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의 건축’을 말하다“조금 더 좋은 것, 조금 더 잘 하고 싶다”_이성관 건축사 2020.11

2023. 1. 26. 09:12아티클 | Article/인터뷰 | Interview

Speak ‘the architecture of the possibility’
“Something better, want to do better”

 

 

2017 경기도건축문화상 사용승인 부문 대상. ‘여주박물관 여마관’을 검색하면 나오면 수상기록이다. 검은 유리로 구성된 반듯한 건물과 남서쪽 모서리가 잘려나간 삼각면이 단정하면서 인상적이다. 검은 유리면은 하늘을, 삼각면은 남한강을 비추는 건물이 자연과 스스럼없이 어우러진다. 설계의 백미는 건물 안에 있다. 돌로 쌓은 층 위에 건물을 두고 건물 안 전면에 통유리를 설치해 남한강 상류와 파란 하늘이 바로 앞에 있는 듯 경이롭게 다가온다. 이곳을 설계한 이성관 건축사가 이곳을 설계한 나이는 68세였다. 현재는 72세, 현역이다. 지난 10월 8일 여주박물관 1층에서 이성관 건축사를 만났다.  

Q 여주박물관 여마관을 실제로 보니 사진으로 보던 것과 다르네요. 안으로 들어오니 또 다르고요.

외부에서 큐브(검은 건물)만 추상적으로 인지되도록 의도했습니다. 빌딩을 의미하는 기둥을 소거하고 건물 아래에 돌로 쌓은 층을 설치했습니다. 1층에서 보이는 벽면엔 통유리를 설치하고 앵글을 배제해 수면이 건너오는 듯한 효과를 주었습니다. 저기 보이는 강이 남한강입니다. 마치 이곳이 남한강과 돌을 따라 이어진 듯 보이죠? 이곳이 박물관이긴 하지만 1층엔 문화나 역사같이 무겁고 박물관적인 부분들을 덜어냈습니다. 근처 아울렛에 갔다가 부담 없이 이곳에 들러 1층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주 자연을 감상했으면 했어요. 전시실은 2층에 있습니다.

Q 이곳을 설계했던 당시엔 60대셨죠? 다른 나라를 보면 106세 건축사도 있고요, 안도 다다오도 80세가 넘었어요. 어느 90대 건축사는 설계공모에서 30대랑 붙었다고 합니다. 요새 컨디션은 어떠세요?

 

몸은 어떠할지 몰라도 의지나 이런 것은 예나 다름없습니다. 작업할 때마다 ‘이번엔 작품이 어떻게 나올까’하는 호기심이 있습니다. 매 작품에 최선을 다 합니다. 워낙 이런 작업을 반복하며 살아와 관성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서울대, 동대학원 졸업 후 10년간 직장생활…
36살에 오른 유학길

1948년 부산 출신인 이성관 건축사는 서울대 건축학과와 동 대학 건축대학원을 전공한 뒤 만 10년간 정림건축 등에서 굵직한 설계 프로젝트들에 참여하여 실무를 경험했다. 이후 가족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라 컬럼비아 건축대학원을 졸업하고 NY HOK에서 수석 디자이너로 다년간 근무하다 6년 후 귀국했다. 

Q 어린 시절, 설계를 선택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대학생 때 다른 과목에 비해 설계를 좋아했어요. 재미있어서 열심히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건축은 어릴 때부터 묘한 감정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기억이 안 나는데 당시 친구들이 제가 어떤 건축물을 보면서 ‘나라면 저렇게 안 했다’라고 했대요. 어릴 때부터 뭔가 느낌이 있었던 듯싶어요. 어릴 땐 그림 그리고 사색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제가 살던 부산, 경남 지역에서 그림으로 1, 2등을 해 조회시간에 단상에 자주 올라갔던 기억이 나네요.

Q 대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성적 맞춰서 건축과를 선택했다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저도 대학 첫 해에 ‘이거 하고 싶어서 왔다’라는 것이 분명치 않았습니다. 특히나 우리 땐 그런 경우가 대부분일 거예요. 요새는 오히려 음악이니 게임이니 자녀가 원하는 것을 찾아주려고 하는 부모도 있지 않나요?

