에서 다양한 관계자와 이용자를 포함한 공동체의 의견을 모아 건축물을 완성해가는 역할을 영국의 예에 따라 ‘건축 퍼실리테이터’라 구분할 수 있다. 사실 현재 우리나라에 건축 퍼실리테이터라는 개별적인 전문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여러 공공프로젝트나 도시재생의 현장에서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문제와 갈등을 풀어나가는 ‘지역 재생 활동가’나 ‘퍼실리테이터’들이 있으나 그들은 회의 진행자이거나 갈등조정 등을 주역할로 초기의 의견 수렴과 공동체 구성, 그리고 합의를 이루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그들은 건축적 지식과 전문성을 겸비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대개 건축적 환경에 대한 협약을 이끌어내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이와 달리 ‘건축 퍼실리테이터’는 성공적인 건축설계과정과 건축물의 완공·사후 관리까지의 건축 전 과정에 걸쳐 공동체의 의견과 참여를 모으고 유지해서 건축전문가들과의 사이에서(혹은 건축사 자신과) 사업이 진행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따라서 건축적 지식과 동시에 회의 구상과 진행, 결과관리를 진행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춰야 한다. 또한 다양한 건축 관련 요구와 문제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합리적 지표를 통한 요구로 바꿔내는 분석과 이해 및 공감능력이 요구된다. 이는 건설 현장에서 경험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노련한 VE(Value Engineer : 가치공학자)전문가의 역할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기술적 전문성과 더불어 사회적인 안목을 가져야 하므로 차이가 있다. 건축 관련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 영국의 경우를 살펴보자. 

영국의 경우 ‘건축 퍼실리테이터’는 ‘DQI(Design Quality Indicator : 디자인 품질지표)’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영국의 DQI는 2차 세계대전 후 주거지 복구 및 조성을 통해 형성된 주거지의 도시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 필요성과 인식이 싹텄다. 우리나라에서도 디자인 품질지표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많은 분야에서 각기 다른 지표를 개발·적용하고 있지만, 대개 영국의 사례를 그 기본틀로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 활용되는 지표들이 ‘건축디자인의 평가’라는 목적으로 이용되는 경향이 있으나, 영국에서는 이러한 배경에서 DQI가 일종의 사회적인 합의 수단 혹은 거버넌스(Governance : 협치)를 위한 도구로 이용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모든 건축은 그 자신 뿐 아니라 지역과 공동체와 영향을 주고받는 환경이다. 강태웅(2010) 교수는 “DQI의 개발은 의심할 여지없이 소통과 참여를 위한 사회적인 인터페이스로서 필요성에 반응한 것은 분명하다. (중략) 이 도구는 무엇인가를 평가하여 좋고 나쁨을 또는 우열을 가르는 도구로서 개발된 것이 아니라 여러 참여주체가 이 도구를 통하여 공통의 관심사와 차이를 인지하려 하는 소통의 도구로서 개발됐다.” 라고 설명하면서 DQI가 지닌 사회적 역할과 소통과 참여라는 도구적 성격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2. 건축 퍼실리테이터의 역할
‘건축 퍼실리테이터’의 배경에 이러한 성격을 지닌 영국 DQI가 있다는 것은 결국 건축 퍼실리테이터가 건축 사업을 진행시키는 사업관리자(Project Manager)와는 다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영국의 DQI와 건축 퍼실리테이터에 대해 살펴보면, 영국 CIC(Construction Industry Council)가 개발한 DQI에서는 자격 있는(자격을 취득한) 퍼실리테이터가 진행하는 ‘DQI Briefing workshop’이 중심에 있다.

그림 2) 커뮤니티 참여 건축설계에서의 DQI 워크숍 진행

대부분 건축 비전공자이며 다양한 요구와 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참여자들을 모아서 지어질 시설(사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을 다시 건축적 언어로 번역해 내는 과정을 거친다. 이와 함께 공감을 통해 공유된 기준으로 주어진 평가지표항목을 참여자들이 판단한 가치로 가중치를 정하고 중요도를 조절해 나가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이 과정은 매우 복잡하며 DQI의 통계적 방법을 사용하지만 동시에 이를 이끄는 건축 퍼실리테이터의 능력에 따라 성패가 좌우될 수 있어 건축 퍼실리테이터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진행하며 그 자격을 관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건축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은 무엇일지 살펴보자. 퍼실리테이터와 건축 퍼실리테이터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위해 퍼실리테이터이며 필자와 건축 퍼실리테이팅 작업을 수차례 진행한 바 있는 ‘박남용 교수의 글’을 소개한다.

