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7. 09:24ㆍ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건축담론 Architecture Discussion
편집자 註
2000년 대한건축사협회가 임의가입으로 전환됐다. 단일 협회로서 해당 전문자격사의 공적 역할을 확대하기 위해 2000년 중반부터 대한변리사회, 감정평가사회 등 대부분 자격단체들이 의무가입으로 전환했지만, 대한건축사협회는 2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임의가입으로 남아 있다. 임의가입제 하의 지난 21년은 타 분야와 비교해볼 때 전체적으로 건축사의 위상과 업 발전 면에서 오히려 퇴보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지 모른다. 지난 6월 28일 협회가 어렵게 마련한 의무가입 실현의 기회가 국회 법사위 제동으로 유보됐다. 의무가입을 시작으로 여러 건축개혁 작업이 추진될 수 있었지만, 그 동력이 약화될까 우려된다. 이번 국회 법사위에서 나온 발언들도 논란이다. 특히 건축사, 협회 공적 역할에 대한 왜곡된 발언은 건축사 역할에 대한 정부와 국회의 그릇된 인식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건축물의 설계, 공사감리, 건축허가 및 사용승인 시 현장조사·검사 및 확인업무 등과 같은 건축사의 업무는 당연히 공공성을 띠며, 약 1만 2,000여 명의 회원을 둔 협회도 관련 법령에 따라 여러 행정기관이 할 일을 대신하고 있다. 어려운 환경 내에서도 묵묵히 사명을 다하는 건축 사로선 실로 큰 상실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공사현장에서 불법 자격(면허) 대여가 횡행하고, 부조리한 감리 행위 등 의 원인이 무엇이고 대처방안이 무엇인지 생각이 있다면 5분만 고민해 도 되는 일들이다. 원인을 그대로 두고 말라가는 잎사귀를 문제시하는 정책 마인드는 심각한 수준이다. 현재의 임의가입 상태에서 협회는 아 무런 실질적 권한이 없다. 권한이 없음에도 문제를 풀어보라고 하는 황 당한 상황을 이번 법사위 질의응답에서 목격한 셈이다. 이번 의무가입의 가치와 본질에 대한 건축담론을 통해 건축사의 현실은 어떠하며, 의무가입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 해 볼 수 있었으면 한다.
02 Social Roles & Compulsory Membership of Architects
존 러스킨의 생명의 경제학
“한 법관이 갖추고 있는 학식과 혜안이 아니라, 재판석에 앉은 이상 어떤 대가가 따라오더라도 공정한 판결을 내릴 것이라는 흔들림 없는 신념이 우리로 하여금 그를 존경하게 만든다. 뇌물 받은 대가로 불공정한 판결을 내린 뒤, 그에 대한 그럴듯한 변론으로 구색을 맞추기 위해 그의 명석한 두뇌와 해박한 지식을 사용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생기는 이상, 그의 값비싼 지성으로도 우리의 존경을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그의 일생에서 굵직한 판결 사례마다 자신의 사리사욕이 아닌 정의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대중의 암묵적인 확신 외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대중의 존경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존 러스킨의 생명의 경제학에 나오는 글이다.
법관은 공정한 판결을 내릴 때 존경을 받게 되며, 공정한 판결이야말로 법관의 존재 이유가 된다. 군인은 적군의 목숨을 빼앗을 때가 아니라, 국가의 안보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기 때문에 칭송받아야 하며, 이것이 군인의 존재 이유이다. 의사는 돈을 잘 벌기보다는 의술로써 사람을 살릴 때 숭고해진다.
건축사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
건축사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건축사는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이 요구되는 전문직이며, 국가는 자격 요건을 갖춘 사람에게만 그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독점적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건축사는 건축법령에 따라 안전, 기능 및 미관에 지장이 없도록 설계도서를 작성하고, 그 설계도서에 의도한 내용을 건축주에게 해설할 의무가 있다. 또한, 건축물의 시공과정이 설계도서에 충실하였는지의 여부를 확인, 감독하는 등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함과 동시에 건축물 고유의 사회성, 공공성을 근간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건축물의 공공성 및 안전성 확보를 위한 전문가 관리 방안, ARI건축연구원, 5P, 2018년)
이처럼 건축사는 국가 전문자격사로서 국민의 생명·신체·재산을 위해 건축의 안전을 확보해야 하며, 건축문화 창달에 이바지해야 한다. 이것이 국가로부터 자격을 부여받은 건축사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일이며, 그럼으로써 건축사가 숭고해질 수 있는 것이다.
