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6. 09:04ㆍ아티클 | Article/정카피의 광고이야기 | AD Story - Copywriter Jeong
“We’re just happy with this small matter”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이던 시절, 담임 선생님이 아침 조회에 낯선 얼굴의 학생을 데리고 들어오는 일이 가끔 있었다. 교실에 가득찬 70명 가까운 아이들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잔뜩 긴장한 표정의 전학생을 쳐다보았다.
“오늘부터 우리 반에서 함께 공부하게 될 전학생이다. 반갑게 맞아주길 바란다. 저기 빈 자리 보이지? 거기 앉으면 되겠네.
들어가기 전에 자기 소개하고 들어가.”
전학생은 어느 학교에 다니다 온 누구라고 이름을 겨우 더듬더듬 얘기하고는 들어가 앉는다. 그러면 나는 종일 새로 온 아이를 궁금해 했다. 얼굴이 참 예쁘네, 공부는 잘 할까?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할까? 동생이 있을까? 저 아이가 다니던 학교는 어땠을까? 매일 보아서 오늘 도시락 반찬이 뭔지까지 뻔하게 짐작할 수 있는 친구들보다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전학생이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전학생 옆에 가서 말을 붙이기도 했다. 내가 모르는 다른 세상의 얘기를 동화책을 읽는 것처럼 홀려서 들었다.
가끔은 나도 전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 하는 학교에 가서 새침을 떨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니 내게 기대하는 일도 없고, 내가 해야 할 일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새 학교의 친구들이 나를 궁금해 하고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붙이는 상상은 꿀처럼 달콤했다. 지금 생각하면 겨우 열 두 살에 나는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다. 특별히 힘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반복되는 일상 매일 보는 똑같은 얼굴에 싫증이 났었던 모양이다. 앞으로의 인생도 비슷비슷한 일이 지루하게 되풀이 될 것을 그 나이에 벌써 어렴풋이 짐작했던 것일까?
그 때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다. 나는 아직도 가끔 낯선 곳으로 훌쩍 떠나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그래서인지 미생의 작가 윤태호의 신작 웹툰 「어린」의 TVCM을 보는 순간 갈대처럼 마음이 흔들렸다. 광고에는 팍팍한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나온다. 실적을 채워야 하는 회사원, 내일이 막막한 취업 준비생, 엄마에게 혼나는 유치원생, 밤늦도록 학원을 뺑뺑이 도는 초등학생, 잠을 포기하고 책상 앞에 앉은 수험생…. 그들이, 아니 우리가 처한 극한 현실은 사람이 살기 힘든 땅, 극지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Na) 사실 우리는 모두 극지에 살고 있다.
친구를 이겨야 하는 현실 속에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 투성이인 삶 속에
밥벌이의 지겨움 속에
지나친 노력이 당연해진 경쟁 속에
우리에게 진짜 극지는 어디일까?
극한 현실에서 도망쳐
남극으로 떠난 사람의 이야기.
카카오 페이지 다음 웹툰,
슈퍼 웹툰 프로젝트
윤태호 작가 신작 어린!
매주 토요일 절찬 연재 중.
카카오페이지 [슈퍼 웹툰 프로젝트]_어린 남극 편_TVCM
수시로 ‘여기 아닌 다른 곳’을 꿈꾸면서도 나는 또 ‘지금 여기’에 있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 기뻐하고 행복해진다. 우산을 활짝 펴고 가뭄 끝에 내리는 봄비를 맞았다. 우산을 두드리는 동글동글 빗소리에 마음이 환하게 열린다. 비가 지나간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떠가고 가로수 이파리의 초록이 한층 더 짙어졌다. 크게 한 숨 들이마시니 가슴 속까지 상쾌하다. 문구점에 들러 초록과 파랑 잉크를 샀다. 노트를 펴고 할 일의 목록을 적는다. 끝도 없는 숙제들이지만 초록 잉크로 쓰니 만만하게 느껴진다. 밥을 벌어줄 일이라 생각하니 다행스럽기도 하다.
