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성장 시킨 건 4.3그룹, 그것은 연대였다”_승효상 위원장 2020.3

2023. 1. 11. 09:19아티클 | Article/인터뷰 | Interview

"What grew me up was 4.3 group,  which was solidarity"

 

한국 현대건축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4.3그룹은 1990년 4월 3일 ‘문화로서의 건축과 토론의 장을 만들기 위한 스터디 그룹’으로 출발해 1994년 가을까지 4년간 활동했다. 목천건축아카이브의 후원 하에 발간된 도서 ‘전환기의 한국 건축과 4·3그룹<집>’, ‘4.3그룹 구술집 <마티>’을 살펴보면, 이 모임은 해방 후 지극히 짧은 역사와 비평의 부재 속에서 성장한 한국 건축계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의식을 공유하면서, 한국 건축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상호 비평을 통해 각자의 건축을 확인하며 가다듬는 시간을 갖는다. 23번의 크리틱 및 세미나, 4번의 건축기행, 전시회, 두 차례의 도록 출판을 하는 등 밀도있게 활동을 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집단지성의 발현으로 행해진 건축운동 활동상은 건축담론을 생산해 논쟁을 만들어내었고, 기존의 관점과 가치를 검증하게 했으며, 흐름을 이어가 한국 건축제도의 개선과 교육시스템의 변화까지 이끌어냈다.
월간 건축사가 ‘4.3그룹’ 30주년을 맞아 당시 그룹의 일원이었던 승효상 건축사(현 국가건축정책위원장)를 이로재에서 만나 대담을 나눴다. 90년대 초 현장 비평 등을 통해 당대 시대정신을 건축계에 불어넣었던 4.3그룹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Q 제가 인터뷰 요청을 드린 것은 4.3그룹 활동의 중심에 계셨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제가 창설 멤버인 것 맞지만 중심에 있었다고 할 수 없어요. 열네 명 멤버 모두가 자기 의견이 명확한 분들이었습니다. 애초에 모임을 주창한 분은 우경국, 백문기 두 분인 것 같은데, 1990년 초엽에 제게 두 분이 찾아와서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사무실을 독립한 직후라 다소 두렵고 외롭기도 해서, 참여하게 되었지요.

 



