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7. 09:19ㆍ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Architecture Criticism
Architecture Identity, Place Identity
‘건축’은 창작물이다. 그런 이유로 창작가의 미학적 관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반면 ‘건물’은 소유자의 것이다. 자신의 요구가 반영되지 못하면 진행이 어렵다. 건물엔 소유자의 생각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건축은 건물과 충돌한다. 협상이 필요하다.
건축의 창작가인 ‘건축사’와 건물의 ‘소유자’는 수많은 논의 끝에 합의를 이끌어 성과를 만들어낸다. 결과가 나쁜(?) 경우를 보면 대체로 건축사와 소유자 간에 갈등이 첨예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결과가 매력적일 때는 건축사와 소유자 간에 합의가 잘 이뤄졌을 경우인데, 대체로 전문가인 건축사 의견을 따를 때 좋은 성과로 이어진다.
물론 귀를 닫은 건축사에게도 책임이 없진 않다. 합리적인 요구는 사용자의 편의와 기능에서부터 시작되며, 건축사라면 이를 적절히 반영할 책임이 있다. 어려운가? 그렇지 않다.
건축은 건축사의 생각과 소통을 드러내는데, 명확하고 간결하게 드러내는 것이 그의 능력이다. 명확하고 간결하다고 쉽게 디자인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압축된 시어처럼 간결하게 정리하는 능력과 노력이야말로 치밀한 생각의 결과다.
매력적인 건축은 장소를 빛내고, 장소의 정체성을 결정하기도 한다. 가끔 그런 좌표가 되는 랜드마크를 무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웃과의 조화를 고민해야 하기에 한번쯤 주변을 살피는 것도 필요하다.
오래된 동네지만 새것으로 탈탈 털어 만들어진 장소에 건축물 하나가 만들어졌다. 과거 어느 시절에 만들어진 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동네에 말이다. 오래된 동네인지를 어떻게 아느냐고? 바로 옆에 고목이 1968년에 보호수로 지정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그 건축물은 그렇게 크지도 않고 눈에 띄는 현란함도 없지만 압축된 시어처럼 단정하게 수많은 생각들을 정리한 듯하다. 재야의 숨은 고수가 설계한 건축물이다. 사실 재야라고 보기도 어려운데, 이를 설계한 건축사는 이미 수많은 건축상을 수상한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 정말 생각이 많다. 청소를 게을리 해서 건물이 지저분해지면 어떻게 하지? 골목길의 오래된 흔적을 어떻게 평면으로 표현하지? 쌓아 올릴 수밖에 없는 회사의 전시 공간을 어떻게 편리하게 만들까? 회사 이미지를 어떻게 건축으로 표현하지? 직원들이 하루 반나절 이상 근무하는 공간을 어떻게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만들지? 잠시 동안 커피 한잔 마실 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 만들까? 패션 회사이니 트렌디한 구성을 어떻게 보여주지? 등등. 건축물에 미주알고주알 생각에 생각이 담겨 있다. 게다가 그는 공사 단가를 고민하고, 청소를 고민하고, 관리를 고민했다. 동시에 건축물이 간결하게 보이길 원했다. 당연히 머리가 아플 텐데, 디테일을 고민하고 어느 하나 편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공사하는 이들이 무척 힘들었을 것 같은 건축물이다.
심지어 그는 이 건축물을 위해 벽돌을 개발해서 이중 가벽을 세웠다. 자세히 보면 유행하는 콘크리트 블록이 아니라 점토 벽돌로 만든 ㅁ자형 디자인 블록이다. 아! 조각 같은 건축이다.
도시 구조를 디자인으로 해석한 부분 역시 탁월하다. 우리나라 도시 건축의 상당수는 법규와 기능을 고려해 디자인한 것들이 많다. 모더니즘의 경제적 미학을 너무나 잘 이해한 덕분에 대부분의 건물은 구조와 기능에 필요한 것들과 법에서 정하고 있는 0.1% 규정까지 에누리 없이 맞추고 있다. 조금 더 나아간 경우는 준공 후 투명한(?) 유리와 샤시로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천재들이다.
이곳의 재미있는 또 다른 점은 각각의 대지 조건에 맞춰 정교한 퍼즐처럼 지은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직선의 조화로움이다. 민법에 따라 50센티미터 이상 떨어진 최소한의 간격으로 지은 탓에 하늘에서 보면 대지 형태가 그대로 드러난다. 도저히 계획 도시로 볼 수 없는 높낮이의 다이내믹함도 마찬가지다. 땅이 크면 높아지고, 땅이 작아지면 낮아진다. 그렇게 동네가 만들어지고 도시가 만들어진다. 어떤 이들은 혼란 그 자체라고 이야기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다양성이 아닐까 싶다.
