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사. 나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2022.5

2023. 2. 19. 09:07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Architect. My past, present and future…

 

여름… 건축주를 만나 가을… 허가를 받고 겨울. 실시설계 작업이 끝나면, 봄…. 현장으로 나갈 설계도서들을 마무리하며 한시름 놓는다. 매해 이런 업무 패턴을 반복해 오며 올해로 개업 20년 차를 맞게 되었고, 맡은 바 업무에 대한 소신과 사명감으로 일해 왔다고 자부한다. 이에 건축사 업무를 해오며 경험하고 깨닫고 생각하게 된 나의 어제, 오늘, 내일에 대하여 편하게 써 내려가 본다. 


Past… 준비되지 않은 건축주와 준비된 건축주를 통한 깨달음
짧은 실무 경험에도 열정과 패기로 가득했던 서른 살, 건축사시험 합격과 동시에 겁 없이 사무소를 개업하게 되었다. 이후 얼마 안 돼서 알음알음으로 사무소를 찾은 한 중년 신사로부터 공장설계를 의뢰받았고, 직접 찾아준 의뢰인에 대한 감사와 첫 수주에 대한 섣부른 기대로, 의심 없이 설계를 착수하는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 

협력업체와도 협업하여 어느 정도 설계도서가 준비되어 가던 어느 날, 의뢰인과 연락이 닿지 않았고, 우리 사무소를 소개해 줬다는 사람들을 역추적하다 그가 건축주가 아닌 브로커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건축주들로부터 설계비 명목으로 돈을 받은 후 자취를 감췄고, 이 일을 수습해야 하는 건축주들은 건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고, 아무런 준비조차 되지 않았었다. 몇 달 동안 진행한 우리의 설계비는 고사하고, 협력 업체에게 결제할 대금마저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결국, 제대로 된 결과 없이 손실은 고스란히 건축주와 건축사에게로 돌아왔다. 

큰 수업료를 치르며 배우게 된 것은 계약의 중요성이었다. 계약을 제대로 했었더라면 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계약서 내용들을 정비하고 보니 잘 챙겨놓지 못해 놓친 조항에 더 안타까웠다. 소개로 들어오는 의뢰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겨 건축주에 대한 경계심이 발동하였고, 제대로 된 건축주에 대한 갈망은 커져갔다. 막막한 시간들이 한참 흘렀다. 일의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생각만 많았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던 중, 인천에 젊은 건축주 부부의 상가주택 지명설계 공모 소식에 ‘내가 지금 지역 가릴 때인가!’하고 참여 신청을 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건축을 준비해 온 건축주 부부는 공모를 통해 설계자를 찾는 방식을 택했고, 나는 젊은 감각과 열정 면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아 설계자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실패를 만회하고자 기를 썼던 탓이었을까? 건축주의 형편을 살펴보지 못한 과한 디자인은 과도한 공사비를 초래하게 되었다. 

예상치를 한참 넘긴 견적들을 마주하게 된 건축주 부부는 처음엔 난색을 표했지만, 오랜 협의 과정을 통해 얻은 설계 결과물에 대하여 공사를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표하며 신뢰를 보내주었다. 나는 어렵게 추가 예산을 확보해 준 건축주 부부에 대한 감사의 보답으로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보여주겠다 다짐하였다.

그 당시를 떠올리면, 건축사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굉장히 좁았었던 것 같다. 허가를 득한 후, 몇 가지 상세도만 추가하면 설계업무가 끝일 거라 생각했고, 건축사의 업무와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는 별 고민을 하지 않았다. 나의 이런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건축의 과정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었던 건축주 부부 덕분에, 오히려 방황하던 기로에서 나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또 한편으로 나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확장된 고민을 해보게 되었고, 공사에도 깊이 관여하다 보니 건축설계뿐만 아니라 건축의 전 과정 안에서, 건축사는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하는 적극적 조정자가 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Present… 소신을 가지고 하는 일에 관한 단상
지난밤 출출하던 차, TV에서 돌솥비빔밥이 나오는 장면을 보고 ‘내일 점심은 돌솥비빔밥을 꼭 먹어야지!’생각한다. 다음날 점심시간, 메뉴판 볼 것 없이 돌솥비빔밥을 주문했는데 열무비빔밥이 나온다. 주문서는 분명 제대로 되었는데 식당 사장님 왈 “날씨도 덥고 돌솥도 뜨겁고 해서… 내 딴에 열무비빔밥으로 한 거니 일단 드셔봐요! 열무 가격이 올라서 돌솥보다 비싼데 돌솥 값만 내쇼~”한다면 어떨까? 열여섯 살 딸이 질문에 경악한다. “Oh my god! 사장님이 뭘 잘못 드셨나?”
물론 이건 내가 설정한 가상이고 세상에 이렇게 무례한 식당 사장님은 없을 것이다. 3대 거짓말에도 있듯이 밑지고 하는 장사가 어디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같은 상황을 겪게 된다면 상당히 불쾌할 것이고, 원하는 메뉴로 해 줄 것을 강하게 요구할 것이다. 하물며 수억에서 십수 억 하는 소규모 건축의 공사를 들여다보면 어떠한가? 여기에서 두 가지의 경우를 예로 들어본다.

