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비평서초 S주택; 말레비치의 창문 2022.5

2023. 2. 19. 09:24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Architecture Criticism
Seocho S house; Malevich's window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러시아 절대주의의 창시자인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1878~1935)는 회화에서 모든 일상의 재현을 거부하고 제거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제거한 후 1915년의 ‘검은 사각형’과 ‘검은 원’, 1918년의 ‘흰색 위의 흰색’의 세 작품을 통해 추상회화를 가장 극단으로 끌고 간 미술가, 순수추상화가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흰색 캔버스의 정중앙에 검은색 사각형을 놓다가 흰색 캔버스의 한 쪽 모서리 쪽에 검은색 원을 위치시키고 마지막에는 흰색 캔버스(사각형)의 한 쪽 모서리에 흰색 사각형을 기울여 위치시키는 일련의 그의 작업은 현대 회화가 일상에서 추상으로, 감상이 아닌 사유의 대상으로 바뀌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회화에서의 순수추상적 경향은 일반인들의 일상 경험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좀 더 인간적인 요소를 매개로 한 다양한 현대 회화의 출현을 가져오게 된다.

<서초S주택> 정면 전경(밤) &copy; 박영채


건축사 황준의 ‘서초 S 주택’의 첫인상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를 그대로 3차원 건축물로 바꾸어 놓은 모습이었다. 긴 직사각형의 흰색 담장 위에 얹힌 흰색과 검은색의 사각형이 그 외관 요소의 전부였다. 그의 이전 작품들도 대부분 미니멀적인 형태와 공간을 연출하긴 하였지만, 점이나 선적인 요소들을 극소화 시키고 몇 개의 흑백 면으로만 파사드를 구성한 것은 주택의 외관으로선 상당히 실험적이었다. 특히 반투명의 인공적인 담장 위에 균질한 흰색 페인트의 저층부 매스, 그리고 그 위에 컨테이너를 연상시키는 검은색 금속 재질의 외피라는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재료들을 조합하여 조화로운 외관을 만드는 독특한 건축사의 미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모호한 경계
처음 서초 S 주택을 방문한 방문객은 아마 기묘한 위화감을 느낄 것이다. 기존에 경험하던 주택들과는 다른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먼저 집에 들어가려고 하면 우리가 기대하던 대문도 담장도 차고문도 없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담장과 차고문, 대문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크기의 반투명 판만이 외부 가로영역과 주택 영역을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차의 이동, 사람의 이동, 가로영역과 주택영역의 구별이라는 서로 다른 기능들을 형태는 기능에 따른다는 오래된 습관에 따라 다르게 디자인하지 않고 동일한 건축언어로 균질화하여 방문객에게 내부의 공간이 궁금해지는 서프라이즈 박스 같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동시에 가로영역과 주택영역을 동일 높이의 담장으로 확실히 분리하면서도 솔리드하지 않은 가변형 경계라는 인상을 심어준다. 

대문을 지나 집에 들어가려고 하면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현관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세 개의 주택과 두 개의 작업 공간이 별도의 출입구를 가지는 구조이기는 하지만 공용계단의 입구에서 흔히 보던 금속 재질의 프레임과 반투명 유리로 이루어진 큰 현관문, 그리고 박공형 캐노피를 예상했던 방문객은 물탱크실에 올라갈 때 사용함직한 작은 흰색 캐노피가 있는 흰색 문을 앞에 두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순간 망설이게 된다. 완충공간을 과감히 삭제한 공간적 미니멀이며 경계의 파괴이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벽, 바닥, 천장이 모두 동일한 흰색을 주조로 하여 구성되어 있다. 가구도 난간도 커튼박스나 걸레받이도 모두 ‘흰색 위의 흰색’처럼 빛의 반사와 흡수가 차이 나는 마감을 통해 구별되면서도 구별되지 않는 경계를 형성한다. 복도 창문을 보면 굵은 프레임에 커튼박스를 갖추어 경계를 강하게 상징하는 일반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프레임을 구조체 속으로 숨기고 커튼박스 대신 150밀리미터 정도의 틈으로 천장과 벽을 나누어 원래 열린 공간을 살짝 유리로 막은 느낌, 즉 느슨한 경계의 느낌을 연출하고 있다. 거실과 작업실, 주방과 식당 모두 프레임을 거의 노출시키지 않도록 연출된 개구부와 영역을 나누어 주는 낮고 가벼운 재료의 가구와 칸막이를 통해 동일하고 느슨한 경계를 보여준다.  


공간과 영역
서초 S 주택은 평면이라는 도구에 익숙한 건축사들이 각 층의 테두리를 정해놓고 기능과 영역에 따라 분할하여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영역마다 고유한 하나의 공간을 디자인하고 서로 느슨한 경계를 통해 이웃하도록 배치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로 인해 평면상으로는 외부공간과 내부공간이 각 영역별로 켜켜로 분절되어 쌓여있는 듯하지만 실제 경험 시엔 서로를 자연스럽게 시각적으로 연결시켜 준다. 