Q 저 뿐만 아니라 설계를 하겠다고 생각했던 막 사회에 나온 친구들에게는 4.3그룹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을 기성세대에서 해주니까 희망처럼 보이고, 우리도 저런 길을 가야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나의 등대 역할을 하셨다고 생각하거든요. 젊은 친구들은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때 어떤 포부로 4.3활동을 같이 하셨고 당시 성과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당시는 건축담론에 대해 서로 목말라하던 그런 분위기가 있었어요. 기억하기로는 70년대 후반, 박정희 군부독재가 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강조한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퇴행적 단어를 프로파간다처럼 내세웠는데 공공프로젝트에서도 한국적 건축을 설계조건으로 강조했어요. 이게 전통에 관한 논의로 진전되었지요. 계기는 잘못되었지만 그게 한국건축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는 분위기를 이룬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이것이 발전적으로 보편적 담론으로 성숙하지 못한 채 한국이라는 로컬에서 함몰했다고 하는 한계는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제 86년에 김수근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88년에 김중업 선생님마저 돌아가셔서 소위 양대 거장의 부재 상황이 됐습니다. 당시는 건축설계 물량이 88올림픽 특수와 맞물려 쏟아져 나온 탓에 활발한 건설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이 외적 성장을 비판적으로 보던 젊은 건축인들 사이에서는 건축의 시대정신에 대한 탐구가 목마른 시기였습니다. 마침 저는 독립한 상황이었고요.
그런 분위기에서 4.3 그룹이 태동한 겁니다. 우리는 그때 한 달에 한번 만나서 자기가 설계한 건축의 현장에서 자청해서 신랄한 비평을 받고, 서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진행했습니다. 생각의 차이와 간극이 너무 큰 경우도 있었지만 이 시대를 같이 하고 있다는 동질성이 모두가 대단히 긍정적이었습니다. 거기에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열네 명이 한꺼번에 모여 연대하니 소위 집단지성이 발휘되는 계기가 되면서 결론들은 늘 괜찮았고, 각자 얻는 바가 많았습니다. 여러 차례 의기투합해 논의를 이어가다 다른 나라의 건축과 그들의 상황도 알고 싶어 같이 해외 기행도 하게 됩니다. 실제 현장에 가서는 상상하던 것과 현실의 차이를 느끼게 되고 현장이 가진 진실을 목도한 중용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게 4.3 그룹의 모든 멤버들 특히 저에게는 제 자신을 발견하는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저는 김수근 선생의 문하에서 15년 있었으니까 김수근 건축 외는 다른 건축은 없는 줄 알 정도였지요. 제 건축을 어떻게 펼쳐야 할지도 몰랐지만 심지어 제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모르던 상태여서 이 4.3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겁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1992년 12월 12일 ‘이 시대 우리의 건축’이란 제목으로, 동숭동에 있었던 인공화랑에서 그룹 전시를 열었습니다. 전시회의 전제는 각자가 어떻게 건축할 것인지를 언어로 정의하며 작업을 보여주자는 것이었는데, 저는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수없이 많은 말 중에서 자기의 언어를 찾는다는 것은 본인에게는 진리를 찾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시회의 전시 방법이나 전시 기간 중에 진행된 심포지엄도 대단히 특별했습니다. 결국은 이 전시회로 서로 얼마나 다른가를 알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그 전시회에서 선언한 내용으로 글로 정리해서 이를 모아 책을 내고 헤어졌습니다. 그게 4.3의 전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건축은 개인의 크리에이티브라고 생각해 완벽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단어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각자의 아이덴티티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런 아이덴티티라면 개인의 관심사에 따라 기능 또는 조형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시각에서 완벽하길 바라는 비평도 많고, 저는 그런 부분이 아쉽다는 입장인데 선생님은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저의 경우 ‘빈자의 미학’이란 언어로 제 건축을 선언하고 나서 많은 비판을 접하기도 했고 격려도 들었습니다. 우선 빈자와 미학이라는 두 개의 단어가 서로 모순되는 듯 했으니 아마도 생소했을 테고 심지어 이를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4.3에서 서로 논의하고 현장을 가보고 했던 활동과 사유의 결과가 그 단어였으며 급기야 저한테는 진리로 다가온 것이어서 제게는 옳을 수밖에 없는 선언이라고 믿었던 겁니다. 그 안에서만 있으면 자유롭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오히려 그 당시 경험의 부족과 지식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지만, 제가 이 언어에 성실하기만 하면 이 담론의 지평이 넓어질 것이라고 믿어서 그런 비아냥들을 괘념치 않았습니다. 물론 상처는 있었겠죠. 그렇지만 후회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Q 활동 간 서로 간의 치열한 논쟁을 벌이거나 공격과 방어도 있었을 텐데요?

예. 굉장했죠. 하지만 저도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모두가 그 혹독했던 4.3의 시간을 통해 많은 도움과 혜택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전에 하던 건축을 완전히 버리고 새로운 건축을 하고 계신 분도 있습니다. 4.3의 과정 동안 서로에게 질타나 비난을 안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 과정 속에서 모두가 성장했다는 건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Q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저는 그런 그룹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 사실은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런 계기가 없었으니까요. 4.3그룹의 시대적 배경과 생각들을 개방된 공간에서 활동한 게 부럽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 당시 전시, 담론 등의 성과물도 다양하게 생산하셨고요. 그런 활동을 하셨던 입장에서 요즘 바라보는 30, 40대의 모임이나 움직임에 대해 조언 또는 응원, 그리고 방향성에 대해 제안을 해주신다면?