 


Q 현재 건축과 학생들이 취업할 때 설계를 선택하는 비율이 20∼30퍼센트도 안됩니다. 경제적인 이유로요. 그때도 상황이 비슷했나요?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못했습니다. 우리가 졸업한 해가 1972년도였습니다. 그 당시도 35명 중 7명이 훗날 설계를 지원했고 나머지는 건설회사로 대부분 갔었지요. 졸업 직후 저 포함 2명이 설계사무실을 다녔고 다른 한 친구는 설계사무실을 다니다 6개월 만에 그만두었지요. 월급 한번 못 받았고……. 그래도 그 친구는 설계를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열심히 했습니다. 그 당시도 월급이 건설회사의 삼분의 일 수준이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월급이라 부르지 않고 교통비라 불렀지요. 그 당시 건축설계를 하려는 이들은 건축에 대한 신앙심 비슷한 미련함을 가졌었지요.
지금은 눈에 확실히 보이거나, 혹은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옮겨가는 경향이 강하지요. 지금의 세태다운 깔끔함이 있지요. 그 넘어 건너편은 볼 수 없지만…….

Q 삼십대 중반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셨습니다. 그 전까지 직장생활도 오래하셨는데, 가정도 꾸린 입장에서 그런 결정을 하기 쉽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해외 잡지를 보게 되면 번번이 ‘왜 우리는 저런 멋진 건물을 갖지 못하나’하는 자괴감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저런 건물이 지어지는 현장에서 건축을 배우면 가능할 거란 생각을 갖게 되었지요.
애초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곧장 유학을 가려 했지만 학부 성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학점을 만회하려고 대학원까지 갔으나 이번에는 학부성적만 반영한다고 하여 당분간 유학은 포기하고 국내서 일만 열심히 하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학교 후배들이 유학 준비하면서 한 친구가 선배님은 왜 유학을 안 가세요, 라며 뜬금없이 묻기에 얼버무리며 못 간다 하니 선배님 경력이면 포트폴리오만으로도 충분히 갈 수 있다, 하여 바로 미 문화원으로 가 유학 준비를 하고 회사를 다니면서 7개월 만에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지요. 그때가 제 나이 36살이었고, 집사람, 아이 둘, 이렇게 총 4인이 장도에 올랐어요. 1년 학비와 생활비만 지니고, 나머지는 운명에 맡기기로 하고.

 

이성관 건축사와 홍성용 편집국장이 여주박물관 여마관 1층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돌로 쌓은 층 위에 건물을 둔 설계로 남한강 상류와 파란 하늘이 눈앞에 있는 듯 펼쳐져 있다. 이성관 건축사가 설계했다.


Q 미국에서 본 건축은 한국과 어떤 점이 달랐나요?

80년대 초, 국내에서는 모더니즘에 뿌리를 두고 객관적인 설계방법론이 유행(?) 하던 때로 볼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초중반이라 볼 수 있던 때였지요. 그 당시에는 좋은 건축이란 좋은 방법론을 통해 얻어진다는 가설(마치 중세 시대의 연금술처럼)에서, 건축설계 과정에서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중요 덕목으로 생각하면서 접근하곤 했지요. 감성이나 주관보다는 이성이나 객관적 접근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던 시기였어요.
가령 고려해야 할 10개의 항목이 있다면, 각각 독립적인 레이어 (layer)를 포개어 투과시키면 그 총합이 원하는 바의 다이어그램이라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설명을 할 때도. 이렇게 하겠다가 아니고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투로 설명을 하게 되곤 했지요. 저는 유행하는 사조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건축에 있어서의 본질적 물음이 제겐 있었습니다. 그 궁금증은 스튜디오에서 두 달 지나면서 풀렸었지요.
그 당시는 한국과 미국 간 여러 면에서 격차가 많았던 시절이어서 뉴욕에서의 일상적 생활만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얻어지는 게 많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박물관, 미술관 여러 공연들과 가로들, 그리고 뉴욕이라는 메트로폴리탄! 마음만 열면 모든 게 학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은 그 이후 올림픽 전후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보고요. 컬럼비아에서의 경험도 좋았습니다. 강사들도 1년에 한 학기 한 과목만 하게 되니 강의 내용이 참 알차고 충실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학비가 비싸니 그런 게 가능한 셈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와 비교하게 되었지요. 교육의 밀도나 질을 생각하니 너무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등록금 얼마의 인상으로 우리에게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각하면 꼭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생각이 들었습니다.

