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비평] 절반을 채우는 그릇 2023.5

2023. 5. 19. 14:59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Architecture Criticism Bowl filling half way

 

 

<밀락더마켓> Grand Stair에서 본 전경 ⓒ윤준환

 

십수 년 전 필자는 학부 휴학 중 아르바이트생 신분으로 (주)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의 신입사원이었던 이승진 건축사를 만났다. 두 사회 초년생의 만남은 경쟁과 견제로 시작되었지만, 어느덧 연대와 동지애로 이어져 건축적인 열정과 고민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공교롭게 둘 다 조금 단조로운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각각 이승진 건축사는 삼우건축에서만 13년을, 필자는 매스스터디스에서만 12년의 오랜 실무경력을 마치고 2019년도에 각각 개소하여 각자의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서로의 초기 작업을 내놓는 타이밍에 그의 작업을 일방적으로 들여다볼 기회가 생겨 감회가 새로우면서도 부담스럽지만, 그간 보지 못했던 서로의 인생을 작품과 글로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도 나름대로 즐거울 수 있다고 스스로 다독여본다.

배경
처음 방문했던 밀락더마켓(민락동 복합문화시설)은 준공을 앞두고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광안리 해수욕장의 상업지역과 인근 주거지역 사이의 수변로에 위치한 건물은 바닷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광안대교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푸른 수평선을 배경으로 놓인 박공지붕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기시감이 들게 했다. 수변 앞 방파제로 걸어가 도시를 배경으로 건물을 바라보니, 20층 이상의 주상복합 아파트 사이로 보이는 하늘과 그 아래 연속된 세 개의 박공지붕은 존재함으로 비워졌고 배경과 전경을 순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들어보니 사업주는 최소화된 용적률과 보행자 친화적인 낮은 매스, 대공간에 대한 의지가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저층부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건물의 상부로는 주변과 이면 대지에 바다 조망을 나눠주며 공공성을 획득했다. 
붉은 적벽돌과 철강소재 역시 부산 해안가 건물의 주조색인 하얀색과 대비되며 배경에 어울리는 재료로 구성되었지만, 영속성을 추구하는 자연의 색상과 질감은 푸른 수평의 바다를 배경으로 오히려 강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역설을 보여준다.

상업공간의 진화
츠타야 서점을 만든 마스다무네아키가 『지적자본론』에서 사용했던 시장의 변화에 대한 표현을 간략하게 인용해 본다.
“온오프라인 플랫폼이 넘쳐나는 지금 시대에 필요한 건 소비자가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선별하고 정제해서 전달하는 것, 상업공간에서 전달되는 것에는 기획한 판매자의 이미지가 포함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도 현대카드의 라이브러리 시리즈나 엘씨디씨 성수, 무신사 테라스 등 주로는 자본집단의 기획에 의한 공간이 만들어지고 있다. 폐쇄된 환경에서의 소비를 강요하던 이전의 소비 개념에서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공간을 매개로 하는 브랜딩과 영업 전략은 소비자로서도, 건축사로서도 반길만한 전환이다. 민락동 복합문화시설도 이러한 흐름 위에 있다.

창고, 마켓, 광장을 닮은 공간
민락동 복합문화시설은 주변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어우러지도록 의도되었다. 부산항에서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사용되는 창고 건물과 주변의 근대건축물에서 형태와 재료를 차용하여 익숙한 풍경을 연출하는 한편, 내부 공간은 들어올려진 지형, 계단 광장이라는 장치를 사용해 한방에 깔끔하게 처리했는데, 역시나 필연적으로 보일 만큼 심플하게 논리적이다. 자칫 단조로워 보일 수 있는 공간계획은 광안대교를 바라보는 배경과 건축의 주목적인 콘텐츠를 드러내는데 오히려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부 공간을 살펴보면 1층엔 필로티 주차장과 진입을 위한 계단, 홀이 배치되며, 2층은 오픈플랜의 상업공간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공간구조를 갖고 있다. 북쪽의 주차장 측 출입구는 매스의 상당 부분을 음각으로 덜어내고 계단과 에스컬레이터의 조합으로 2층 메인공간으로의 진입을 유도한다. 2층의 메인공간은 시장 가로동선의 오픈플랜으로 구성되어 테넌트의 필요 혹은 기획자의 기획에 의해 손쉽게 변형 가능하도록 계획되었다. 북측의 주차장과 이면 가로구역으로부터 남측의 해변까지 양방향으로 연결되는 수미상관의 구조는 비워진 하늘, 콘텐츠로 채워지는 그릇이 된 공간과 더불어 도시적 스케일에서도 비움으로 연결하고자 하는 건축사의 일관된 의지가 느껴졌다.

필연의 세계
건물을 둘러보고, 지붕레벨까지 보행자들을 끌어올리면 어떨까 궁금하기도 해서 놓친 기회에 대해 물어보았다. 역시나 돌아오는 답변은 공사비 관련이었고, 일부 수긍할 수 있었다. 주변과의 조화, 클라이언트의 목적, 예산까지 합리적으로 고려하면서도 과하게 욕심부리지 않는 착하고 성실한 건축.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나에게 같은 기회가 주어졌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봤다. 필자는 스스로를 ‘은근히 개성을 드러내려 하는 신생 건축사’의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합리적 선택의 범주 안에서 개성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 그것이 나와 너의 이익일 것이라는 막연한 바람, 필연 속에 억지로 녹여낸 자의성이라든가. 분명 나였으면 더 욕심부리고 스스로와 건축주도 좀 더 힘들게 만들었을 텐데, 만약 그렇다고 한들 더 좋은 걸 만들 수 있었을까? 건축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번듯한 풍경에 욕심이 날 법도 한데, 굳이 스스로 전경이 되려고 하기보다 배경이 되어 도시와 사람을 연결하고 주변의 맥락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은 어쩌면 우리의 일상에 더욱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글. 김원방 Kim, Wonbang (주)퍼스펙티브스 건축사사무소

 

 

김원방 건축사 · 퍼스펙티브스 건축사사무소

 

김원방 건축사는 파트너 배정혜와 함께 2019년부터 퍼스펙티브스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2019년 창동 로봇박물관 국제설계공모 2위, 2019년 용인 창의과학도서관 당선(바운더리스, 황어쏘시에이츠와 협업) 2022년 영천 시립박물관 2위, 성수동 엠프티(WGNB, LJL 협업) 등의 설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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