요즘의 세대들은 예전에 비하면 비교적 빨리 독립하는 것 같아요. 충분한 디시플린을 갖고 현장에 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위험하지요. 쉽게 건축주의 하수인이나 시녀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아져요. 먹고 살기 다급해지니까……. 그런데 건축주와 한번 그런 관계가 되면 바른 관계로 회복하기가 참 어려워져요. 그러니 뭐라 그럴까… 일이 없을 때도, 외로울 때도 견딜 수 있는 체질을 닦아 놓아야 하는 거지요. 그걸 이루자면 혼자는 어려우니까 연대를 해야 한다고 봐요. 동료로부터 위로도 받고 격려도 하며 가치를 나누는 그런 연대 말이지요.
요즘도 건축하는 이들 서로 만나기도 하는 것 같지만 혹시 개인적 위로 차원에서 끝이 나고 사회를 위한 공의의 결기가 다소 부족한 것은 아닌지 묻고 싶어요. 물론 지금은 한 가지 대의를 발견하기가 이전 시대와 달라 쉽지 않습니다. 지금은 SNS, 인터넷으로 인한 정보의 홍수 시대여서 시대정신이라는 것도 일치하기 힘들고, 한 사람이 주장해서 그것을 다 따르는 시대는 이제 불가능하지요. 이른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시대, 누구든 자기 생각을 제시할 수 있는 시대니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서로 다른 생각이더라도 서로를 발견하고 존중해주는 집단이라면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공존과 공유의 가치가 훨씬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밀실에서 만든 가상현실은 필시 파편적이고 단편적이라 오프라인에서는 공동체를 와해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회가 건전할 리 없겠지요.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가 설혹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뭔가 하나의 틀을 만들어놓고 그 속에 들어가서 연대하자고 제안하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축이 가져야 할 첫 번째 가치는 공공성이라고 믿습니다. 이의 실천은 연대에서 비롯될 것이라고 또한 믿습니다. 건축은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인 까닭입니다.
 
Q 4.3 구성원들은 그와 같은 논쟁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치열하게 논쟁하며 상처받을 것도 각오하고 가감 없이 드러냈고요. 그런데 제가 편집국장을 하면서 느끼는 건 좀 다릅니다. 대체로 말하는 건 좋아하는데 공론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부담스러워하고, 책임지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면도 있겠죠. 예전에는 정보가 귀했기 때문에 정보를 가진 이에게 모두가 귀를 기울였습니다. 권력을 한 사람이 가졌다는 말입니다. 근데 지금은 정보의 홍수 시대이다 보니 어느 누구나 모든 걸 혼자 다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죠. 이것이 공동체가 와해되는 이유이기도 할 겝니다. 그런데 건축설계가 이런 문제에 저항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일이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시대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시대가 보여야 할 가치를 제시하는 것, 그래서 우리의 공동체를 좀 더 건강하게 지속시키는 일이 건축의 바른 임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혼자서 섬 같은 땅에 살지 않는 다음에야 모여서 사회를 이루어야 하는 우리에게 공동체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니, 나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타인에 대해 그 삶에 대한 애정과 존중의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조직하는 게 건축설계라는 것을 안다면 더 그렇지요. 남에 대한 관심, 동료에 대한 관심이 없는데 제 건축 속에서 살게 되는 이들의 삶을 이해한다는 말이 성립될까요?

Q 말씀하신 몇몇 건축사들은 유튜브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보면서 좀 더 조직화되고 시스템을 갖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연합니다. 같이 모여서 전시회를 한다던가. 지역끼리 모여도 좋고요, 연령별로 모여도 좋은데 그렇게 함께 모여 이야기를 하는 게 필요합니다. 작업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협업을 많이 했어요. 오래 전, 파주출판도시 같은 프로젝트가 제게 왔을 때, 이건 여러 사람이 같이 참여하고 논의해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을 하여 무려 마흔 명이 넘는 건축사들이 같이 노력하여 만들었지요. 그 후에도 다른 주거단지 같은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여러 동료들과 나누어 같이 협업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저는 주로 코디네이터 역할을 한 것이죠. 특히 주거 프로젝트인 경우에는 한 사람의 설계보다는 여럿이 나눠서 하면 거주인들에게 더 유익한 주거환경을 만들 수 있거든요. 때로는 그런 일들은 빠르게 성과를 내야 하는 디벨로퍼를 건축주로 맞이하면 설득하기가 힘들기도 하지만 저는 늘 그 입장을 견지해왔습니다. 같이 협력해서 일을 하면 설혹 서로 합의를 보지 못하더라도 서로 얼마나 다른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Q 4.3활동이 다음 세대로 연결된 게 있었을까요?

