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오딧세이 ② 쪽방촌, 정작 사람은 오지 않아요 2023.7

2023. 7. 21. 13:40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ity Odyssey ② It's a dosshouse where no one comes

 

 

쪽방실측 © 서울역사박물관

 

한낮인데도 골목이 적막하기만 하다. 잠들어 있는 공간인가 여겨질 정도여서, 발걸음은 물론 카메라 들이대기조차 조심스럽다. 의자에 앉은 지긋한 나이의 아주머니 표정이 무겁다. 골목 끝에 모여 앉은 몇몇 역시 마찬가지다. 이곳에 들어서면 차가운 시선이 먼저 날아온다. 낯선 존재에 대한 경계 반응이다. 돈의동 쪽방촌 첫인상이다.
이곳은 대체로 불결하다. 욕설과 다툼, 때론 술판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곳을 도심 속 외딴섬으로 여기곤 한다. 나와는 다른, 못 배우고 가난하며 게으른 인생 막장에 다다른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취급한다. 그러면서 이 공간을 생경한 눈으로 바라본다. 더럽고 비참하며 처량하지만, 가급 찾아선 안 되는 곳으로 취급한다. 분명 낙인이다.
하지만 이곳은 섬은 물론 낙인찍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하나의 ‘촌락(村落)’으로 오히려 다른 공간보다 훨씬 더 정감 넘치게 살아간다. 우리가 잊고 살아온, 가치와 전통을 지켜가는 농촌 마을이 도심 한복판에 재현된 듯하다. 향약이나 두레처럼, 서로 돕고 의지하며 끈끈한 공동체 의식으로 똘똘 뭉쳐있다. 서로 의지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빈곤한 평등’을 누리고 있다. 원시 공동체가 이랬을까. 결코 미화하려는 게 아니다. 이들은 단지 신체기능과 병환, 나이 등으로 사회 적응력과 경제 능력을 상실했을 뿐이다. 이게 이들을 바라보는 가장 적절한 시선이다.
나도 그랬다. 처음엔 낙인으로 바라보았으나, 왜곡된 내 시선이 문제였지 이들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에 이어 내 안의 부끄러움, 수오지심(羞惡之心)을 알게 되었다. 이런 마음으로 이곳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나마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종로 뒷길에 자리한 돈의동 쪽방촌에서 깨달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구경꾼 혹은 관찰자’에 불과하다는 사실까진 부인할 수 없다.

 


서종삼(徐鐘三) 이봉익(李鳳翼)
돈의동 쪽방촌이 있는 곳은 구한말까지 공터였다는 게 중론이다. 재래식 연료에 의존하던 당시 땔감과 숯을 거래하는 ‘시탄(柴炭) 시장’을 1920년 12월 경성부가 개설한다.
1876년 개항과 더불어 한반도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그들 거류지 중심으로 공창(公娼)인 유곽(遊廓)을 들여온다. 일제 강점기인 1916년 합법화한 공창이 전국으로 확산한다. 가히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고, 규모의 경제를 갖춰 급기야 집단화·산업화한다. 
1930년대 후반 사창(私娼)마저 공창을 따라 집단화한다. 1936년 돈의동 시탄 시장이 폐쇄된 후 이 공터에도 사창이 생겨난다. 그 후 주변 요릿집과 카페, 주점 등의 홍등가와 함께 시나브로 집단화한 것으로 추론한다.
1947년 공창이 폐지된 이후, 이 공간은 소위 ‘서종삼 이봉익’이라 부르는 종로 3가 사창가 핵심으로 성장한다. 공창 폐지에 따른 풍선효과였다. 1968년 9월 시행된 이른바 ‘나비 작전’으로 이곳을 찾던 수요가 하루아침에 끊겨 버리자, 여종업원이 살던 집과 가게들이 모두 비어 버린다. 1970년대 들어 빈집들이 순차적으로 쪽방으로 변한다. 밀 매춘이 이뤄지던 좁은 방 구조가 그대로 쪽방으로 기능이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가옥 구조와 재료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노숙으로 내몰리기 직전 사람들이 이곳에 거주한다. 일용직 등에 종사할 수 있는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기초 생활 수급자다.
쪽방촌 공간조직은 매우 열악한 주거 기능을 수행 중이다. 그야말로 ‘최후 보루’라 할만하다. 쪽방을 흔히 ‘1인 감옥’이라 부르는 근거다. 이곳이 철거재개발이나 그 흔한 젠트리피케이션 광풍을 피하게 된 건, 순전히 열악한 장소라는 물리적이며 사회·공간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돈의동 쪽방촌 입구 © 이영천
돈의동 쪽방촌 내부 © 이영천