첫 번째, 부실한 설계도면으로 공사를 진행하는 현장의 경우이다. 특히 소규모 지정감리의 업무를 하다보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들이 있다. 중요한 디자인이나 자재, 시공방법들이 현장에서 시공자의 편의에 의해 너무나도 쉽게 바뀐다. 이런 변경에 의해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에 해당하는 품목들이 임의로 변경되고, 시공방법도 달라지고, 기성은 현장과 무관하게 20%, 30% 청구된다. 더욱 신기한 일은 기성검사도 없이 건축주들이 순순히 기성을 지급하는 것이다. 보다 보면, 이건 ‘세상에 이런 일이!’프로그램에나 나오는 기이한 현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감리자로서 많은 건축사들은 이러한 상황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이를 꼼꼼하게 따져볼 만한 주문서가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허가를 위해 작성한 도면들이 그대로 공사도면으로 꾸려지기 때문에, 준공상 법적으로 문제 되지 않는 선에서 감리 기본업무만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건축주의 잘못된 인식으로부터 시작되는 부실한 설계는 전문가로서 건축사의 권위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며, 이로 인한 불투명한 결과물을 받는 것은 건축주에게는 당혹스럽고 불쾌한 열무비빔밥을 받는 것과 같다.

두 번째, 첫 번째 경우와 달리 잘 꾸려진 설계도서로 공사를 진행하는 현장의 경우이다. 설계도서에는 공사계약 내역서와 수량산출서, 자재사양서, 시방서, 공사용 도면에, 요즘은 시공자의 이해를 돕는 3D모델까지 포함되기도 한다. 건축주는 어떤 재료로 얼마만큼의 양을 들여 어떤 방법으로 집을 지을 것인가를 도서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전문가로서의 건축사의 권위는 당연 높아지게 된다. 또한 내역과 수량산출서가 잘 갖춰져 있다면 기성검사는 물론 시공사와 깔끔한 정산도 편리하고 효율적이다.
앞의 두 가지 경우를 비교해 볼 때 같은 규모, 같은 공사비라면 어떤 쪽이 건축주에게 더 유리할까? 같은 비용으로 디자인과 품질을 어떻게 만들어낼지는 설계자의 역량에 따라 다르고, 이는 설계비와 연관된다. 주목할 점은 설계비와 공사비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설계비가 싸다고 해서 공사비가 싼 것은 아니며, 설계비가 몇 배로 비싸다고 해서 공사비까지 비싼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위해 제대로 된 주문서를 만들어줄 설계자를 찾고, 이 주문서대로 지어진 건물을 인도받는 것이 당연함과 이를 위한 건축의 과정을 건축주에게 바르게 인식시키는 것은 건축사가 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은 건축주의 몫이다.

Future… 순항을 위하여!
건축주를 만나면서 시작되는 건축의 과정은 마치 항해와 같다. 목표하는 종착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건축주는 설계자와 긴 여정의 맵을 잘 그려나가야 할 것이다. 시공자는 항로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작성된 맵에 따라 안전하게 운행해야 할 것이며 감리자는 어둡고 험한 바다에 등대와 같이, 정확하게 찾아갈 수 있도록 빛을 밝혀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같은 목표를 향하는 건축의 긴 여정 동안 건축주, 시공자, 건축사는 서로 존중하고 배려해야 할 것이다. 

올봄 어김없이 청색 레자크지 표지로 옷을 갈아입고 돌아온 공사도면을 대하게 되니 다시 시작되는 항해가 순탄하길 바라는 마음 가득이다.

 

 

 

 

글. 이상이 Lee Sange (주)하우디자인 건축사사무소

 

 

이상이 (주)하우디자인 건축사사무소·건축사

 

충남대학교 건축공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2003년부터 현 재까지 (주)하우디자인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해오고 있다. 공공 건축과 우리 주변의 친근한 중소규모 건축물 작업을 주로 하고 있으며, 설계·감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기준을 제공함 으로써, 건축의 과정이 신뢰를 바탕으로 건강하고 즐거운 과정이 될 수 있도록, 맡은 바 역할에 깊은 고민을 가지고 업무에 임하고 있다. 주요 작업으로 청연재, 위풍당당, 더테라스, 제너럴 하우스, 상주공간, 성남 다목적체육관, 대전보호관찰소 등이 있다.

 

 

how5232@empas.com / www.howarchi.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