굉장히 중요한 게 변화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4.3그룹은 1993년에 책을 낸 것이 마지막 활동이었습니다. 아마도 서로를 이제는 너무 잘 알게 되어서이기도 했을 겝니다. 4.3그룹은 해산했지만 몇 사람들은 4.3에서 얻은 공의를 바탕으로 ‘건미준(건축과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에 참가하여 우리 사회의 잘못된 건축제도를 개혁하는 일에도 열심을 기울였고, 그 이후 우리 건축의 근본적인 문제는 교육에 있다고 판단하여 보다 다양한 건축인들을 규합해서 ‘서울건축학교(sa)’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서울건축학교를 10년 정도 운영했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의 건축 교육기관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당시 WTO의 권고도 있어 우리나라의 건축교육제도가 급히 바뀌어야 할 필요가 생기기도 했지만, 서울건축학교가 한국 건축교육의 개혁에 촉매로 작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겝니다. 기존의 건축 관련 대학들의 교육과정이 바뀌는 것을 보고, 서울건축학교는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이 대학원을 만들면서 이 과정으로 변환되어 새로운 제도권이 됩니다. 서울건축학교의 후신이 한예종 대학원이니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죠. 제도도 바뀌고, 학교도 바뀌고 또 덕분으로 새건축 운동이 일어나서 결국은 현재의 새건협도 태동한 셈입니다.

Q 편집국장으로서 확인하는 것이 건축계 내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과정도 치유되거나 개선이 되어 서로 개방적인 시각으로 만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단순히 불만만을 토로해서는 안 되겠지요. 제가 주장하는 의무가입이라고 하는 것은 건축허가제도를 선진국 수준의 시스템으로 바꾸는 일환이고, 이렇게 되면 건축사에게 많은 혜택 속의 좋은 환경이 제공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하나의 조건으로 자정적 징계 장치를 마련하자는 것입니다. 거기로 가는 단계로서 의무가입입니다. 대한건축사협회도 건축계를 아우르기 위해선 대단한 변신, 변화의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여러 가지 개선되는 건축제도가 오히려 개악이 될 수가 있습니다.
 
Q 4.3활동이 교육계에도 영향을 줬지만, 건축정책에도 크게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는데요. 국가건축정책위원회도 이에 뿌리를 둔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습니다. 건축이 단순히 건설의 행위가 아니라 문화의 중요한 현상이며 역사적 기록이라는 바탕에서 그 가치를 공유한다고 여깁니다. 저 같은 경우 설계하는 사람으로서의 공공적 가치와 윤리를 4.3의 과정을 통해 습득했으니 그때 배운 걸 실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4.3이나 건미준, 서울건축학교 같은 문화운동적 차원의 활동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공공영역에서 복무하는 저를 생각하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저 만이 아닙니다. 지금 지방자치단체들에서 총괄건축가 직무를 맡고 계신 민현식(경상남도), 김인철(부산시), 이성관(대전시) 선생이 다 4.3의 멤버들이었으니까 4.3그룹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봐야죠.

 



Q 선배님들 뵈면 현업이시고, 제도개선에도 직접 참여하시는데, 후세대에서는 현업군과 학교가 분리된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학계의 발언권이 오히려 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학계의 발언권이 현역, 건축사 발언보다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더 신뢰받고 있는 것 같다는 거죠.