커피 한 잔, 삶은 달걀의 보드라운 속살, 군고구마 냄새, 참기름 깨소금 간장에 찍어 먹는 두부 한 점, 짭쪼름한 대저토마토의 과즙도 모두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사소한 것들 때문에 행복하다. 코카콜라가 올해 초에 방영한 광고 영상에서 얘기한 것처럼 별별 것이 다 특별하고 행복을 주기도 한다. 코카콜라 광고에는 길거리 떡볶이를 사먹는 사람, 노래방 기계에서 100점을 받은 사람, 친구와 셀카를 찍는 사람, 길거리 댄스 버스킹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소한 일을 하면서 마치 올림픽 금메달이라도 딴 것처럼 활짝 웃고 환호성을 지른다.
자막) Little Big Moments in 2020
사소하지 않아
완전 좋아
이게 뭐라고
왜 이렇게 신나
별별 것이
다 특별해
박보검) 올해도 우린 겨우 이런 일로 행복합니다.
Na) 코카콜라
자막) 이 맛, 이 느낌
코카콜라_'겨우 이런 일로 행복합니다' 편_TVCM_2020
지난 토요일에는 오랜만에 대학 동기들과 산에 올랐다. 가파른 산길을 헉헉대며 올라갔더니 해발 535m 높이에 14만 평이나 되는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다. 호수를 앞에 두고 준비해 간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그리고 아빠를 따라온 열 살 꼬마 아가씨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꼬마 아가씨는 어린 다리에 산행이 힘들었는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올라왔는데, 바람에 땀이 식자 아저씨 아줌마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노래를 시작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 곳으로 가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열 살 소녀가 부르는 김광석의 노래라니! 오십을 훌쩍 넘은 친구들의 수런거림이 한순간에 멈췄다.
마이크도 반주도 없이 산 위의 호숫가에 울려 퍼지는 맑고 고운 목소리에 우리는 가만히 귀 기울였다.
덜컹이는 기차에 기대어 너에게 편지를 쓴다
꿈에 보았던 길 그 길에 서있네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불안한 행복이지만
우리가 느끼며 바라본 하늘과 사람들
힘겨운 날들도 있지만 새로운 꿈들을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 곳으로 가네
햇살이 눈부신 곳 그 곳으로 가네
노래를 듣는 친구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흐뭇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친구의 늦둥이 딸을 보며 내 아이가 열 살이던 때는 어땠는지 기억을 더듬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들은 머지 않아 세상의 중심에서 물러나겠지만, 저 작은 아이가 우리의 뒤를 따라 이 땅을 이 삶을 이어가겠구나, 저 야무진 눈매 청아한 목소리를 들으니 믿고 맡겨도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되풀이되는 일상이 지겹고 막막해 현실에서 도피를 꿈꾸는 날과,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날들을 반복해서 살고 있다. 힘겨운 날이 며칠씩 계속되기도 하고 즐거운 순간이 이어질 때도 있다. 어떤 상황이든 되도록 덤덤하게 마주하고 지내려고 한다. 산 위에서 친구의 딸이 불러준 노래 가사처럼 `바람에 내 몸 맡기고, 출렁이는 파도에 흔들려도' 그냥 살 수 밖에 없다. 자주 투덜대고 자주 행복해 하면서, 가끔 떠나고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https://www.youtube.com/watch?v=FTytvHNMyvM
카카오페이지 [슈퍼 웹툰 프로젝트]_어린 남극 편_TVCM_2020_유튜브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xHw22oggk8E
코카콜라_’겨우 이런 일로 행복합니다’ 편_TVCM_2020_유튜브링크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업 계에 입문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주)샴페인,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 계열의 벨컴에서 크리에이티브 디 렉터로 일했다. 독립대행사인 (주)프랜티브에서 ECD로 일하 다 독립하여 다양한 광고물 제작과 글쓰는 일을 하고 있다.
abacab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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