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3. 09:22ㆍ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건축담론 Architecture Discussion
편집국장 註
언제부터인가 건축사의 업역에서 도시 계획, 도시 설계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산업사회가 시작될 때만 하더라도 새로운 도시의 비전을 이야기하고 도전했던 이들은 다름 아닌 건축사들이다. 산업구조가 팽창하고 제조업 중심의 사회가 기능을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사회에는 새로운 도시 구조가 필요했다. 이른바 조닝 개념이 나오고, 기능을 중심으로 분화되었다. 제조업의 분업화처럼 일하는 공간과 생활하는 공간이 분리된 것이다. ‘아홉 시에서 다섯 시까지’라는 1일 8시간 근로시간의 획일적 적용은 매우 생산적이고 효율적이었다. 규모 또한 대규모로 이뤄지면서 자연스레 도시 설계와 건축 또한 분리되었다.
문제는 산업구조가 본격화되면서 도시 문제도 함께 부각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앨빈 토플러가 지적한 제3의 물결을 넘어서 현재 4차 산업혁명 시대로 진입한 상황에서, 더는 시간의 구분만으로 도시구조의 생산성을 올리기 힘들어졌다. 인권과 생활권을 요구하는 등 사회적 변화가 시작되었고, 개별적 시간 운용과 상호 간의 네트워크를 필요로 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조닝의 거친 구성을 넘어서서 디테일이 필요해진 사회가 된 것이다.
이런 변화의 첨단에는 판교 디지털 밸리가 있다. 판교 디지털 밸리는 지역 내 총생산(GRDP)이 연 80조원에 이르는 직주근접 목표의 도시다.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도시지만 그럼에도 도시의 구조는 제조업의 기능이 분화된 탓에 주말이면 공동화 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실질적인 보행 네트워크는 전혀 구성되어 있지 않고, 자전거 이용률 또한 저조하다. 결코 21세기의 도시구조가 아니다. 건축적 섬세함이 도시 계획에 반영되지 않았다.
다행히 최근에는 건축적 섬세함이 반영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시 계획과 구성이 정책에 반영되고 있다고 한다. 과천을 비롯한 여러 신도시들을 그 대표적인 모델로 주목할 만하다. 실제 이런 계획에 참여해본 경험이 있는 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쾌적한 도시란 무엇인지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02 Busan North Port Phase 2 Master Plan Drawing
최근 ‘도시건축 입체화 계획’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설계공모가 여럿 선보이고 있다. 사실 도시나 건축 모두 사람이 살아가는 물리적 환경을 구축하는 업역인데, ‘굳이 ‘입체화’라는 표현을 덧붙이는 이유는 뭘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도시가 생성되어 온 과정과 무엇보다 그 결과물에 대한 성찰의 반향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산항 북항 통합개발은 전체 3단계로 계획되어, 현재 시행 중인 1단계 사업이 2022년 완성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다. 2단계 사업지는 부산역을 기점으로 길게 펼쳐진 조차장과 부산진역 CY, 자성대 부두 및 영도 봉래 물양장과 창고군 영역으로, 2019년 ‘부산항 북항 2단계 마스터플랜 아이디어 국제공모’를 통해 발주되었다. 국제공모 당선자(상지 컨소시엄)의 자격으로 당선 이후 약 6개월에 거쳐 다섯 차례의 추진협의회 보고 및 토론, 그리고 추진협의회에서 도시 및 건축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소위원회와 열 차례의 워크숍을 통해 마스터플랜 당선작을 발전시키며 최종 결과물을 만들었다.
만족감. 그것은 자만이 아닌, 과정의 충실함과 이에 아낌없이 쏟아 부은 열정에서 비롯된 뿌듯함일 것이다. 부산항북항통합개발추진단, 추진협의회, 건일엔지니어링, 그리고 상지컨소시엄에 함께한 한국도시설계학회, 앙코르 건축사사무소, 그리고 일본의 니켄 세케이까지 수십 명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부산의 100년 후 미래를 그려가며 보낸 6개월의 시간은 그러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과 열정을 다하여 토론하고 고심했던 매 순간들은 축제와도 같았다.