건축사의 현실
전문가이자 독점적 권한을 가진 건축사는 과연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다하고 있을까?
부실한 설계로 안전을 위협하는 건축사, 공무원과 결탁해 불법 건물을 양산하는 건축사, 무료 기획업무로 업무를 수주하고 시공사 뒷돈을 받는 건축사, 현장에 안 나오는 감리자, 자격을 대여하는 건축사, 페이퍼 컴퍼니 건축사 등 윤리의식의 부족으로 빚어지는 건축사의 일그러진 자화상은 현재 진행형이다. 건설업 면허대여 또는 저가로 덤핑 계약하고 공사비 증액 및 유치권 행사를 노리는 시공사와 함께 건축 생태계를 교란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주어진 독점적 권한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윤리의식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재난사고, 참사가 일어나곤 한다. 그럴 때마다 건축법령은 강화되고 관련 심의는 과도하게 늘어나고 있다. 건축사의 책임은 무한으로 늘어나고 권한은 갈수록 줄게 된다. 그래도 건축 단체들은 뭉치지 못한다. 건축 관련 법 개정을 요구해도 국토교통부에서는 건축 단체 간의 이견이 있다는 이유로 결정을 미루기도 하고, 때론 일방적인 법령 개정이 이뤄지기도 한다. 건축사의 사회적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으며 사안에 따라서는 규제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법을 수호해야 하는 공무원이 임의 규제를 해도 낙인찍히고 힘없는 건축사는 오늘도 어디에선가 분통을 터트리고 있을 뿐이다. 주어진 독점적 권한도 희미해지고 무의미해진다. 자승자박이 아닐 수 없다.
국내의 전문가 단체인 의사, 변호사, 법무사, 세무사, 변리사, 관세사, 감정평가사, 공인노무사, 공인회계사는 단체 가입이 의무화되어 있다. 의무가입을 통해 전문성 및 직업윤리 제고, 제도 개선, 복지증진 등 공익적 기능과 함께 자율적 규제 강화를 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전문가 단체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다.
건축사 단체는 2000년 이후 임의가입으로 변경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임의가입 이후로 다양한 목소리가 있지만 뭉치지 못하며, 자율성은 높아졌지만 윤리의식이 낮아져 부조리가 늘었다. 그렇기에 국내의 다른 전문가 단체처럼 의무가입을 통해 자율 규제 강화를 꾀할 필요가 있다.
깨고 나오면 닭이 되고, 깨뜨려지면 계란 프라이가 된다고 했다. 스스로 깨고 나오지 못하면 깨뜨려진다. 의무가입을 통해 건축사 스스로 자율 규제를 강화하고 윤리의식을 바로 세워야 한다. 국가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것이 건축사가 살아가야 할 길이다. 건축 단체의 의무가입은 비정상적인 건축계의 현실을 스스로 깨고 나올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의무가입을 위한 소통
현재 건축계는 다양한 목소리를 위해 나뉘어 있다기보다는 각 단체별 이권을 위해서 흩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선후배로 만나면 같은 의견을 나누고, 단체로 만나면 다른 목소리를 낸다. 건축 단체의 의무가입을 위해서는 우선, 자주 만나고 소통해야 한다. 각 단체별로 다양한 사람과 생각을 가지고 정례적으로 만나는 가운데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학생도 좋고 일반 시민도 고려해 볼 만하다. 각 단체의 이해관계는 내려두고 상생하는 방법을 의논해야 한다. 건축사의 먹거리보다는 사회적인 역할과 책임을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고심해야 한다. 왜 나뉘었는지 보다 어떻게 뭉칠 것인가를 논의해야 한다. 건축사가 아니면 안 된다 보다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협회가 무엇을 했느냐 보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논의해야 한다. 선배들을 탓하기보다 후배들에게 건강한 건축계를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한목소리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각 단체가 통합되고 한목소리로 건축사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다하고자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사회적 신뢰와 존경을 받는 전문가로서의 삶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글. 박성기 Park, Seonggi (주)세이브 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 건축사
박성기 (주)세이브 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 건축사
전북대학교와 한양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에서 건축공부를 했다. 공간건축을 거쳐 2013년부터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소규모 공공건축과 민간건축을 주로 수행하면서 완성 도 있는 건축을 위해 인테리어와 시공을 겸하고 있다. 서울시 공공건축가와 마을건축가, 청신호건축가로 활동하면서 건축사 의 사회적인 역할과 책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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