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도시의 성장과 그늘… ‘소년시절의 너’ 2021.6

2023. 2. 6. 09:08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Growth and shadow of a competing city… 'You in your boyhood'

 

영화 <소년시절의 너> 포스터 ⓒ 영화특별시SMC

소위 인터넷 프로토콜 텔레비전(IPTV) 덕분에, 지나간 영화를 보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면서 이달의 숙제를 하기 위해 영화 사냥을 했다. 그렇게 우연히 발견한 영화에 시선이 꽂히면서 2시간이 넘도록 지루할 틈 없이 집중해서 보았다.
영화의 주제는 오래전 일본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와 중국, 그리고 간간이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공통적으로 거론되는 청소년 왕따 문제다. 어쩌면 이는 전 세계적 문제일 수도 있다. 지금의 50대 이상은 사실 크게 느끼지 못했던(그렇다고 없었던 건 아니지만) 따돌림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조명이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풍경은 그다지 세련되거나 정리된 공간이 아닌 우중충하고 한눈에 봐도 뭔가 불안함이 가득한 공간이다. <소년시절의 너(少年的你, 2019)>라는 제목과 다르게 영화 속 배경은 낡고 지저분하고 황폐화 되어 있는 슬럼가다. 제목만 보면 조금 노스탤지어 적이고 낭만적인 어감 아닌가? 그러한 제목과 영화 속 공간의 불균형은, 나의 시선을 끄는 시작점이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서인지, 거칠면서도 강렬하고 적나라한 화면은 영화의 몰입도를 높였다. 내용은 우리가 익히 아는 왕따 학원물의 전형같이 보였다. 왕따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바로 자기 주변의 가장 약한 대상에게 화풀이하는 데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청소년기에 겪는 스트레스의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 차별과 압축된 사회의 모순이 그대로 전달되어 오는 청소년기의 배신감과 분노 등… 더구나 본인의 노력과 무관한 태생적 환경으로 인한 차이는 좌절감을 안겨준다. 한 케이블 TV의 교양프로 ‘금쪽같은 내새끼’를 보면 아이는 태생적인 악함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전부 성장기의 문제였다.
자신이 처한 태생적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아이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렇기에 유일한 탈출구인 ‘좋은 학교’ 진학은 이런 아이들에겐 간절한 소망이 되었다. 배움이 단지 학문과 소양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사회 경제적 성장 도구로 활용된 지 오래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일종의 경제적 성공을 위한 라이선스인 것처럼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치열하게 학업에 뛰어들고, 그렇게 아이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충분히 긍정적이고, 나쁜 방법은 아니다. 다만 물질 중심, 금전 중심 사회에서 아이들의 상처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런 상처는 뼈에 새겨진다.

이런 암시는 영화 속 대사에서도 나온다. 대학을 졸업하면 얼마를 벌 수 있냐는 샤오베이의 질문은, 대학을 다니지 못하는 뒷골목 인생의 좌절을 어린 청소년의 발언을 통해 확인하게 한다.
이런 일은 비단 중국에서만 벌어지는 상황이 아닌 듯하다. 대부분의 산업국가에서 벌어지는 현상으로, 학력과 얼추 비례해 경제적 보상이 피드백 되는 현실에서, 기성 사회의 성인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그 라이선스를 취득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도 마찬가지로 보통의 사람들과 같은 궤도에 올라타 있다. 매년 우리나라 국무위원급 청문회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자녀들의 학교 문제다. 특목고니 자사고니, 이중국적이니 하는 대부분의 사안들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사회 컨베이어 벨트에서 자녀들을 조금 더 유리한 위치에서 시작하게 하려는 데서 출발한다. 때문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로 인해 비롯된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 상황을 비판하는 각종 영화나 소설,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들이 수십 년째 등장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뻔한 고전적 레퍼토리일 수도 있다. 다만 이런 현상은 눈으로 확인되는 실체라기보다는 머릿속의 상황이다.

영화 <소년시절의 너> 스틸컷 ⓒ 영화특별시SMC
영화 <소년시절의 너> 스틸컷 ⓒ 영화특별시SMC


그래서 <소년시절의 너>에서 나오는 대비되는 도시 풍경은 자연스럽게 영화의 이야기 속에 스며든다. 화려하고 깔끔한 고층건물이 즐비한 신흥 성장 국가 중국의 대도시 풍경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도시를 가로지르면서 흘러가는 고가도로 아래의 판잣집 풍경은 중국의 고성장과 그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런 풍경은 대부분 산업국가의 초기 상황에서 등장하는 풍경이기도 하다. 가깝게는 우리나라 1960~1970년대 청계천 일대의 풍경이 그렇고, 홍콩의 1980년대 구룡반도(주룽반도) 풍경이 그렇다. 좀 더 과거로 시간을 돌리면 20세기 초반 뉴욕 맨해튼의 풍경도 마찬가지다. 1959년도 영화 <그림자(Shadow)>는 도시에서의 삶의 치열함을 보여주고 있다. 매력적인 도시의 예술성과 동시에 처절함도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유브 갓 메일> 스틸컷 ⓒ 워너 브라더스