100년 후 미래를 그렸던 도시를, 아무리 열정을 다했다 한들 6개월의 시간에 ‘완성된 그림’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오만일 것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디딤판을 만든 것이라 생각하기에 그 시간과 결과물에 만족할 수 있었다.
“땅의 의미란 그런 것이다. 모르고 볼 때는 낯선 남의 땅이지만, 그 역사적 의미를 알고 보면 내 나라의 땅, 우리의 땅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
북항 2단계 마스터플랜을 위해 보낸 6개월의 시간이, 그리고 그보다 더 앞서 국제공모를 준비하며 안을 만들었던 1개월의 시간이 그야말로 턱없이 부족하다 느껴졌던 이유는 바로 위에서 인용한 유홍준 님의 글을 빌어 설명할 수 있다. 저 지점이 언제나 출발 지점이었다. 컨테이너와 곡물 저장창고, 크레인 등으로 가득한 항만에 도시를 만들겠다 한다. ‘이 도시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그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자니 그 지역의 역사를 알아야 했고, 어떤 시간과 과정들을 겪으며 현재의 모습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대부분의 프로젝트에서 건축사는 낯선 자의 눈으로 주어진 대지와 마주한다.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현재의 일면만을 보고 계획하고 디자인 할 수 있을까? 건축을 하며 지금까지 접했던 모든 프로젝트는 궁금한 것들, 모르는 것들, 알아야 할 것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것을 채우는 작업이 모든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부산항 북항 2단계에서 마주한 땅은, 도시를 그리는 일의 범위가 확장되었을 뿐,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궤를 같이했다.
15세기 초반에 시작된 부산항의 관문 역할은 1876년 개항 이후 태평양과 유라시아의 연결점으로 확장되었다. 결과적으로 부산항은 매우 특별한 역사성, 장소성, 기능성을 보유한 곳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쳐 50∼60년대 국가 재건기에는 근대화와 산업화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2000년대에 들어 부산항에 대해 역할의 변화가 요구된 까닭은 최첨단 부산 신항이 건설되면서 물류가 대형화되고 물동량 이전에 따른 기능이 쇠퇴하는 등 경쟁력이 약화됐기 때문이다.
‘부산항’은 단순 지명을 넘어 지난 143년간 부산의 역사, 근대화와 산업화의 관문으로 기억되어 온 장소이다. 따라서 부산의 역사와 항구로서의 기억을 연속시켜 그 이름의 브랜드 가치를 계승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분절된 도시공간을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하여 도시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모두를 위해 개방된 도시 공간으로 조성되어야 하며, 새로운 성장거점으로 육성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해양수도로서의 부산, 그 비전을 구체화하기 위해 주목한 것은 ‘부산다움’을 살리는 것, 즉 지역의 정체성을 강화, 존중, 계승하겠다는 의지였다.
“건축은 땅에 기록을 남기는 일인데, 가끔 보면 어떤 이들은 땅에 낙서를 하고 있어.”
작년 초, 상지건축 창립자이신 김동회 명예회장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지난 6개월간 진행했던 북항 2단계 마스터플랜 작업의 가치는 원도심과 유기적으로 연계하고, 땅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들을 그 무엇 하나 가볍게 대하지 않고 보전함으로써 지역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한 데 있다고 본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도시건축 입체화 계획’은 앞으로 새롭게 만들어질 도시를 한층 충실히 계획하기 위한 좋은 방법론이라 생각한다. 다만 이번 북항 2단계 마스터플랜 작업과 최근 발주되는 신도시 마스터플랜 프로젝트의 운영방식을 간단히 비교해보면 아직 보완해야 할 몇 가지 제도적 한계가 느껴진다.