건축사들은 개인적 작업을 하는 입장에 있다 보니 공적인 입장이 아니고, 교수는 공적이라고 생각해서 정부나 공공기관에서는 건축사보다 교수를 대하기가 쉽겠죠. 그건 무책임한 사고라고 말할 수 있어요. 또한 위원회 제도 자체가 어떻게 보면 공무원들이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한 제도이기도 한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수들이 위원회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책임지지 못하는 발언들과 결과가 심심찮게 도출되어 위원회에 대한 회의가 늘 있게 됩니다. 사실 좋은 위원회라면 중지를 잘 모으는 것이니 학교보다는 현장에서 수많은 사건을 겪고 있는 건축사로부터 나온 지혜가 더욱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단 그 건축사가 공적 가치를 신봉하느냐가 전제되어야 하겠지요.

Q 4.3의 힘이라면 실무경험과 집요한 논쟁과 학습을 했기에 현재의 아웃풋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각종 위원회에 가보면 그냥 오시는 분들 많다는 거예요. 그런 부분에 대해 밸런스를 맞출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개인적인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위원회가 워킹그룹이 되어야지 자기 일이 아닌 양 혹은 존재의 과시를 위한 비판만 하면 없느니 보다 못한 프로세스가 되는 겁니다. 위원으로 위촉되면 그 커뮤니티에서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실제로 일을 해야 하고 서로 결과를 나눠야 합니다. 아무 준비 없이 파편적이고 단편적인 생각들을 뱉고 가는 위원회는 마땅히 폐지되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현재 우리가 꾸리고 있는 많은 위원회가 그런 것이 문제이지만…….

 

Q 4.3과는 다른 문제인데, 심의를 없애자고 하셨는데 그 부분은 저도 축소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면허라는 단어가 원래 허가를 면해준다는 뜻이지요. 운전사가 운전할 때 허가를 받지 않고, 의사가 수술할 때 허가 받지 않는 것처럼 국가가 자격과 면허를 줬으면 그 사람을 믿고 행위를 하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국가가 허가권을 갖고 있으면서 책임은 안 지지요.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현재의 우리의 허가제도는 잘못된 제도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걸 폐지하듯 개선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되면 면허를 소지한 사람의 태도가 굉장히 중요해집니다. 자기 책임 하에 설계하고 잘못하면 철저히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되면 심의가 필요 없게 되겠지요. 국가가 자격을 줬고 그 안에서 행하자는 것이니까 모든 것이 명확해집니다. 도면에 자기 이름의 도장을 찍을 때 이 모든 것을 책임진다는 확실한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공무원은 자격 있는 사람의 날인 여부만 확인하면 되는 것입니다. 허가는 기존 법규를 어겨서 설계할 때 공공의 이익에 부합되는지 위배되는지 그럴 때만 필요하게 되는 거죠.

Q 특정 지역의 경우 공공건축가에 간판업자가 들어가고, 일부 지역의 총괄건축가에는 도시계획분야 분이 선임됐더라고요. 자격기준에 대해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지방의 자치단체에도 총괄건축가 제도를 확산시키는 일도 국건위의 중요한 과제여서 저는 지방자치단체장들과 이와 관련한 회의를 연속으로 진행해 왔습니다. 그럴 때 총괄건축가의 인선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임의대로 뽑는 경우 적절한 사람이 뽑힐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예상되는 문제가 많지요. 우리에게 이런 제도의 시작단계에 있어서 당분간 문제도 발생하겠지만 결국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다만 서로의 문제를 공유하는 게 필요하다 싶어 일관된 규례를 구상 중에도 있습니다.

Q 다시 4.3으로 가서 제 기억 속에는 10년 정도 활동했다고 생각했는데, 4년 활동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건축계 임팩트는 크다고 봅니다. 저는 이런 움직임이 계속 이어지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데, 방법이 있을까요?

4.3그룹은 그 임무가 끝이 난거죠. 이제 젊은 세대에서 이런 류의 모임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여러 모임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자기 개인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것 같아서, 그게 이제 불안해요. 결코 개인이 완벽할 수 없거든요. 앞에서 강조한대로 연대하는 게 중요해요. 강제적으로 만들 수도 없고 해서 기다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실 4.3 그룹에서 구성원이 애초부터 대단했던 것은 아닐지도 몰라요. 멤버들 모두가 자기를 버리고 다듬어서 단단해진 것입니다.

