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비평] 靜中動의 몸짓 2020.8

2023. 1. 18. 09:22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Architecture Criticism
Gestures by the Movement in Serenity

 

평택시 외곽, 끝없이 이어질 듯한 아파트 단지가 끝나는 곳. 그 경계에 어디론가 흘러가는 듯한 모습의 상가주택이 놓여 있다. 거대한 아파트만 보면서 달려오다 느낀 묵직한 위압감을 누그러뜨려 주려는 듯, 부드러운 수평의 띠를 두른 건물이다.

J상가주택이 위치한 평택의 지형은 지명의 뜻 그대로 땅 전체가 나지막한 구릉이나 평탄한 지대로 형성된 평야이다. 이 중 J상가주택은 그나마 옛 평택의 잔상이 남아 있는 곳에 아파트와 평야의 경계를 가르며 자리 잡고 있다. 아파트라는 거대한 점령군과 마주하며 외롭게 대치하고 있는 건축물……. 작지만 당당하다. 골리앗 앞에 서 있는 다윗처럼.

 


평택, 기억의 발견

설계자인 오근석, 문호 건축사 중 오근석 건축사는 이곳 평택이 고향이다.
건축주도 오근석 건축사와 고향 친구이다. 건축사와 건축주 모두 논밭이 펼쳐진 고향, 평택이라는 장소에 대한 공통적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무의식 속 기억이 작품 속에 비춰진다. 평택시 대추리의 석양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진 ‘노을’이라는 동요를 들어보면 “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연기”라는 구절이 있다. 땅을 마주한 건축사도 푸른 들판의 저녁연기, 끝없이 뻗어있는 평야를 달리던 옛 추억을 그려냈다. 작품 속 수평선은 그의 고향인 평택에서의 기억, 그 넓은 평야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작품을 창조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발견하는 것이다. 무엇을 발견하는 것인가?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무의식 속 기억을 발견하는 것이다. 건축은 이성적인 의식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감성적인 무의식이 건축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개인적인 감성이 많은 사람을 감동하게 한다. 감성이 녹아든 건축, 이는 예술이 된다.

 


정중동의 자태

 

이 작품의 특징은 형태에 있다. 형태는 설계자의 주장이다. 효과적인 주장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보다 자신의 입장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근거가 완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면 그건 단지 사실의 나열에 그치는 것일 수 있다. 삶을 담아야 하는 기능에만 충실하다 보면, 주장을 강력하게 펼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나 형태는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주장을 펼치는데 더욱더 한계가 없어지고 있다.
이 건축물에서 건축사는 본인의 주장의 옳음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은 듯하다. 획일적인 아파트에 지친 감성이 새롭게 일깨워지기를 바랄 뿐이다. 외관에서 풍기는 감성은 인접한 정적이며 위압적인 아파트들과는 대조적으로 독자들의 감각을 자극한다.
건축물에 작은 움직임이 포착된다. 무기물의 고체가 아니라 꿈틀거리는 유기물의 액체인 듯하다. 직각의 모서리는 둥글게 말아져 있으며 수평적인 선이 사선으로 흐르면서 중첩된다. 흡사 정중동의 자태로 피어오르는 새벽안개 같다.

“얇은 사(紗) 하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의 시 ‘승무’의 한 구절이다. 나는 이 건물과 마주하며 학창시절 나를 흔들었던 이 시가 떠올랐다. 승무는 정중동의 정수가 가장 잘 표현된 민속무용으로 언어적인 표현 못지않게 몸짓 언어와 같은 비언어적인 기호도 의사소통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건물을 바라보며 두 건축사가 주민들과 몸짓으로 소통을 시도하고자 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작은 움직임으로 J상가주택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J상가주택


흐름의 건축

좀 더 외관을 둘러본다. 곡선들이 기존의 풍경 속으로 자유자재로 가볍게 흘러 다닌다.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와 같다. 파고가 점차 높아지며 부서지는 순간, 파도는 눈부신 흰색이다. 무거운 아파트 군상들과 대조적인 가벼운 흐름이다.

베를린 카라얀 거리에 있는 필하모닉을 설계한 한스 샤로운(Hans Scharoun)의 쉬민케 하우스(Schminke House 1930∼1933)가 연상된다. 규칙적이며 자유로운 곡선의 사용은 ‘건축에도 생명’이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자연의 형상과 조응하는 디자인이다.
불규칙한 시골길, 해안선, 구릉지, 생명체에서 보이는 부드러운 곡선을 차용한 유기적인 디자인에는 자연미가 담겨 있다. 선의 표현에 중점을 둔 건축사는 명확한 선의 통제 아래 빛과 어둠을 표현하고 있다. 선에 따라 빛과 어둠이 극명하게 갈리며 빛과 어둠의 덩어리가 같이 흘러간다. 계단은 공간 내에서 역동성을 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내부의 계단도 외관의 흐름을 연장하며 그 흐름을 강조하기 위해 나선형으로 계단을 디자인했다. 계단의 시각적 종착점은 천창이다. 하늘을 향한 갈망이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담기는 느낌이다. 오르내리며 다음 공간을 기대하게 하는 전이 공간으로 이용자에게 특별한 경험을 부여하고 있다. 시각적일 뿐만 아니라 몸의 움직임에 의한 역동성까지 담았다.

 

Schminke House


부유하는 흰색

건물의 주조색은 흰색이다. 회색 일변도의 아파트와 대조되며 그리고 인근 녹색의 논밭과도 대비되는 흰색이다. 왜 건축사는 흰색을 건물의 주조 색으로 사용했을까?

흰색의 건축하면 미국 건축사 리처드 마이어(Richard Meier)가 떠오른다. 마이어는 흰색이 자연을 수용하는 한편, 자연과의 대비를 통해 조화를 추구하는 자유로운 색이라고 했다. 그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더글라스 하우스(douglas house)를 보면 숲속에 둘러싸인 하얀 건물이 숲의 녹색을 더욱 돋보이게 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흰색은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배타적인 색인 듯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주변환경을 포용하는 색으로 느껴진다.
이 건물의 흰색도 대지 주변의 초록색 논밭을 돋보이게 하면서 아파트와 주변의 무심한 건축물을 포용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건물의 흰색이 가벼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순응의 색으로 다가옴을 느꼈다. 부유하는 흰색……. 안개가 흐르는 듯 바람결이 느껴진다.

 

douglas house

유보된 완성

모든 건축물은 완성을 뒤로 유보한 미완성이다. 우리는 흔히 사용승인을 받으면 건물이 완성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사용승인은 이제 사용할 수 있다는 면허이지 진정한 완성은 아니다. J상가주택은 이제 갓 태어났다. 아직은 새것이라 생경함까지 느껴진다.
사람들이 때를 묻히고, 건물 스스로 나이를 먹어가고 사람들의 기억이 덧씌워지면서 건물은 완성되어 갈 것이다. 시간이 덧입혀질수록 은근한 매력이 발산될 것이다. 이 건물의 강한 아우라와 이미지는 이곳에 들른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될 것이고 그 기억은 하나의 특별한 장소를 만들 것이다.

 

 

 

글. 조민석 Cho, Minsuk 단아건축사사무소 대표 · 건축사

 

 

조민석 단아건축사사무소 대표 · 건축사

홍익대학교 건축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2년 단아건축 사사무소를 개소하여 대표를 맡고 있다. 서울시건축상 및 한국 건축문화대상 등을 수상했다. 서울시공공건축가로 활동했으 며, 현재 서울시 서초구 건축위원회 위원, 홍익대학교 겸임교수 이다. 저서로 ‘실내건축재료’와 ‘건축재료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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