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건축학회의 ‘건축’ 2022년 3월호‘향리정기(鄕里亭記): 백 년 전 지은 어느 마을 정자 이야기’를 읽고

2023. 2. 18. 09:07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After reading 'A construction record of a pavilion in a village; One hundred years ago.' 
in the March 2022 issue of 'Architecture', the monthly magazine of the Architectural Institute of Korea. 

 

근래 정체성에 관련한 글들을 자주 보게 된다. 건축설계가 본업인 우리 건축사들에게 건축의 정체성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매우 중요한 문제다. 건축사지 2022년 1월 호에서 ‘건축의 보존, 장소와 도시의 정체성... 더 나아가 국가의 정체성’이라는 제목 하에 밀레니엄 힐튼 서울호텔이 헐린다는 소문을 듣고 홍성용 편집국장님이 쓴 글을 보았다. 국제적 명성이 있는 김종성 선생께서 혼신의 힘을 쏟아 만든 건축물인 그런 명작이 새로운 사업을 위해 헐린다고 하니 아쉬움과 함께 상실감을 기록한 글이다. “계절에 따라 옷을 바꾸어 입듯이 경제 환경에 따라 집을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라고 표현한 다른 글이 떠오르며 매우 안타깝고 아쉽고 씁쓸하다.   

최근에는 대한건축학회지 2022년 3월 호에 게재된 ‘향리정기(鄕里亭記): 백 년 전 지은 어느 마을 정자 이야기’를 읽었다. 이 글은 조선 말기 어느 마을에 정자를 지은 분에 대한 고마움의 글이 새겨져 있는 미판(楣板)의 기문(記文)과 한시(漢詩)를 선영구조기술사건축사사무소 최선규 건축사가 해석하여 소개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께서는 집을 짓거나 고치거나 건물의 이름인 재호(齋號)를 지으면 이에 대한 글도 함께 지어 남기셨다고 한다. 영건(營建)에 관한 글은 건기(建記)와 함께 터 닦기를 알리는 개기문(開基文), 구재(鳩財)를 위한 권선문(勸善文) 그리고 상량문(上梁文)과 공사 마무리 때 제문인 고유문(告由文) 등이 있다. 그리고 건물과 주위의 풍광을 읊은 등림시(登臨詩)도 많이 볼 수 있다. 건기나 상량문 등의 글은 판에 새기어 문지방(門楣)에 걸어(楣板)두거나 목판에 새기어 문집(文集)으로 남겨서 후대에 전하고 싶은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문집이나 미판에서 영건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와 생각을 접할 수 있고 창건 과정과 수리내역 등도 파악할 수 있다. 여기 향리정기를 보면 작은 정자 하나에도 이를 만든 분을 기리고자 미판에 기문과 시를 새겨 남기신 것이다. 최선규 건축사는 이 기문의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짓고 시조(時調)를 덧붙여 이런 따뜻한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널리 알리고, 정자가 지어진 장소도 찾으려 하고 있다.


선인들께서 쓰시던 한문으로 된 이런 글들은 읽기에도 너무나 번거로운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떠한 형식으로 어떻게 건기문(建記文)을 쓸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자료로 이 향리정기와 함께 지난해(2021) 10월 호 건축사지에 실렸던 최선규 건축사의 유신재를 소개하는 글을 들을 수 있겠다. 이 글은 기문(惟信齋記)과 시로 구성되어 있다. 관심이 있으신 독자께서는 글과 함께 뒷부분에 있는 두 편의 시도 음미해 보시기 바란다. 이와 같은 글이 현대 건기문의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쓴 글들을 보면 건축에 대한 선인들의 인문적인 기록을 어떻게 오늘날에도 계승 발전시킬 수 있을까 생각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아마 끝자락 한문 세대의 역할로서 선인들의 영건 관련 시문의 전통을 이어 전하려는 듯하다. 오늘날 주위에서 올바른 정신과 진정한 선비(士)나 스승(師)의 자세로 온고지신(溫故知新)과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이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는 “문집이나 미판에 남기신 기문들을 모아 정리하고 기회가 닿는 대로 소개하려 한다”고 하였다. 앞으로도 이러한 생각과 노력에 대한 좋은 결실을 기대해 본다.


요즘 우리 건축사들은 많은 건축물을 설계하고 건축을 하고 있으나, 건축사지에 기고한 작품들을 보면 재호(齋號)가 없는 것이 많고 기문(記文)은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가 설계한 건물의 기문을 만들어 건물에 속한 다양한 의미와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게 하고, 시나 시조도 덧붙여 건물의 정체성을 드러내면 더욱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이 글을 쓴다.

 

 

 

 

 

 

 

 

 

글. 김지덕 Kim, Chitok (주)유신건축종합건축사사무소

 

 

 

 

김지덕 건축사·(주)유신건축종합건축사사무소 회장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 전북대학교 대학원 건축공학과 를 졸업하고 국제엔지니어링건축연구소에서 근무했으며, 1978년 유신건축을 설립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사우디아 라비아 외교단지 내 케냐, 말레이시아, 대한민국 대사관 및 Government Service Center, 인천국제공항 1단계 기본 계획(Bechtel+주.유신 협업), 대전 월드컵경기장(2002 문 화관광부 장관상), 성남 탄천종합운동장, 광양항 국제컨테 이너터미널 및 업무지원시설, 진천 국가대표 종합훈련원 등 이 있다. 아시아건축사협의회(ARCASIA) 공식대표(1984- 1999), ARCASIA 포럼 제10회 서울대회의장, ARCASIA 건축교육위원회 한국대표(1995-1998) 등을 역임했다.

kimchitok@yooshina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