그림 3) 퍼실리테이터의 역할 (자료 : ‘퍼실리테이션의 역할과 역량’, 2012, 이영석, 월간 HRD)
그림 4) 강릉 철도역사 영역별 디자인 만족도 검토 결과 (자료 : 원주-강릉 철도건설 이용자 참여 설계 및 철도 건축물 디자인 품질평가지표 개발(보고서) 최종, 2016)
그림 5) 공공 건축을 위한 수준별 디자인 품질 평가 수단 적용 체계 (자료 : 참여 수준을 적용한 공공 건축의 커뮤니티 참여 디자인 방법론 연구, 박남용, 공주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위의 글을 통해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건축 퍼실리테이터의 업무와 수단 등을 살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이 글은 공공건축물을 대상으로 독립된 건축 퍼실리테이터가 건축사와 협동하여 진행하는 것으로 설명했지만 대상 건축의 조건에 따라 건축사가 이러한 역할을 직접 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건축사가 자신이 담당한 사업에서 설계와 동시에 퍼실리테이터로서 진행할 경우, 전체 과정과 건축 퍼실리테이팅에 대한 이해와 함께 수행할 역할 및 사용 수단에 대한 충분한 학습과 숙달이 필요하다. 단지 설계과정에서 의례적인 앙케이트 조사로 의견을 추정하기보다는 반드시 기준이 되는 가치를 공동체 참여자들과 함께 수립해 이를 활용하기 위한 충분한 준비와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강조한다. 


3. 연재를 마치며 : 과정을 중시하는 공동체 참여 건축설계 방법
지금까지 네 번에 걸쳐 ‘공동체 참여 설계’에서 공동체 참여설계의 개요, 진행과정, 건축사의 역할, 협력방법과 작업방식을 소개했고 마지막으로 공동체 참여 설계 과정에서 건축사와는 독립된 역할로서 ‘건축 퍼실리테이터’를 추가하는 것으로 ‘공동체 참여 건축설계’에 대한 연재를 마무리 한다. 이 연재를 통해 지역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사회적 의무감을 갖는 건축사들에게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으나 여러 면에서 부족함을 느껴 필자로서도 아쉽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최근 점차 늘어나고 있는 ‘참여설계’라는 요구들을 마주하면서 단지 형식적인 절차에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인 ‘공동체 참여’를 건축사가 스스로 주도하여 직접 또는 협동을 통해 담당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이해와 절차들을 나름대로는 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감사하게 생각한다. 

건축은 정교한 기술적 프로젝트 결과물 혹은 다른 무엇이든 간에, 협동 작업으로 결과물을 만드는 여타의 작업들에 비해 과정을 중시하고 그 과정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건축물을 만들어 내는 기술과 방법이 크게 바뀌어 왔다고 해도 설계의 초기 단계에서 구축된 정보와 설계 의도가 정교함을 더해가며 실현되는 과정이 건축행위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건축이 예술이라면 “예술이란 일종의 이상 혹은 이념을 전제로 하며 그것에 의해 본연의 모습을 취한다.” 9)라고 한 일본 미학자의 정의에 따른다면 일정한 이상과 이념을 스스로 지닌 결과물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상과 이념을 공동체와 함께 만들어야 하는 사회적 역할이 건축사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 참여 건축설계방법’은 건물을 둘러싼 공동체의 여러 의견을 설계 과정에 충실하게 반영하는 방법이며 공동체와 함께 만든 이상과 이념을 바탕으로 건축사의 전문성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설계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의견의 공유와 합의, 갈등해소 그리고 문제에 참여를 통한 공동체 의식의 강화는 또 다른 이익으로 건물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몫으로 돌아가겠지만, 한편으로 건축사에게도 만족스러운 결과와 함께 사회적 보람이 그만큼 늘어날 것은 분명하다.


“공간과 시간은 어떤 경우에도 장소와 상황만큼 풍부한 의미를 담아내지 못한다. 
 공간에 사람이 개입하면 장소가 되고, 시간에 사람이 개입되면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 알도 반 아이크(Aldo van Eyck)

 

글. 고인룡  Koh, Inlyong 공주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