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9. 09:05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Plainness of City, and Story of People – Love Actually
대학 시절에 한 선배가 있었는데, 그분은 언제 어디서나 아주 심각한 이야기를 했다. 진지하고 사회적 관심이 많던 이십 대 초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석에서 그런 심각한 주제를 갖고 일상적으로 대화하는 것에 난감했었다.
사실 건축계 동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이런 경험이 잦다. 건축을 전공하고, 건축과 관련된 직업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입장이지만, 건축과 관련된 생각이 항상 진지하고 심각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와 건축을 엮으며 생각을 드러내는 입장에서 가끔 내가 너무 진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기실 건축사들의 대화를 보면 한없이 어렵다. 각종 담론이나 이야기를 하는 자리를 가보면 온갖 현학적 용어와 단어들이 난무한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일반인들이 보기엔 조금 의아한 모습이기도 하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사는 마을의 어른들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해야 할 것 같은 어려운 수사들을 듣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이런 대화들이 점점 더 불편해진다. 왜냐하면 보통의 사람들이 느끼는 도시와 건축은 한마디로 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판단이 결코 수준 이하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우리는 안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조금씩 만들어간 도시들이 불편하지 않고, 편안한 이유도 이 점에 있다.
2000년대 초반에 처음 보았던 영화 ‘러브 액츄얼리’는 그저 그런 킬링타임용 영화였다. 연말 시즌에 적절한, 안 봐도 그만인 영화다. 사실 이 영화는 개인적 취향으로 본 것이 아니라, 상영 당시 대한주택공사 사보에 영화 칼럼을 연재하고 있어서 겸사겸사 보게 됐다. 건축에 대한 글을 쓰려면 뭔가 어려운 영화여야 하는데, 때도 때이고 가족의 평화를 위해 아내 취향에 맞춘 선택이기도 했다. 이 얼마나 다목적인가?
그리고 이 영화에서 억지로 건축의 이야기를 찾아서 발굴(?)하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첫 장면에서 건축적 코드를 찾았다.
영화의 시작은 만남과 이별의 장소라고 할 수 있는 공항 장면이다. 클로즈업된 사람들. 휴 그랜트 및 기타 등장인물 주연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노팅힐’, ‘브릿지 존스의 일기’ 등을 통해, 일상적 드라마의 에피소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애써 추측한 내용처럼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충분한 구성과 내용이다. 다만 영화의 주제로 선택한 것이 제목처럼 ‘러브~’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 정도를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숙제로 들어가서, 영화에 등장하는 공간 코드를 건축적으로 읽으려 노력해 봤다.
조금 생경한 도시에서 느끼는 사람들의 만남과 이별, 고독. 이런 관점은 현대 도시라는 배경과 그 안의 여러 가지 공간적 장치 속에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행위와 필연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었다. 자주 가는 곳은 아니지만 일상의 공간인 공항에서 시작되는 첫 장면은 나름 이 영화의 줄거리를 암시하는 복선이기도 하다. 공항이라는 장소는 이제는 특별한 사람들의 장소가 아니다. 일상화된 이동의 주요 시설로서 누구나 이용하는 공간이다. 더불어 하늘을 통과해 이동한다는 사실은 확연한 물리적 거리를 인식시켜 준다. 일상화된 공간임에도 여전히 이별과 만남의 극적인 공간인 것이다. 영화의 시작에서 만남과 재회의 공간으로 공항이 설정되었고, 그러한 설정은 영화의 말미에도 반복되어 나타난다. 영화 ‘가타카’의 마지막 공항장면이나 우리영화 ‘정사, 이재용 감독 1998년작’의 마지막에서 보여지는 미지로의 여정과는 다른 개념이다. 그것은 이동자의 관점이 아니라, 맞이하는 자의 관점이 더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히드로 공항에서 즐겁게, 때로는 감정의 복받쳐 오름으로 누군가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러브 액츄얼리’가 표현하는 영화의 진행이 큰 슬픔이나 분노를 나타내기보다는 일상의 반가움 표출이 주가 되리라 예상할 수 있다.
