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3. 09:23ㆍ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건축담론 Architecture Discussion
편집국장 註
언제부터인가 건축사의 업역에서 도시 계획, 도시 설계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산업사회가 시작될 때만 하더라도 새로운 도시의 비전을 이야기하고 도전했던 이들은 다름 아닌 건축사들이다. 산업구조가 팽창하고 제조업 중심의 사회가 기능을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사회에는 새로운 도시 구조가 필요했다. 이른바 조닝 개념이 나오고, 기능을 중심으로 분화되었다. 제조업의 분업화처럼 일하는 공간과 생활하는 공간이 분리된 것이다. ‘아홉 시에서 다섯 시까지’라는 1일 8시간 근로시간의 획일적 적용은 매우 생산적이고 효율적이었다. 규모 또한 대규모로 이뤄지면서 자연스레 도시 설계와 건축 또한 분리되었다.
문제는 산업구조가 본격화되면서 도시 문제도 함께 부각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앨빈 토플러가 지적한 제3의 물결을 넘어서 현재 4차 산업혁명 시대로 진입한 상황에서, 더는 시간의 구분만으로 도시구조의 생산성을 올리기 힘들어졌다. 인권과 생활권을 요구하는 등 사회적 변화가 시작되었고, 개별적 시간 운용과 상호 간의 네트워크를 필요로 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조닝의 거친 구성을 넘어서서 디테일이 필요해진 사회가 된 것이다.
이런 변화의 첨단에는 판교 디지털 밸리가 있다. 판교 디지털 밸리는 지역 내 총생산(GRDP)이 연 80조원에 이르는 직주근접 목표의 도시다.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도시지만 그럼에도 도시의 구조는 제조업의 기능이 분화된 탓에 주말이면 공동화 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실질적인 보행 네트워크는 전혀 구성되어 있지 않고, 자전거 이용률 또한 저조하다. 결코 21세기의 도시구조가 아니다. 건축적 섬세함이 도시 계획에 반영되지 않았다.
다행히 최근에는 건축적 섬세함이 반영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시 계획과 구성이 정책에 반영되고 있다고 한다. 과천을 비롯한 여러 신도시들을 그 대표적인 모델로 주목할 만하다. 실제 이런 계획에 참여해본 경험이 있는 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쾌적한 도시란 무엇인지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01 Urban Design and Architects
“지구단위계획? 재개발이나 대형 개발사업을 할 때, 용적률이나 높이를 정하는 것 아니야? 조경면적을 늘이면 용적률 완화도 좀 받고…….” 지구단위계획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이다. 지구단위계획이 도입된 2000년 즈음에 재개발(재건축)의 광풍이 불어서인지, 지구단위계획은 대형 개발사업을 하기 이전에 수립해야 하는 절차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이것이 현실 속에서 대부분의 건축사가 경험하는 도시설계(urban design)의 실체가 아닐까?
누군가가 도시설계(urban design)에 대해 물어보면, 나는 “도시계획(urban planning)과 건축(architecture)의 경계에서 하드웨어와 휴먼웨어, 그리고 소프트웨어의 관계를 디자인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지만, 솔직히 자신은 없다. 잘 만들어가고 있는 도시설계의 결과물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까지 건축사들은 도시설계 언저리에서 일해 왔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지자체와 함께 공공지침을 만드는 높이계획, 도시경관계획, 건축물가이드라인, 지구단위계획도 사무실의 중요한 일감이었고, 마을공동체, 도시재생, 컨텐츠계획도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배우고 경험하면서 도시설계의 실체에 여전히 접근하는 중이다.
국가건축정책위원회, 공공건축가, 도시설계학회 등을 통해서 끊임없이 요구되었던 도시건축을 통합적으로 디자인하는 과정이 입체도시 마스터플랜이라는 이름으로 3기 신도시 계획에서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입체도시 마스터플랜은 택지조성이나 도시개발사업에서 입체적 토지이용계획과 3차원적인 건축계획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구체적인 미래모습을 설정하고, 또 거주자들 간의 관계를 풍성하게 만들어주기 위한 도시건축 전략을 마련하는 계획이다.
지금까지 신도시를 계획할 때 건축사는 도시계획에서 기반시설계획과 토지이용계획이 확정되면 그 위에 건축시뮬레이션으로 높이계획, 경관계획, 특화지침 등을 수립하는 부분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 특별계획구역 마스터플랜을 통해서 입체적인 지침이 만들어져도, 확정된 토지이용계획의 개별필지 위에서 공개공지, 건축물의 형태와 외관·재료 등을 컨트롤하여 독특한 도시분위기를 만들어 내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건축사가 토지이용계획을 도시계획가처럼 계획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건축사의 시선으로 자족용지와 주거용지의 관계, 공원과 필지의 관계, 역세권과 공원의 관계, 상업시설과 차량, 보행이 뒤섞여 움직이기 힘든 현재 도시의 문제를 입체적 공간으로 다뤄 토지이용계획 단계에 함께 시선을 보태면 매력적인 도시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특히, 매력적인 도시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건물, 도로, 하수도 같은 하드웨어인프라보다는 소프트인프라다. 소프트인프라는 산업생태계를 바탕으로 모인 새로운 도시구성원들이 그들의 지적에너지를 생활 속에서도 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다양한 매개프로그램과 매개환경이다. 다양한 클라이언트와 이용자의 니즈를 공간적으로 해결해내는 건축사는 이런 매개 프로그램과 매개 환경을 만드는 일에 능한 편이다. 개인적으로 도시재생사업을 경험하면서 지속가능한 도시에 대한 고민을 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재생이 필요한 도시는 일자리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흩어지며, 빈 집, 빈 상점가로 지역이 황폐해지는 과정에 놓여 있다. 용산전자상가 도시재생 마스터플랜, 통영폐조선소 마스터플랜, 영도 경제기반형 도시재생계획 등 산업쇠퇴지역의 산업생태계전략을 관련 분야 전문가들과 수립하는 경험을 하면서, 지속가능한 일자리가 있는 도시를 위한 중요한 과제가 창의적 도시 분위기에 있음을 알았다. 창의적인 도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연관 산업들이 산업생태계로 클러스터링하고 사람들이 도시 안에서 서로 자극받고 수렴, 발산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제3의 공간이 곳곳에 배치된 곳에서 창의적인 도시 분위기도 생겨날 것이다.