주택에서 수직이동을 담당하는 2개의 영역은 동일한 계단이라는 장치를 통해 기능하지만 각 영역의 성격에 따라 서로 대비되도록 디자인되고 있다. 1층과 2층 사이의 수직이동만을 담당하는 전면부의 계단영역은 전체를 휜색으로 통일하고 상부에 1개소의 측창만을 두어 빛을 제한적으로 유입시킨 후, 계단 중앙에 높은 불투명 판을 두어 재료의 물성이 강조된 폐쇄된 수직박스형 무채색 공간을 연출한다. 이에 반해 이 영역과 바로 이웃한 2층 복도 공간에서 옥상정원으로 나가는 계단영역은 후면의 주인집으로의 통과영역을 겸하기에 계단은 밝은 목재 재질로 챌판이 없이 디딜판만 캔틸레버로 두고 계단 벽을 투명한 유리벽으로 경계만 형성한 후, 계단 상부와 복도 측면에서 충분한 빛을 유입하고 계단과 동일한 밝은 목재 바닥으로 마감하여 마치 계단이 통로 왼쪽의 붙박이장처럼 하나의 가구가 되는 개방적인 유채색 공간을 연출한다. 이렇게 하나의 영역은 그 영역의 성격과 특성에 맞도록 하나의 공간으로 디자인되고, 이웃한 공간과 때로는 조화롭게 때로는 대비되게 이어져 있다. 

건물 내부공간이 벽과 천장, 벽과 바닥 사이에 형성된 크고 작은 틈에 의해 각 영역의 다양성과 표정이 연출된다면 건물 외부공간은 각 영역을 수직으로 적층시키며 중정 쪽으로 시선을 끌어들이도록 연출되고 있다. 주차영역을 포함한 대지 전체를 푸른빛 타일 바닥과 나무껍질 모양의 벽으로 감싸고 그 위에 300밀리미터 정도를 들어 올려 나무바닥과 나무벽을 얹고, 다시 그 위에 세 켜의 흰색 페인트 마감 매스와 검은색 금속 입방체를 끼워 놓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각 주택의 진입과 소통을 이루는 중정 영역으로 공간이 중첩되고 압축되는 느낌을 형성한다.


디테일의 힘
주택의 내부 디자인은 잘 제작된 페이퍼 아트를 보는듯한 디테일이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크기의 틈과 얇은 판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공간을 구성하고 있었고, 인터폰마저도 벽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벽에 긴 오목공간을 만들고 그 속의 한 쪽에 인터폰과 조명 스위치를 위치시키고 있었다. 오목공간의 높이는 인터폰의 높이와 일치하여 설계자가 미리 거실의 디자인에 맞는 인터폰을 선정하고 그 크기에 맞게 오목 공간을 계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내부 벽과 바닥이 만나는 지점엔 익숙한 걸레받이 대신에 작은 홈만을 두어 시각적으로 각각의 요소를 부각시키고 마감에서의 신축균열을 통제하고 있었다. 특히 계단과 벽이 만나는 부분의 경우 복잡한 계단의 형상 때문에 시공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데도 여전히 작은 홈의 디테일을 고집한 것과 벽을 파고 정교하게 집어넣은 계단의 손스침, 그리고 내부에서 보면 벽 속에 프레임을 매입한 것처럼 보이도록 오픈 위치가 정교하게 조절된 복도 개구부 디테일에서, 사유를 통해 풀어내는 절대주의 회화와 같은 건축을 하면서도 손맛이 살아있는 디테일을 고집하는 건축사의 장인 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서초S주택> 계단실 &copy; 박영채


말레비치의 창문
말레비치가 추구했을 순수추상의 절대적 회화가 흰색 사각 캔버스에 흰색 사각형을 끝으로 멈추어버린 세계라면, 서초 S주택에서의 흰색 입면과 공간들은 결코 멈추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살아 있고 호흡하고 있었다. 모호한 경계를 가진 흰색의 공간들은 비어 보이지만 빈 것이 아니었으며, 태양의 이동을 고려한 다양한 크기의 열린 부분으로 들어온 빛에 의해 벽에 반사되고 그림자를 만들며 시간과 변화를 연출한다. 복도 끝에 위치한 프레임 없는 창문을 통해 건너 보이는 풍경은 건물 내부로 들어와 거주하는 가족들에게 끊임없이 계절과 기후와 자연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흰색 위의 흰색’ 이후 작품 구상의 어려움을 느끼던 말레비치는 그 창문 앞에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만족한 웃음을 웃고 있었다.

 

 

 

 

 

글. 홍성민 Hong, Sungmin 부경대학교 교수

 

 

 

홍성민 교수·건축사 국립부경대학교 조형학부

 

건축학전공 정교수로 재직 중이며, 부산교육청 기술자문위원 및 한수원 설계심사위원이다. 무영 건축, 삼우설계에서의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건축사를 획득하 고 대학에서 건축실무와 설계를 교육하고 있다. 주 연구분야는 디자인 프로세스와 건축물의 상징성에 대한 다양한 건축참여 자의 인식특성에 관한 것이며 지역마스터플랜, 도심재개발, 도 시야간경관 관련 프로젝트 연구를 수행하였다. 주요저서로는 주택계획이론과 설계, 건축일반구조학, 건축시공학 등이 있다.

 

gaudimin@pk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