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애활가 제씨는 한번 보실 만한 것이올시다” 2020.3

2023. 1. 11. 09:03아티클 | Article/정카피의 광고이야기 | AD Story - Copywriter Jeong

"Our Aewhalga(movie fan) ‘the Je Clan’  are worth seeing" 

 

한국 시간으로 2월 1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충’이 작품상은 물론 감독상, 각본상, 국제극영화상까지 4개 상을 수상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최다 수상 기록이고 비영어권 영화 최초의 작품상 수상 기록이다. 봉준호 감독이 감독상 수상 소감에서 같은 감독상 후보이자 대 선배 감독인 마틴 스코세이지에게 경의를 표하고 참석자들이 기립박수로 공감한 것은 시상식 최고의 명 장면으로 두고두고 화제에 올랐다. 최고상인 작품상을 수상하기 위해 감독과 제작자, 배우들이 무대에 서있는 장면을 볼 때는 나도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냥 기쁜 정도가 아니라 마치 내 일처럼 기뻤다. 
기생충은 작년 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에 수상한 영화는 겨우 세 번째이고, 64년 만에 나온 새 기록이라고 한다. 기생충은 시드니영화제를 비롯한 해외 영화제와 골든글로브와 영국아카데미 시상식을 비롯한 해외 시상식에서 2월 19일을 기준으로 총174개의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작년 4월에 전파를 탄 기생충의 TVCM을 찾아보았다. 30초의 짧은 시간 안에 영화의 극적인 장면이 알차게 담겨 있고, 배우들의 대사와 성우의 내레이션이 기막힌 대구를 이루고 있다. 광고는 영화 기생충을 ‘가족희비극’이라는 한 마디로 정의하고 있었다.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 했는데 영화와 무척 잘 어울리는 규정이다. 선한 사람과 악인의 구별이 모호한 기생충의 등장인물들을 떠올리면, 희극이면서 동시에 비극인 영화라는 모순이 성립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기생충_TVCM_2014


어머니)       핸드폰도 다 끊기고
                   와이파이도 다 끊기고 응?
Na)             전원 백수 가족의 장남 기우,
                   고액과외 면접을 갑니다. 
아버지)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Na)             2019년 봉준호 감독의 
                   새로운 가족희비극 기생충 
                   5월 대개봉

 


우리나라에 영화가 처음 상영된 시기는 언제일까? 여러 가지 가설 중에 가장 앞선 상영 시기는 1897년 10월 상순 경이라는 추정이다. 영국 일간지 런던타임스(London Times)의 객원기자로 활동하던 영국인 애스터 하우스(Aster House)라는 사람이 조선에서 최초로 영화가 일반 대중에 공개되었다는 기사를 취재해 영국 본사에 송고했다. 기사는 1897년 10월 10일자 런던타임스에 3단 기사로 게재되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극동 조선에도 어느새 활동사진이 들어왔다.
 1897년 10월 상순께 조선의 북촌 진고개의 어느 허름한 바라크 한 채를
 3일간 빌려 가스를 사용해 상영했는데 활동사진을 통해 비춰진 작품은 모두
 불란서 파데(Pathé) 사의 단편과 실사사진들이 전부였다.”

애스터 하우스 기자는 ‘이때 입장료를 받았으므로 조선인들은 매우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으나 가난했기 때문에 돈이 없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크 밖에서 서성거리기 일쑤였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매우 측은해 보였다’고 취재했다.*
1901년 9월14일 <황성신문>에 실린 ‘사진활동승어생인활동’(瀉眞活動勝於生人活動) 즉 ‘활동사진이 사람활동보다 낫다’라는 제목의 논설을 보면 영화를 본 사람들의 반응을 엿볼 수 있다. 

“사람들이 활동사진을 보고 신기함에 정신이 팔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참으로 묘하다고 찬탄하여 마지않는다.
 사진이란 곧 촬영한 그림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것이 배열되어 움직이는 것이
 마치 사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같이 가히 움직이는 그림(活畵)이라 할 만하다.”

카메라로 찍은 정지 화면의 사진조차 변변히 본 적이 없었을 당시 한국 사람들이 활동사진, 곧 영화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를 알려주는 재미있는 기록도 있다. 기차가 역에 들어오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비명을 지르며 피했고 불을 때는 화면이면 자기 자리에 불이 옮겨 붙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무엇보다 스크린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무대 앞으로 나가서 보기도 했다. 또 하얀 드레스 입은 여자 무용단원이나 합창단원이 인사를 하는 장면이 비치면 갓 쓰고 도포 입은 관객들이 절을 받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고 한다.** 

영화 광고가 처음 등장한 때는 1903년이다. 1903년 6월 23일자의 황성신문(皇城新聞)에는 동대문 안에 있는 ‘기계창’이라는 전기회사에서 우리나라 및 구미 각국 도시의 뛰어난 경치를 보여주는 활동사진을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후 8시부터 상영한다는 광고가 실려있다. 그때도 영화는 인기있는 오락거리여서 황성신문의 같은 해 7월 10일 기사에는 “전차를 타고 온 관객들로 상영회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덕분에 매일 밤 입장 수익이 백여 원에 달했으며 덩달아 전차표 수익도 올랐다”라고 보도하고 있다. 