가장 시급하게 느껴지는 것은 마스터플랜 공모 이후 당선자의 역할과 권한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지속성이다. 공모를 위한 작업으로 주어진 1∼2개월 만에 도시의 마스터플랜을 만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도시의 골격을 잡을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이며, 당선자(건축사 및 도시계획가)는 엔지니어 및 행정처, 그리고 지역의 기타 전문가들로 구성된 협의체와 함께 의견을 나누고 수렴하며 당선작을 발전시키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흔히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한다. 그렇다고 특정 계획가 및 소수집단의 독선과 편향된 시각으로 ‘도시’가 만들어져도 안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북항 2단계 마스터플랜 작업을 위한 지난 6개월은 북항통합개발추진단과 추진협의회의 헌신적이고 노련한 운영과 진행이 돋보인 사례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실현가능성을 고려하였으나 무엇보다도 ‘공공성’을 최우선으로 둔 마스터플랜 안이 마련되었고, 이후 사업자공모를 통해 사업자를 선정하고 여러 실무적인 검토를 진행함에 있어, 이번에 마련된 마스터플랜은 최종 완성될 도시의 미래상을 위한 충실한 토대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상지컨소시엄은 당선자의 권한으로 주어진 일단의 과업은 완수했으나, 한편으로 이후 작업에 대한 더 이상의 참여 권한은 제도적으로 보장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남아있다. 설계공모 당선작이 기본 및 실시설계를 거치면서 최초 이미지와는 크게 다른 건물로 준공되는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는 현실과 비슷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최초 참여한 건축사(도시계획가)가 끝까지 참여하고 완주할 수 있게끔 해주는 제도적 보완이 아쉬울 따름이다.
목표가 정해지고 이를 위해 새로운 시도가 뒤따른다면, 무엇보다 이러한 실험적 방법론의 성공을 위한 충분한 사업일정 및 예산확보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애석하게도 현실에서는 유난히 간과되는 부분이다. 흔히 말하는 기획단계의 계획과정이 얼마나 적은 예산으로 부실하게 이루어지는지 건축설계업에 종사하는 분들이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민간개발의 경우, 대가조차 없는 검토 요청이 건축사사무소마다 적잖이 쌓여 있으며, 공공건축의 경우에도 예산확보를 위한 기획단계에서의 ‘검토’는 대가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의 예산이 운영되는 현실이다. 역량을 갖춘 전문가를 제대로 투입하고 운영하기 위해 투입되는 최소한의 비용을 고려해서 예산을 마련해야 할 것이며, 더 나아가 최초 기획자가 각 단계를 이어주며 사업목표의 성공적 실현을 위한 브리지 역할을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글. 윤택용 Yoon, Taekyong (주)상지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 디자인전략부문 부문장
윤택용 (주)상지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디자인전략부문 부문장
행림종합건축사사무소 디자인본부 본부장, 나우동인건축사 사무소 설계사업본부 본부장을 역임하고 현재 상지엔지니어 링건축사사무소 부사장을 맡고 있다. 주요 수행프로젝트로 는 시흥 미래형 첨단자동차 클러스터(V-City) 조성사업, 울 산시립도서관, 부산통합청사, 행복도시컨벤션센터, 세종시 국무총리공관 등이 있다.
arch.yoon@gmail.com
'아티클 | Article > 칼럼 | Column'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건축비평] 사람과 기계의 즐거운 분포 2020.6 (0) | 2023.01.16 |
---|---|
01 도시설계와 건축사 2020.5 (0) | 2023.01.13 |
[건축비평] 젊은 아이디어로 ‘신수동 골목’에 생기를…‘풍경을 바꾼’ sista house 2020.5 (0) | 2023.01.13 |
건축 시선 일상의 삶과 지역경제를 위한 생활(동네)건축 활성화 2020.5 (0) | 2023.01.13 |
01 건축물 설계의도 구현의 필요성과 방향 2020.4 (0) | 2023.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