3기 신도시의 경우, 도시 자족성 기능과 S-BRT라는 신교통수단을 이용해서 계획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3기 신도시 중 인천계양지구 공모를 참여하게 된 이유는 김해공항과 인접한 에코델타시티의 특별계획구역 마스터플랜을 수립한 경험이 있었고, 김포공항과 인접한 계양지구의 비행고도로 인한 높이규제, 공항경제권이 갖는 잠재력에 대해 고민한 것을 좀 더 구체화 시켜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공모진행 과정에서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가까운 미래도시는 어떠해야 하나? 여기에 살아갈 사람들은 누구인가?’였다. 미래의 도시는 4인 가구 시스템이 유효하지 않고, 그렇다면 초등학교 중심의 근린주구론도 유효하지 않다. 역세권도 중요하지만, 공원권, 여가문화권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살아갈 도시가 필요하다. 인도어에서의 편안함과 아웃도어에서의 개방감이 공존하는 도시, 걷기를 비롯해 퍼스널 모빌리티, 대중교통, 자동차 등 모든 이동시스템을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도시를 원한다. 하지만 지금의 상업가로는 자동차와 사람이 뒤엉켜 작게 파편화되어 있는데, 과연 미래의 상업공간도 이렇게 혼잡해야만 할까라는 질문과 함께 보행중심의 지역사회가 만들어지는 400미터×400미터의 새로운 대지(HYPER TERRA : 입체적으로 특화된 인공의 대지)를 만들었다. 하이퍼테라는 어린아이도 특별한 관심 없이 뛰어다닐 수 있는 공간이면서 대형 광장이자, 시민들이 살고 놀고 일하며 교류하고 소통하는 중심공간이다.
우리는 4차 산업혁명으로 많은 것이 변해가는 불확실성 위에 놓여 있다. 과거의 변화와 개혁은 연속선에서 일어나고 있어 어느 정도는 예측이 가능했다. 4차 산업혁명은 불연속적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다만, 인천계양지구가 공항경제권이라는 글로벌교통의 거점에 위치하고 있기에, 전 세계와 전국의 문화·정보가 머물고 교차하고 공존하는 ‘두뇌중심지(지식정보서비스)’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극단의 시대에 균형점을 잡을 수 있는 지역의 랜드마크 이미지가 필요했다. 57.86미터라는 높이규제 속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랜드마크는 곡선형의 S-BRT라인으로, 건축물의 축을 틀면서 만들었다.
도시설계는 행정과 전문가의 용어가 아니다. 지역맞춤형의 공간구축을 위한 지역공동체의 사회적 약속이기에 시민이 함께 이야기해야 하는 제도다. 지금 우리를 둘러싼 도시의 풍경은 우리가 합의하고 만들어 낸 약속의 결과물이다. 그 풍경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좀 더 나은 방법을 찾아서 규칙을 만들고, 실천하고, 좋다거나 싫다거나 이야기해야 한다. 도시개발에서 공간관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이 시점에 3기 신도시의 도시설계(입체도시 마스터플랜)는 사회구성원들의 공간관리에 대한 인식을 높여주는 매개가 될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LH의 입체도시 마스터플랜과 같이 공공이 발주하거나 공모하는 도시설계업무에 대해서 건축사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참가자격에 대한 문턱을 낮출 필요가 있고, 건축사들도 다른 분야와의 협업을 통해 도시설계 프로젝트를 경험한다면 우리도 사람 중심의 머물고 싶은 도시를 만들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글. 한영숙 Han, Youngsuk (주)싸이트플래닝 건축사사무소 · 건축사
한영숙 건축사 · (주)싸이트플래닝 건축사사무소
멋진 도시에 살고 싶은 대한민국 건축사로 경성대학교에서 건축공학, 디자인학, 도시공학을 전공했다. 2006년 싸이트플래닝건축사사무소를 개소한 이후 건축설계뿐만 아니라 도시설계, 도시재생, 스마트도시 등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행복한 동네살이를 위한 33가지 이야기(국토연구원)’, ‘감천문화마을, 풍경이 된 공동체’, ‘보수동의 공간과 시간’ 등이 있다. 부산광역시 공공건축가, 공원위원회 위원, 해양수산부 중앙항만정책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uahan@siteplanni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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