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비평] 개념과 감각, 그리고 건축 2023.8

2023. 8. 18. 17:04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Architecture Criticism Concepts, senses, and architecture

 

 

 

<들안 예술마을 창작소> 전경 © 남궁선

 

먹거리 타운으로 유명한 대구의 들안길에 일명 들안예술마을로 불리는 곳이 있다. 상동과 두산동의 오래된 주거지로서 50여 개의 다양한 공방과 갤러리가 자생적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곳이다. 여기에 수성구의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으로서 노후화된 단독주택과 원룸 건물을 매입해 이를 예술과 문화가 연계되는 공공예술촌으로 개조하고 지역을 활성화하는 사업이 실행되고 있다. 공공예술촌 사업은 대구시 수성구의 핵심 정책으로서 지역의 문화에 대한 정책과 건축사의 공간에 관한 생각을 섬세하게 반영해 공예가와 주민, 그리고 방문자가 자연스럽게 연계되고 창작과 유통이 순환되는, 지속 가능한 문화 소비의 환경을 조성하고자 하는 대표적인 하이퍼로컬(Hyper-local)적 사업이다. 지금은 문화의 생산과 소비가 순환되는 앵커시설이자 지역의 거점이 되는 ‘생각을 담는 공간’ 세 곳을 조성하고 있다. 

들안길 어린이공원의 남서 측 모서리 방향 길 건너에 위치한 이 건물도 본래는 원룸건물이었으나 공공예술촌 사업의 앵커시설이자 ‘생각을 담는 공간’의 하나인 들안예술마을창작소로 조성됐다. 몇 개월 전, 오랜 지인인 빈공대의 믈라덴 야드리치 교수와 이메일을 통해 시실리(Sicily)에서 있을 워크숍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던 중 대구에 설계한 건물이 있으며 이 건물이 곧 완공된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며칠 뒤 찾아간 수성구 들안길의 오래된 주거지 속에서 주변과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건물을 찾았다. 평범한 외관의 파사드는 얼기설기 건물 앞을 가로지르는 전깃줄과 걸쳐있어 주변의 경관과 동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필로티를 채우고 있는 붉은 톤의 오렌지색과 그 밝은 공간이 색다른 감각으로 읽혔다. 환한 느낌을 주는 이 색채는 1층 필로티 공간을 채우고 이내 실내로 들어가 현관을 거쳐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현관 문 측벽에 붙어 있는 ‘생각을 담는 공간-들안예술마을창작소’라는 작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필로티 공간을 채우고 실내로 올라간 붉은 톤의 오렌지색이 궁금했다.


필로티
훗날 이곳을 다시 방문했을 때, 붉은 톤의 오렌지색은 지역의 재생사업을 상징하는 색채이며 필로티의 바닥과 벽뿐만 아니라 천정까지 채우고 있는 이 색의 경계선과 현관 전면의 바닥에 칠해진 빗금 방향이 맞은편 우측에 위치한 들안길 어린이공원을 향하도록 계획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건물의 계단실과 어린이 공원이 연결되는 공적 영역의 축을 설정하고, 필로티를 거쳐 실내 공간으로 공공의 영역을 끌어들이는 개념인 듯했다. 한편 건물의 용도가 주거용에서 근린생활시설로 변경되면서 법정 주차대수가 줄어든 만큼 필로티 내에 여유 공간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었고, 회색과 백색의 중성적 느낌으로 마감된 오렌지색의 바깥 공간과 합쳐진 이 공간이 어린이공원과 연결되는 자리에서 입주 작가, 주민, 방문자들 간의 다양한 사회적 거래(social transaction)를 지원하는 장소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한정된 크기의 필로티 공간임에도 감각적 밀도의 변화로 다양한 장치의 배치와 유연한 장소성이 기대되는 곳이 만들어진 셈이다. 붉은 톤 오렌지색의 환한 기운은 낮은 천정의 필로티 공간을 감각적으로 확장시키는 효과를 주어, 표면의 질감을 드러내지 않으며 단숨에 상부 매스의 양감을 덜어내고 부유하는 느낌을 준다. 덕분에 사용자들은 이 좁은 공간에서 긴장은 증가되나 압박은 감소되는 유쾌한 경험을 하게 된다. 색채에서 발현될 수 있는 감각적인 효과이다. 필로티를 채운 붉은 톤의 오렌지색은 현관과 계단을 거쳐 내부 공간으로 이어진다.