어반 패브릭
어반 패브릭(Urban Fabric)은 직물처럼 다양한 유형으로 디자인된 도시 구조를 말한다. 강남 같은 계획도시는 정형적(定型的) 어반 패브릭을 구성하지만 마포나 종로 같은 오래된 지역들은 개인 거래 등을 통해 형성돼 다소 불규칙한 특성을 드러낸다. 이런 불규칙성은 흥미롭게도 의외의 공간들을 만들어내면서 각 대지 간의 관계에 긴장감을 형성한다. 지형의 높낮이와 대지 간의 공간은 입체적인 동선을 만들어내는데, 공간의 리듬감을 체험하기에 제격이다. 어쩌면 계획도시 아닌 지역에서 만날 수 있는 공간의 입체적 경험일 수도 있겠다.
장소의 공간감을 건축에 끌어들이다
건축사마다 대지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지만 카멜레-존의 경우 장소의 공간감을 철저히 학습하고 반영했다. 소위 재개발로 과거의 흔적을 새롭게 재탄생시킨 셈이다. 좁은 골목길을 그대로 구성한 1층 출입 동선, 지하 2층에서 내부로 연결된 스킵 플로어(Skip Floor) 형식의 전시공간은 장소의 공간적 역동성을 그대로 복원한 예다. 이런 구성은 각 층별 발코니의 구성에서도 볼 수 있다. 각 층별 발코니는 일조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동시에 개발 시기 경사지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우리 주거 동네의 모습이기도 하다.
평면의 역동성을 입면에 드리우다
통상 작은 업무공간들을 설계할 때 기능에 맞추면 공간적 역동성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하지만 이 경우엔 지형의 단점을 오히려 역동적 평면으로 해석하고, 입체적 구성을 단면으로 드러냈다. 평면과 단면의 입체적 구성은 경험의 과정이다. 경험은 인간의 오감으로 기억되는 것이지만 시각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카멜레-존을 설계한 최홍종 건축사는 입체적 평면과 단면의 경험을 시각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입면 구성을 택했다. 일종의 작은 요소인 ㅁ자형 점토 벽돌은 하나의 단위로 전체를 구성하면서 규칙적 구성을 보여주고, 동시에 가벽으로 작용해 의외성과 이중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단순해 보이지만, 결코 단순한 입면이 아니다.
장소의 정체성을 건축 전체에 표현하다
건물이 들어선 지형과 자연발생적으로 구성된 역동적 공간 특성이 입체적으로 스며들었다. ‘평면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경험’과 ‘이동하면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시각적 변위’를 고려한, 즉 건물이 들어선 장소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그대로 적용된 셈이다. 장소의 정체성을 건축의 모든 요소에 적용하고자 한, 치밀하고 치열하게 관찰한 건축사의 노력의 결과다. 뜨거운 정오의 햇살이 가득한 카멜레-존 체험은 장소의 정체성을 어떻게 건축으로 표현했는지 알 수 있는 교과서 같은 경험이었다.
건축의 정체성은 건물의 정체성, 브랜드로 드러나다
이 건물은 상업 건물이면서 전시장과 사무실을 포함한다. 무엇보다 브랜드를 운영하는 소매 기업의 사옥이다. 중저가 패브릭 소품을 판매하는 온라인 기반의 쇼핑 회사로, 오프라인에선 매출이 높진 않지만 온라인을 통해 몇 년 만에 급성장했다. 브랜드를 소비자에게 알리길 원하는 기업의 요구에 따라, 브랜드 이미지를 어떻게 소비자들에게 전달하고 인식되도록 할 것이냐가 건축 설계의 관건이었다. 통상 브랜드 기업들은 오랜 시간 형성된 브랜드 이미지나 브랜드 정체성을 확보해 이를 오프라인 전면에 적용한다. 우리가 아는 벤츠나 애플, 국내 기업의 경우 파리바게트나 오뚜기가 그러하다. 하나의 브랜드 이미지, 브랜드 정체성을 구축할 땐 오랜 기간 소비자들과 호흡하면서 만들어진 긍정적 이미지들을 적극 활용한다. 물론 최근엔 상품 런칭에서부터 전략적인 브랜드 정체성을 정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상당 기간 소비자와 소통하면서 브랜드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에 반해 카멜레-존은 브랜드 정체성이나 이미지가 형성되기도 전에 온라인에서의 판매량이 급증해 빠른 속도로 성장한 기업이다. 당연히 이들이 드러낼 브랜드 요소가 많지 않다. 이런 과정에서 시공된 카멜레-존은 브랜드 정체성을 구축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온라인 쇼핑이 주 수입원이지만, 사옥과 전시장은 수시로 온라인에 노출될 수 있어 시각적 아이덴티티를 자연스레 소비자들이 인식할 수 있다. 제대로 건축된 카멜레-존이 브랜드 정체성을 가시화한 셈이다. 때에 따라서는 이렇듯 건축이 브랜드 정체성을 만들 수도 있다.
규모가 크거나 화려한 건축 언어로 말하진 않지만 카멜레-존은 간결하게 정리된 시어처럼 강렬한 발언을 하는 매력적인 건축물이다. 한마디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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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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