영화 속에 간간이 드러나는 영국 런던의 풍경은 영화처럼 사랑스럽게 도시를 드러낸다. 대개 유럽 도시들이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 전통을 드러내는 도시 풍경에서 그것을 채우는 개별적 장식과 화려함, 섬세한 구성은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감성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현대 건축과 디자인이란 것이 장식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거쳐 만들어져 왔고, 그 결과 20세기 초반의 수많은 디자인에서 장식은 마치 인체의 맹장이나 편도선처럼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던 것이 최근의 의학계처럼 마구잡이로 없애버렸던 맹장이나 편도선을 요즘은 꼭 필요한 경우만 제거하는 것처럼 장식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긍정적 시선도 확보되고 있다. 굳이 장식이라는 말을 하는 것보다는 좀 더 섬세한 디테일이라는 말이 어울리겠지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유럽의 풍경은 괜스레 낭만적이고 따뜻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20세기의 한복판에서 건축에 대한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기본적인 감성이 장식에 대한 불필요함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여행을 통해 얻은 실제적 감성은 섬세하고 풍부한 장식과 디테일의 경험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도시의 풍경이 그렇게 살풍경이게 느껴지기보다는 평범한 여성들처럼 ‘예쁘다!’라는 느낌이 든 것이다. 이런 경험은 모더니즘의 밋밋한 표면으로 가득한 현대 도시 속에서 발견되는 아기자기한 구성으로 이뤄진 우리 옛 건축의 만남에서도 동일하다. 아마도 장식이나 디테일은 실제적 기능보다는 이런 심성적 감각을 자극하는 정서적 기능(?)이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이런 감성의 느낌은 ‘러브 액츄얼리’에서 만나게 되는 배경 공간에서도 여실하다. 비록 한껏 드러나는 따뜻한 사랑 외에 불륜의 사랑도 담긴 영화지만, 크리스마스라는 낭만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도시의 따뜻한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야기하다 보니 21세기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중심개념인 ‘보행’에 대한 주제가 떠오른다. 오늘날 도시와 건축에서 아주 중요하게 언급되는 것이 보행이다. 정확히는 보행이 가능한 도시 만들기다. 영어로 ‘Walkable’인데, 보행이 가능한 도시 만들기는 상업적 공간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다.
19세기 산업 혁명 이후 잉여생산물로 인한 경제적 성장과 팽창은 20세기 풍요로운 시대를 열었다. 인종이나 계급 갈등 등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의 잔인함도 있었지만, 유사 이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식주의 풍요로운 혜택을 누렸다. 이는 대량생산과 표준화라는 경제적 생산성 극대화에 따른 것이었다. 대량생산과 표준화, 생산성은 도시 기능을 물리적으로 분리하고 단순 집중화했다. 당연히 이동은 중요한 도구였고, 시간과 물리적 거리는 소비되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대량 생산과 표준화, 생산성은 소품종 다량 생산과 개인화된 개별성, 극도의 효율적 생산구조의 혁신으로 시간을 단축시키고, 물리적 거리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20세기 물리적 공간들은 이제 큰 의미가 없어지고, 소멸의 과정을 겪고 있다. 오프라인의 수많은 상점이 문을 닫기 시작하고, 항구적일 것 같았던 건축의 기능은 수시로 교체되고 소모되기 시작했다. 소유의 개념에서 공유의 개념으로 전환되면서 도시와 건축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시대에 도시와 건축은 더 인간적이고, 개인의 취향으로 전환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좋다고 하거나, 소수 엘리트에 의해 강요되던 것들이 점차 의미를 잃어가고 근본적인 질문을 받기 시작한다.
이런 시대에 오히려 19세기 이전 불특정 다수의 장인이 만들고, 사람들이 별 이견 없이 대대로 전해 내려져 온 아름다움에 대한 시선이 인정받기 시작한다. 유명 건축사의 작품도 아닌 달동네의 허름한 동네 아저씨가 지은 불법 건축을 새삼 아름답다고 평하고, 공장의 거친 구성에 시대를 앞서가는 갤러리와 패션 매장들이 들어선다. 첨단 기업들이 앞다퉈 이런 낡고 버려진 공간을 찾아서 창조의 DNA 공간으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이런 시대에 보행의 요소들이 주목받고 각광 받기 시작한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는 대단하게 작가주의적이거나, 생각을 깊게 하는 철학적 사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삼 다시 보게 만드는 것은, 이런 인간적 요소들을 주목하게 만드는 오늘날의 인간적 공간이 가진 역설적인 첨단의 힘 때문이다. 아날로그를 표상한 첨단이라고나 할까?
물론 영화는 고전적 디테일이 풍부한 공간만을 배경으로 하지 않았다. 한때 사람들의 걸음걸이 진동에 의해 흔들려 부실 공사가 아닌가 의심을 받았던 현대적 감각의 ‘밀레이엄 브릿지’나 인테리어의 새로운 자극을 주었던 콘란경이 주도한 ‘서더크 지역’이라던가, 21세기적 현대적 감각의 ‘카나리 와프’도 나타나지만, 그래도 영화의 따뜻한 낭만은 거친 페인트로 도색한 현관과 실내가 보이는 고전적 런던 풍경에서 더 진했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 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 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ncslab@ncsarchitect.com
'아티클 | Article > 연재 | Seri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멸의 건축 01 산 마르코 종탑 2020.2 (0) | 2023.01.10 |
---|---|
창작 프로세스를 보여준 두 영화 ‘더 와이프’ & ‘마일스와 함께 집 짓기’ 2020.2 (0) | 2023.01.10 |
미션 그리고 산 후안 카피스트라노의 수도원 2019.12 (0) | 2023.01.07 |
이창(Rear Window)... 건축의 심리학을 이용한 알프레드 히치콕 2019.11 (0) | 2023.01.06 |
이타미 준의 바다, 프랭크 게리의 스케치, 그리고 아이 엠 페이 2019.10 (0) | 2023.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