43살, 첫 사무소를 오픈하다
 
이성관 건축사는 1982년부터 1988년까지 6년여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42살에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정림건축에서 1년을 일한 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신세를 졌다’고 한다) 현재 그가 몸담고 있는 건축사사무소를 개업했다. 이후 그는 용산 전쟁기념관을 시작으로 탄허대종사기념박물관, 숭실대 조만식기념관+웨스트민스터홀 등 신선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건축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Q 건축사들의 목표는 보통 ‘사무소 개소’입니다. 하지만 개소 후에 사무소를 어떻게 운영한다는 매니지먼트에 대한 생각은 잘 안 하는데요. 사무소를 개소한 후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저는 일상에서는 비효율적인 인간형이니 저의 경험이나 생각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나, 반면교사 자격으로 말하고 싶네요.
개소을 한다 안 한다, 하는 것은 저의 입장에서는 취하는 하나의 형식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했어요. 목표가 될 수 없었지요. 건축사 자격증은 1979년도쯤인가 취득한 것으로 기억됩니다.(#1579) 그리곤 1989년도 개소하였지요. 미래를 계획하고 차근차근 하나씩 실천으로 옮겨가는 그런 멋있는 부류는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저를 채근하는 것은 스스로 모자란 점이 보이고 그 점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저를 여태껏 이끌어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가 설계만 잘하게 된다면 개소를 하든, 조직 속에 들어가든 개소 효과(자율권, 저작권, 재정자립권 등)는 여전히 가질 수 있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지요.
온실에서 길거리로 스스로 선택해 나온 입장이니, 어려움은 당연히 있었겠으나 스트레스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운영상의 수지 문제는 단순히 생각하면, 받은 설계비보다 일을 더해주게 되면 마이너스가 된다는 단순한 산법으로 운영해온 셈입니다. 돈은 메울 수 있어도 한번 지어지면 영원할 거라는 착각으로, 두 가치가 충돌할 때는 더 큰 데서 벌어 작은 것 메꾼다는 식으로 해 온 셈이지요. 그리하여 가랑비에 비 젖으면서 지금에 이릅니다.

 


Q 건축도 트렌드와 무관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이나 생각도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나요?

건축의 트렌드를 따라간다는 말에는 왠지 반발심이 먼저 생기네요. 차라리 트렌드 속에 놓여있는 사람을 따라가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나는 변하고 있는 건축보다는 변하고 있는 세상과 사람들에 주목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습니다.
건축 초년에 접한 약간의 모더니즘 학습에서 시작하여 한때의 객관적 방법론의 경향, 포스트모더니즘, 신합리주의, 해체주의 등의 세계적 조류의 격랑을 거치면서 지금에 와 있지요.
제가 그 와중, 견지해온 것은 합리성에 바탕을 둔 윤리적 입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건물 내부의 사정이 건물 외부에 어떤 식으로건 입면에 반영되어야 한다 혹은 드러나야 한다는 일종의 윤리적 규정이 한동안 지배했었다고 봅니다.
균질한 외벽이라도 그 내부에 기둥이 지나는 부위는 그 힘으로 인해 외부엔 달리 표현되어져야 한다고 믿어 왔습니다.
동서양 막론하고 과거 전통 건물들은 하나같이 외관에 중력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추상화된 외피 대신 클래식한 문법으로 표현된 외피는 무게감이 더해진다고 봅니다.
가령 전쟁기념관에서 설정되었던 여러 개념들 중 하나인, 도심 속에서의 이미지는 소나무와 물 건너 저편 그린 위에 펼쳐있는 커다란 화강암 덩어리였습니다.
얇은 석판재로서 무게감을 얻기 위해서는 힘의 전달을 주제로 하는 클래식한 어법이 보다 적절하다고 판단하였던 겁니다. 그 당시의 포스트모던과는 아무 연고가 없었던 거지요.


Q 그러던 것에서?