물론 삶이란 것이 항상 처절한 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처절함을 코믹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인간의 또 다른 욕망과 섞어서…… 허영과 착각도 가끔 필요한 만큼 <티파니에서 아침 (Breakfast at Tiffany’s, 1961)>은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이 코미디 영화 속 삶 역시 녹록지 않다. 부유한 여성 사업가에 의지하는 한량인 남자와 부유한 남자 사업가에게 한몫 챙기려는 하류 인생인 것이다. 도시에서의 삶은 한적한 시골에서의 삶보다 훨씬 치열하고 처절하다. 성공한 이들의 삶을 바로 옆에서 보기 때문에 성공에 대한 욕망도 그만큼 강하다. 사회에서 성공 욕망은 더 어린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나타난다. 

<소년시절의 너>는 학교에서부터 처절한 모습을 보여준다. 교도소라 말해도 무방할 철망 처진 복도는 낭만과 거리가 먼 사육장 같다. 아마도 자살을 막기 위한 궁여지책일지도 모른다.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책상을 가득 메운 교과서와 책상들의 규칙성은 도시의 축소판이자, 정글 같은 경쟁의 현실을 그대로 시각화한 것이다. 

순수하고 아름다워야 할 청소년 시기의 학교 역시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영화에서도 나오듯이, 예쁘고 부유하지만 삐뚤어진 웨이라이는 가난하면서 공부를 지독히 하는 주인공 첸니엔이 못마땅하다. 그래서 모욕을 주고, 망신을 주고, 공개적으로 위협한다. 청소년 시절의 치기 어린 행동이라 하기엔 너무나 잔인하고 치명적이다. 웨이라이의 부유한 부모가 당당하게 학교와 사회에 발언할 때, 보호받아야 할 첸니엔은 이미 학교에서 차별과 차이, 그리고 부조리를 느낀다. 어찌 보면 불공평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해야 삶이 편할지도 모른다. 다만 이런 장면과 이야기를 보는 관객은 순간순간 치밀어 오르는 화를 다스려야 한다. 

아무도 없는 문 닫힌 상가들이 즐비한 골목길과 화려한 도시 풍경 뒷골목의 계단 등, 영화 속 미장센들은 이야기와 맞물려 불안감과 어두움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렇게 영화에서 다뤄지는 청소년 시기의 학교에서는, 정글 같은 생존경쟁과 미성숙함의 잔인함이 어우러져 경쟁의 스트레스를 서로에게 풀어낸다. 

나는 가끔 엉뚱하게도 이런 처절함을 여행길에 만나는 도시 풍경에서 느끼기도 한다. 도시 풍경으로 드러나는 다양한 경관은 마치 그 사회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한 것 같은 느낌이다. 동남아 어떤 도시에서 한참 보행로를 걷다가, 갑자기 보행로가 사라지고 엉겁결에 호텔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런 엉뚱한 공간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지만, 호텔 사업가의 힘으로 보행로를 없애고 행인들을 그곳으로 스며들게 만들었음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낮은 주택들이 즐비한 경관을 자랑하는 곳에 불쑥 솟아 오른 고층건물은 정책의 일관성을 해치는 결과물이다. 이런 도시 경관은 누군가 게임의 룰을 어기고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만들어내는 부조리한 풍경일 것이다. 그것은 이 영화의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매력적인 도시 경관을 다시 관찰해보면 그 사회의 합의와 논리에 순응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균형은 어느 한쪽의 강력한 자본이나 권력으로도 깰 수 없었기에 유지된 것이다. 흔히들 유럽 도시 경관을 이야기하는데, 그들의 역사를 보면 모순과 혼란, 갈등 속에서 조금씩 균형을 잡아가면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인정하는 프랑스의 도시 파리를 보자. 파리의 도시 풍경은 완벽한 이야기 속에 탄생하지 않았다. 정리되지 않고 온갖 모순이 가득 차 있던 상황에서, 그런 파리를 치유적 개념으로 개선한 것이 아니라 엘리트 의식과 권위로 밀어붙여 정리했다. 당시 수많은 상처와 피를 부르며 진행됐다. 그러나 이후에 파리의 도시 경관이 유지되고 지속된 과정을 보면, 반칙을 억누르고 공공적 가치에 대한 합의와 타협을 거친 산물임을 알 수 있다. 피를 부르는 한 번의 독선적 과정이 있었지만, 그 바탕 위에 다듬어진 것은 수많은 모델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만들어지기 전 당시 파리 정치가들의 결정이 온당하다고는 할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런던의 경우다. 오스만의 강력한 파리 시가지 정리를 부러워한 영국에서 런던도 이렇게 정리를 하려고 했지만, 이미 다수의 자본가와 시민들이 소유한 런던을 정비하기엔 설득도 힘들고, 파리의 오스만 시장처럼 힘으로 밀어붙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런던은 파리의 무모하고 일방적인 정책보다 타협을 선택했다. 
분명 런던이 파리보다 혼란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파리의 성과를 연구하고 적용해서 조금씩 개선된 모습을 구성했다. 전체적인 아름다움은 완성하지 못했지만, 부분적인 개선을 시도한 것이다. 여전히 개선하고 고쳐나가야 할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형편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도시가 모델로 더 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왕이면 런던의 타협과 이해를 바탕으로 파리처럼 되면 좋았을 것이다. 물론 그렇더라도 갈등은 존재한다.