동문 전기회사 기계창_영화상영 신문광고 _황성신문 1903. 6. 23.
동문 전기회사 기계창_영화상영 신문광고 _황성신문 1903. 6. 23.



동(대)문 안의 전기회사 기계창에서 시술(施術)하는 활동사진은 
일요일과 비 오는 날을 제외한 매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설행(設行)되는데, 
대한 및 구미 각국의 생명(生命)도시, 각종 극장의 절승(絶勝)한 광경이 구비하외다. 
허입료금(許入料金) 동화 10전(銅貨十錢)


한성전기회사는 동대문 기계창에서의 영화 상영이 큰 성공을 거두자 이 상영공간을 ‘동대문활동사진소’라는 이름을 붙여 운영한다. 활동사진 상영회는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에 한성전기회사는 서대문 근처의 협률사(전통연희극장으로 이후 원각사가 됨)도 빌려서 상영했는데, 이곳은 영사기에서 발생한 불꽃으로 화재가 나 금방 중단되었다.

한국인이 자본을 대고 한국인이 대본을 쓰고 감독, 출연한 최초의 영화는 1919년 제작, 상영된 ‘의리적 구토’이다. 지금은 필름도 그 영화를 본 사람도 남아있지 않아서 당시 신문의 기사와 광고를 통해서만 내용을 추측할 뿐이다. 조선 최초의 연쇄극을 제작하고 유행시킨 주역은 바로 단성사의 사주 박승필과 신파극단 신극좌의 김도산이다. 일본인들의 틈바구니에서 유일한 조선인 흥행사였던 박승필은 단성사를 기반으로 서구영화를 소개하며 조선영화 제작을 도모했고, 김도산은 신파극단의 대표이자 배우로 장안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1919년 10월 26일 매일신보에 실린 광고를 보면 의리적 구토의 제작자와 감독은 물론 촬영장소까지 자세히 알 수 있다. 

의리적 구토_신문광고_매일신보 1919. 10. 26.
의리적 구토_신문광고_매일신보 1919. 10. 26.


신파신극좌 김도산 일행의 
경성에셔 촬영된 대연쇄극
이미 아시난 바와 갓치 됴션의 활동연쇄극이 없어서 항상 유감히 역이던 바
한번 신파 활동사진을 경성의 제일 좋은 명승지에서 박혀 흥행할 작정으로 
본인이 5천원의 거액을 내어 본월 상순부터 경성내외 좋은 곳에서 촬영하고 
오는 27일부터 본 단성사에서 봉절개관을 하고 대대적으로 상장하오니 
우리 애활가 제씨는 한번 보실 만한 것이올시다.
됴션 신파의 활동사진은 금고에 쳐음
단성사주 박승필

촬영장소(박힌곳)
한강철교, 장춘단, 청량리, 영미교, 남대문 정차장, 뚝섬, 살곶이다리, 전차, 기차, 자동차, 노량진

입장료
특등석 1원 50전, 1등석 1원, 2등석 60전, 3등석 40전
 







의리적 구토가 세상에 나온 지 꼭 100년 만에 만들어진 우리 영화 기생충이 전세계 애활가(愛活家), 즉 영화팬을 사로잡았다는 소식은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잔뜩 위축되고 우울했던 내게 큰 기쁨을 주었다. 평소 내가 존경하는 물리학자 이종필 박사는 오스카 4관왕이 가치 있는 이유를 ‘기생충은 우리가 함께 살아온 날들의 봉준호식 기록이고 시대를 함께 고민했던 집단지성이 봉준호라는 천재에게 투영된 결과물이며, 그 암담한 세월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즐겁고 유쾌하게 의미를 찾고 미래를 기약했던 우리의 해학과 스토리텔링과 긍정의 코드가 마성의 봉 감독에게서 정점을 찍은 옥동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글에서 지금의 어려움을 희망으로 견디어야 하는 이유와 영화가 만드는 기적을 읽는다. 
여러 모임이 취소되고 나갈 때는 마스크를 쓰고 지하철에서는 내 곁에 선 사람들의 입김이라도 닿을까 노심초사하는 날이 계속되고 있다. 평범한 일상이 순식간에 바이러스 전파의 악마적 행동으로 변하는 뉴스를 매일 본다. 문을 닫은 영화관도 있고 관객도 부쩍 줄었다고 한다. 이 심각한 사태가 더 큰 피해 없이 빨리 지나가서 마음 놓고 숨 쉬고 영화관 나들이를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출처 * ‘[현대사 속설과 진실1] 한국 최초의 영화 1923년 만들어진 <國境>이 효시’,

월간중앙, 2004년 11월호 ** ‘[한국영화 100년의 기록] 1903년 활동사진 첫 상영? 조선, 16년 뒤 첫 영화 찍다’, 서울신문, 2019년 1월 21일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업 계에 입문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주)샴페인,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 계열의 벨컴에서 크리에이티브 디 렉터로 일했다. 독립대행사인 (주)프랜티브에서 ECD로 일하 다 독립하여 다양한 광고물 제작과 글쓰는 일을 하고 있다.

abacab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