건축을 갓 배운 시점에서 지금까지 50년이 흘렀습니다. 그 당시의 건축잡지를 보면 그 변화를 절감하게 됩니다. 잡지의 편집 수준이나 그래픽에서부터 게재된 건물들의 내용에 이르기까지 지금과는 차이가 많지요. 계산자에서 스마트폰으로, 이미자에서 BTS로……. 
본인이 의식하든 말든 상관없이 달라져 있게 되지요. 모든 면에서 말입니다. 저의 건축도 그 과정에서 꽤나 달라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거운 것에서 가벼운 것까지로, 한정된 건축 윤리관에서 더 자유롭고 열린 생각으로까지 옮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자연스런 과정이겠지요.

함께하는 것이 플러스…“그렇게 하려무나”

이성관 건축사는 아들만 둘인데 모두 이성관 건축사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각각 뉴욕과 한국에서 건축사로 활동하고 있다.
 
Q 부자가 함께 일해도 좋을 것 같은데요.

아빠하고 함께 일 못 하겠대요. (웃음) 이십여 년의 차이가 나니 갭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건축이란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이 플러스예요. 열린 마음으로 함께 해야 더 느끼고 더 깨우치게 됩니다. 자신을 순수 아티스트라고 생각하면 자기 일에 속박되는 것이지만 내 것을 하는 게 건축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남의 것을 한다고 생각하면 배타적으로 되니까요. 좋은 건물을 만든다고 생각해야 해요. 그러면 많은 부분들이 들어옵니다. 지나고 보니 우리 아이들이 저 하고 싶다는 것들에 내가 ‘그렇게 하려무나’ 하지 않고 꼭 토를 달고 고치려 했던 것, 경우에 따라서는 독려하고 인정해 주었더라면 서로 더 좋았을 텐데, 그것이 많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Q 현실과 꿈의 균형을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건축과를 나왔어도 각자 자기에 맞는 갈 길이 다양하게 열려있습니다. 건축설계를 택한 사람에게 한한다면, 졸업 직후의 사무소 선택의 방향은, 이 시기는 향후 5년에서 10년간은 여전히 자기를 위해 투자해야 하는 시기라 봅니다. 이때는 사회로부터의 보상은 좀 뒤로 미루고 어디 가야 자기가 잘 배우면서 클 수 있는 곳인가를 중요한 선택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 기간을 잘 지내게 되면 그때는 어디를 가더라도 더 나은 처우를 받게 되고, 독립하더라도 좋은 성과를 얻게 된다고 봅니다. 따라서 초반의 선택과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미 현업으로 나온 건축사들에는, 우리가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면 거기에는 어려움이 당연히 수반됩니다. 우리 모두는 독립하기 전 떠난 그 사무실에서는 너무 귀하고 소중했던 존재였을 겁니다. 건축사로서의 삶은 본시 고단하기 마련입니다. 이 어려운 시기를 우리 모두 슬기롭게 이겨냅시다.
참고로, 건축주들은 자기 프로젝트를 위해 몸 던져 일해 주는 건축사를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Q 새로운 감각이나 자극을 주는 일들이 무엇인가요?

저는 단조롭고 반복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일상에서도 늘 새로움을 경험합니다. 아직도 여전히 매사에 호기심이 많고 질문도 많습니다. 이런 버릇과 기질은 어떤 면에서는 비생산적이라 할 수도 있지만 제가 그나마 지금껏 버텨온 삶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발바닥의 힘보다는 엉덩이의 무게로 살아온 셈입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어릴 적부터 좋아했습니다. 영화는 직간접적으로 저에게 적잖은 영감을 주고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는 자의 입장에서도 의미 있지만, 만드는 자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더욱 흥미로워진다고 생각합니다.

Q.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을 하고 싶은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봅니다. 기회가 얼마나 더 주어질지는 몰라도 앞으로 이루고 싶은 작업은 ‘힘이 좀 덜 드는 작업’을 목표로 하고 싶습니다. 그게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아직도 일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어떤 어려움들도 훗날이면 이 시절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소중했던 한 때로 그리워하겠지요. 그래서 지금의 이 시간을 늘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대담 홍성용 편집국장 · 글 이유리 기자 · 사진 장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