공간
계단실 벽을 타고 실내로 들어온 붉은 톤의 오렌지색은 2~3층의 바닥과 연결된다. 실내 공간에서도 색채의 효과는 여전히 감각적이다. 전 층의 바닥과 가장자리 벽체의 징두리 부분은 주변의 주택들이 흔히 외장재로 사용하는 붉은 벽돌로 마감되어 실내로 들어온 붉은 톤 오렌지색 영역으로부터 공공의 감각을 이어 받는다. 징두리 상부는 기존의 벽체를 노출 처리하여 징두리의 붉은 벽돌과 함께 경관적으로 구조화된 면을 형성했다. 여기서 면은 실내·외를 구분 짓는 물리적 장치이기보다 개방된 여백으로서 경관의 배경이 된다. 안쪽에 정연하게 배치된 노출 콘크리트 벽과 계단에 인접한 붉은 벽돌로 마감된 벽들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다양한 공간의 깊이를 감지하게 한다. 이로써 따뜻한 색감으로 확장된 수평적 공간에서 내부인 듯 외부화된 공공장소들의 다양한 구조가 감지되는 즐거움이 있다. 한편, 공간을 보면 벽들은 서 있으나 벽들의 사이가 열려있어 많은 장소들이 상호 연결되는 흐름으로 이어지며, 연속적으로 순환하는 계단실 앞의 통로 가운데 전 층을 수직으로 관통하는 작은 홀(hole)을 뚫어 수직적으로 소통하는 공간관계를 만들었다. 이로써 수직과 수평으로 순환하는 가변적이고 중층적인 공간관계가 구축됐고, 작가와 방문자들 간의 빈번한 관계들을 생산할 수 있는 입체적인 공간구조가 만들어졌다. 비록 한정된 공간규모이나 유동적이고 유연한 장소들의 관계 속에서 작가와 작가, 작가와 방문자들 간의 다양한 거래와 사건들을 기대하게 된다. 이러한 공간구조는 4층까지 연결된다. 

디테일
3층에서 4층을 연결하는 계단은 기존의 콘크리트 노출 마감으로 붉은 톤 오렌지색이 숨 고르기를 한다. 4층의 벽과 바닥 마감은 아래층과 같으나 천정이 감춰져 있다. 물론 조명의 효과이겠지만 머리 위 공간의 경계가 감지되지 않으니 하늘 아래의 외부공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필로티에서부터 연결되어온 붉은 톤 오렌지색의, 외부화된 공공의 공간이 맨 위층에 이르러 천정마저 감각적으로 소거된 감각적인 건축으로 완성된다. 이제야 평범해 보였던 건물의 전면이 두꺼운 철망형 알루미늄 메시(Expanded aluminum mesh)의 틈 사이로 투영된다. 그러면서 중성화되어 주변과 동화된 파사드가 떠오른다. 중성화된 벽과 천정이 내부 공간의 공간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공공 예술 활동을 담는 외부화된 감각적 장소를 생산하는 마지막 퍼즐이 되었다. 또한 건물 내·외부의 다양한 부분에서 섬세한 마감의 흔적이 보인다. 공간 내부의 수직 홀을 둘러싼 철재 난간의 절제된 디자인과 기존의 표면을 최소한의 마감으로 노출한 천정, 또 벽의 섬세한 디테일이 무거운 힘을 덜어낸 실내 공간과 무심한 듯 잘 어울리며 노출된 각종 설비의 마감과 가구의 감각도 간결하다. 믈라덴 야드리치 교수의 JA 팀과 윤근주 건축사의 일구구공 팀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치열하게 고민하고 디테일까지 설계한 결과인 듯하다.

이 건물은 지역의 공예가와 주민, 방문자 간의 생산적 순환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담는 시설로서, 필로티 공간에는 지역연계 활동을 위한 주민 공유마당을 배치했다. 2층에는 작업스튜디오와 함께 라운지와 식당 등의 공유공간을, 3층에는 작업스튜디오 공간을 두었으며, 4층은 포토스튜디오와 커뮤니티 주방 등 입주 작가 공유공간들을 배치했다. 실내의 모든 공간과 장소들은 순환 통로를 따라 열려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스튜디오는 작가의 개인적 공간인 동시에 방문자에게 열려있는 소통의 공간이다. 이러한 환경이 익숙하지 않은 일부 작가에게는 긴장의 공간이 될 수도 있으나, 내부적으로는 중앙의 수직 홀에 의해 층간의 공간들이 서로 연결돼 있어 전체의 분위기가 동시에 공감되는 역동성이 있으며 외부적으로는 주거지 내에 들어선 공공시설로서 인접한 사적 공간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창밖을 알루미늄 메시로 덮고 시선을 걸러주는 배려도 있다. 이처럼 이 건물이 담고 있는 내부인 듯 외부화된 장소성과 입체적으로 소통하는 가변적이고 중층적인 공간구조 그리고 섬세한 디테일과 주변을 위한 배려에서 지역의 예술문화를 위한 공공건축의 매력을 읽어 볼 수 있다.

 

 

 

 

글. 이인희 Lee, Inhee 부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이인희 교수·부산대학교 건축학과

 

1959년 상주출생으로, 부산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서 부산국제건축제의 커미셔너를 역임했다. 현재 교육부의 한중일 복수학위 프로그램인 CAMPUS_Asia(부산대건축학)의 사업단장을 맡고 있다. 중국 동제대학교와 오스트리아 빈공대의 객원교수를 지냈으며, 다양한 국제관계를 기반으로 지역의 국제화를 위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해 오고 있다. 

samlih@pusa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