런던이 배경은 아니지만, 영화 <유브 갓 메일(You’ve got Mail)> 은 이런 논쟁과 갈등의 도시에 대한 이슈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로맨스 영화다. 혼란스러운 도시 풍경도 다 같은 배경과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중국의 도시는 강력한 개발 권력의 주도로 진행되며, 이 과정에서 개발이익에 순응하는 이들의 묵인이 동반된다. 마치 과거의 파리 도시개조 시절 같다. 국가 중심적 일당 지배 체제의 중국에서 소수의 개인들이 개입하거나 발언할 여지가 사실 없는 상황이다. 

그렇게 적당히 개발의 에스컬레이션을 타서 선점한 경제적 지위를 확보한 영화 속 악역인 웨이라이의 우월감이 왠지 중국의 도시 풍경에 녹아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합리적 의문이라고나 할까? 분명히 주인공 첸니엔이나 아예 희망을 포기한 샤오베이의 존재처럼 성장궤도에 올라타지 못한 실패한 삶들은 어느 도시, 어느 공간, 어느 시간에나 존재했다. 물론 그들의 실패가 온전히 사회 때문은 아닐 것이다. 개인의 역량과 노력이 더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은 이런 실패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 

서구에도 이런 아픈 시절과 그림자는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역시 황금기라고 하지만, 전쟁의 상처와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실패의 굴레에서 도시의 그림자를 밟으면서 사는 삶인 셈이다. 결코 해피엔딩이라 볼 수 없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두 주인공이나, <그림자>의 등장인물처럼 도시의 엑스트라 1·2 같은 인생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게 상처가 있거나 약한 사람들이 도시에서 생존하기란 쉽지 않다. 야생에 상처를 가진 채 노출된 것과 같다. 이런 적나라함은 1956년 다큐멘터리 <술집에서(On the Bowery)>에서 특별한 스토리 없이 관찰로 보여주고 있다. 성인판 <소년시절의 너>와 같은 영화 <부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Last Exit To Brooklyn, 1989)>에서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에서 동정심이 일기도 한다.

서로 가장 가깝게 있는 도시라는 공간에서 밝고 화려함만 보이는 듯하지만, 그 안에 뒤처진 루저 같은 인생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 또한 나름의 방법과 노력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기에 사회에 대한 좌절감과 공포감, 무력감보다는 희망과 긍정을 제시하고 만들어주는 세상이 필요하다. 

문득 이를 위해 우리 도시에서 건축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 사실 건축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 안에도 이미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존재하고, 노력하는 이들도 많다. 다만 욕망이, 야망이 이를 덮고 보지 않으려 하기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재건축과 재개발의 욕망이 정치적, 개인적 주기로 화두가 되는 우리 사회에서 한 번쯤 고민해 볼 주제다. 특히 건축사들은 비판보다 대안을 제시하는 전문가의 역할을 고민해야 한다.

글을 마무리하려다가 문득 2020년 건축영화제에 다뤄진 다큐가 떠올랐다. 다큐에서 다뤄진 홈리스를 위한 주택, 그리고 그 주택을 주도하는 미국의 자선 단체 Skid Row housing trust가 발주한 건축들이다. 놀랍게도 홈리스 주택들인데, 미국 AIA 건축상을 수상한 최고의 작품들이 즐비하다. 참여 건축사의 고민이 그대로 보인다.
그냥 의무적으로, 생색내기로 짓는 것이 아니다. 자~알 건축하는 것을 홈리스 공동주택으로 만든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 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 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ncslab@ncsarchitec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