열악한 공간조직과 이중 압박
돈의동 쪽방촌은 큰길과 골목, 다시 건물이 에워싼 안쪽에 자리한다. 통로는 4곳뿐이다. 약 3천 3백여 제곱미터 면적에 동서로 긴 몇 장방형 획지가, 획지는 다시 나란한 2열의 작은 필지로 나뉜 대지로 구성되어 있다. 획지 사이를 구분하는 도로 폭은 2미터 내외고, 각 대지에 2∼3층 노후주택이 열 맞춰 앉아 있다. 층마다 1.7∼5제곱미터 규모의 쪽방 수 개씩이 자리한다. 마치 게토(ghetto)가 연상되는 슬럼화된 공간조직이다.
이곳 거주민 대부분은 정부에서 지급하는 50여 만 원의 기초생활수급비에 생명줄을 잇대고 있다. 보증금 없이 방 규모에 따라 매월 15∼35만 원 임대료를 지출한다. 단위면적당 임대료 수준은 대한민국 최고액으로, 지대(地代)만 보면 최상위 계급에 해당하는 셈이다. 한 끼니 식사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머지 금액으로 연명하는 악순환 구조다. 이들은 수백만 원 상당의 목돈 마련이 어려운 계층이다. 임대료 융통마저 불가능한 ‘융자 거절 계층’인 셈이다. 아니 ‘금융 불가촉 계층’이라는 말이 더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기제는 정작 쪽방 소유자들에겐 반대로 작동한다. 금융권은 이런 공간조직에 투기하는 세력과 적극적으로 연합한다. 막대한 ‘토지 자본 이득(투기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투기꾼이나 금융권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투기하는 세력은 환경이나 가옥 개선을 위한 재투자 없이, 어서 빨리 재개발되도록 로비하거나 때를 기다린다. 쪽방촌 소유주 70%가 부유층이자 외부인이다. 그들은 쪽방촌에 관여하지 않으며, 관리인을 두어 매월 수백만 원의 임대수익을 향유하고 있다. 언제든 쪽방촌을 다른 기능으로 용도 변경하거나 리모델링을 통해 임차인을 쫓아낼 궁리만 한다. 이 지점이 쪽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다. 보증금 없는 임차인은 언제든 쫓겨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법과 제도마저 이들의 최소 주거권을 완전하게 보장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정부는 어떨까? 한마디로 연명할 수준의 생계비만 지원하고, 사실상 손 놓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 쪽방촌 거주민들이 사회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그저 쥐 죽은 듯 살아가기만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소위 ‘빈곤 포르노를 통한 가난의 상품화’에 가장 열심인 집단이 바로 언론이다. 명절이나 혹서·혹한기가 되면 카메라와 기자들 발길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사회자선단체의 ‘온정’에 호소하는, 반복되는 연례 행사다. 기업과 사회단체의 자선과 기부가 무의미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의 아픔과 처지를 동감하는 게 실마리를 찾는 제1 요소 아닐까? 이들이 삶에서 느끼는 불안 요소가 무엇인지, 잘 지켜온 생활공동체를 깨뜨리지 않는 방법은 무엇인지 모색하고 해결 방안을 찾는 게 첩경이라는 생각을, 한낱 관찰자마저 감히 가져 본다.

 


공유 쪽방촌은 어떤가?
쪽방촌 거주자는 수백만 원 상당의 보증금 마련이 어려운 계층이다. 설령 공공임대나 영구임대주택에 입주하더라도, 임차료 부담뿐 아니라 역차별 등으로 그곳 생활공동체에 흡수되지 못했던 사례를 여러 연구 결과가 실증하고 있다. 즉 더는 갈 곳이 없다는 얘기다.
끈끈한 생활공동체를 형성하며 어엿한 하나의 촌락으로 자리매김한 쪽방촌을 지켜낼 방안은 없을까? 이를 통해 재생과 자립구조를 스스로 갖게 하는 바탕을 마련할 순 없을까? 최소한의 주거안정권을 보장할 방안은 무엇일까?
‘공유 쪽방촌’을 생각해 본다. 자치단체든 광역단체든, 혹은 정부 투자기관이어도 무방하다. 그들이 쪽방촌을 통째로 사들인다. 그 안에 임시거처를 마련하고, 각 주택을 순차적으로 리모델링 해 나간다. 구조적으로 취약한 주택은 과감히 재건축한다. 단위환경과 위생을 개선한다. 화장실과 부엌, 냉난방 등 에너지 공급을 원활히 한다. 단위 공간조직은 물론 지금의 생활공동체를 깨뜨리지 않으면서, 항구적인 거주권을 누릴 수 있도록 입주권 등 열린 운영 체계를 마련한다. 공공부문은 치안 등 최소 개입만 하고, 촌락 운영은 주민자치에 맡긴다. 모름지기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재생사례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그러함에도 여전히 가슴은 아리고 부끄럽기만 하다. 한 언론에 실렸던, 서울역 동자동 쪽방촌에 거주하는 어느 화가의 말을 빌려, 글로 다하지 못한 걸 전하고자 한다.
“쪽방촌에는 쌀도 오고, 반찬도 오고, 빵도 오고, 옷도 옵니다. 회사도 오고, 기관도 오고, 교회도 오고, 정부도 오지요. 목사도 오고, 복지사도 오고, 봉사자도 오십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은 오지 않아요.”

 

 

 

 

글.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