 



Q 이제 4.3그룹은 현직에서 보면 원로급이 되셨는데, 회고전과 같은 행사를 혹시 준비하고 계신 게 있을까요?

올해가 30년이 되는 해여서 뭔가 기념할 만한 좋은 시기인 것이 틀림없어서, 지난주에 참 오랜만에 한번 모였어요. 뭘 하자고 얘기가 나오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건축에서 은퇴하다시피 한 분도 있고, 건강이 불편한 이도 있고 해서 무엇을 같이 하자는 일은 어렵다는 걸 확인하고 말았습니다.

Q 낮에 만난 한 건축사가 자기 꿈은 아틀리에로 가는 게 꿈이고, 모델이 되는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비교적 젊은 건축사들에게는 4.3 건축사들이 훌륭한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4.3의 여러 분들, 어떤 분들은 저보다도 나이가 많은데 여전히 현역으로 설계를 하고 있는 게 전 시대 선배들의 조기은퇴 현상을 생각하면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하게도 여깁니다. 그게 4.3의 시간 덕분이라고도 여기기도 하고요.
저는 이제 공공 영역 복무를 4월에 마치고, 건축사 고유의 직업으로 복귀한다고 말해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공공영역의 활동도 제 자신의 건축을 연마하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고 또한 그렇게 바라고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건축설계는 다른 이들의 삶을 조직하는 일인 만큼 나이 들어 삶에 대한 지혜와 세상 이치에 대한 이해가 더해지면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기 되기 위해서는 젊을 때부터 치열하게 무장을 해야지요. 좋은 이념과 담론이 없는 나이든 건축사에게 누가 일을 의뢰하겠어요? 대부분이 그렇게 일을 그만두는 겁니다.

 

4.3그룹이 30주년을 맞아 지난 2월 17일 종로 몽중헌에서 회동을 가진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 두 번째부터 4.3그룹(14명) 구성원 중 승효상, 백문기 ,  방철린 ,  민현식 ,  동정근 ,  이성관 ,  곽재환 ,  우경국 ,  김인철 ,  석정훈 대한건축사협회장(왼쪽에서 일곱 번째), 박성준 대한건축사협회 이사(왼쪽 첫 번째)


Q 젊은 세대들의 경우 지금 먹고 살기도 힘든데 우리에게 많은 걸 요구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런데 간과하는 것이 사실 그때도 힘들었을 거라는 말이죠.

(웃음) 저는 젊었을 때 무척 힘들게 살았지만 요즘 젊은 친구들이 듣기 싫어해서 그 이야기는 요즘 안 합니다. 그보다는 건축의 공공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부쩍 하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한 건축주가 10층짜리 건물을 지어달라고 하는데 제가 보니까 주변과 어울리지 않아 6층만 제안한 일이 있었습니다. 건축주와 이 일로 의견이 다르게 되고 제가 의견을 굽히지 않았으니, 그 건축주는 그냥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4.3그룹 멤버들과 같이 어려울 때 서로 위로하며 쌓은 신념을 배반할 용기가 제겐 없었습니다. 그런 과정이 쌓이고, 어느덧 시간이 지난 후 그때 인연을 맺지 못했던 건축주가 다시 와서 당신 말이 맞다고 말하며 찾아오는 행복한 경우도 생깁니다.
다른 이들의 보다 나은 삶을 조직시켜주어야 하는 건축은 어떻게 보면 진리를 찾는 일이어서 시시때때로 고독하고 더러는 황망해요. 그래서 연대가 필요합니다. 혼자 하면 금방 포기하지만 같이 있으면 절대 쉽게 포기 안하거든요. 연대가 중요합니다.

 

 

 

 

 

 

 

승효상 위원장 Seung, H-Sang 대통령소속 국가건축정책위원회


대담=홍성용 편집국장, 글 장영호·박관희 기자, 사진=장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