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건축사로서의 첫 일 년 2024.2

2024. 3. 8. 09:35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The first year as a representative architect 

 

 

 

미국에서 건축대학원을 졸업하고 건축 실무를 시작한 지 8년쯤 되었을 즈음에 독립을 꿈꾸게 되었고, 공모전 당선으로 한국에 돌아와 대표 건축사로서 한국에서의 첫 사회생활과 건축 실무를 동시에 시작하게 되었다. 독립한 지 몇 해가 흘렀지만 건물을 설계하고 시공하는 일은 매번 어렵고, 여전히 대표 건축사라는 직책과 책임은 무겁다. 학교를 졸업하고 실무 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들은 참 다양하지만, 한국에서 독립한 후 첫 일 년간 경험한 일들은 아직까지 쉽게 잊히지 않는다. 



Episode 01
지방의 한 중소기업 회장님과 첫 미팅을 하게 되었다. 준비해 간 디자인 기획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회장님이 농담처럼 던진 첫마디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면 그 지방으로 시집을 와야겠다는 이야기였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내가 결혼을 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회장님은 왜 회사의 남자들을 두고 가정주부가 내려오냐는 이야기를 하셨고, 유독 나에게만 아이가 있는지 물으신 후 아이를 낳지 않고 있음을 걱정하셨다. 

미국에서 실무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영어가 완벽하지 않은 나이 어린 동양인 건축사였기 때문에, 한국에 돌아오면 이런 핸디캡이 사라져 더 자유로워질 거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여성 건축사이기에 겪어야 하는 또 다른 일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아직도 한국에서는 많은 현장에서 여성 건축사는 명함을 내밀기 전까지 대표 건축사로 인식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회장님의 이야기는 어쩌면 친근감을 표현하기 위해 던진 농담으로도 생각될 수 있겠지만, 현장에서 건축사이기보다 가정주부의 역할에 충실하지 않은 여성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게 씁쓸했다. 



Episode 02
내가 처음 담당했던 공공프로젝트는 리노베이션의 특성상 1층에 위치한 시설과 주요 수직 동선의 분리가 불가능했다. 다수를 위한 공공프로젝트인 만큼 부서 간의 이해를 통해 공간을 이용하길 바라며 최적의 대안을 마련해 갔지만, 1층을 담당하던 부서와 다른 부서들 간의 이해관계를 좁히지 못했다. 회의에 참여한 각 부서들은 입구를 분리해 독립된 굴다리를 만들거나 주요 입구를 뒤쪽 부출입구로 변경하자는 등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내기 시작했고, 우리는 이 아이디어들이 왜 현실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운지 설득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시민들을 위해 비워둔 유연한 야외공간은 쓸모없는 공간으로 취급되어버렸고, 공간감과 건축적 개념을 위해 디자인된 공간들은 예산을 이유로 가장 먼저 삭제되었다. 

미국에서도 몇 개의 공공프로젝트를 진행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공공프로젝트가 아주 어렵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공기관과 설계를 진행하며 디자인을 조율해 가는 과정에서 건축사의 역할과 위치는 미국과는 조금 달랐다. 공사 일정, 예산, 그리고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을 위한 기능을 충족시키며 설계를 해야 하는 게 건축사의 역할이지만, 여전히 좋은 공간감, 디자인에 대한 가치는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이를 위한 설득은 여러 면에서 어렵다. 설계를 진행해 나가는 단계에 건축사가 리더가 되어 프로젝트를 이끌어 나가는 미국의 공공프로젝트와는 달리, 한국의 공공프로젝트에서 나같이 어린 건축사는 디자인을 위한 목소리를 거의 낼 수 없는 용역업체에 가깝다는 것을 느꼈다.



Episode 03
한 현장에서 허가가 막 끝났을 즈음, 실시도서가 납품되지 않은 상태에서 토목작업을 시작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직영공사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건축주가 한시라도 프로젝트를 끝내고 싶어 현장을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장에 가서 확인해 보니 건물의 기초작업은 계획안보다 1미터 높게 설정되어 진행되고 있었고, 현장소장은 우수의 침투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결정은 건축사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뤄졌다. 이렇게 저렇게 설득을 하고 설계 의도를 전달해서 재시공이 결정되었지만, 재시공이 이루어지기까지 과정은 예상하지 못한 싸움과 설득이 가득한 수고스러운 과정이었다. 

건축 프로젝트에서 도면은 성경과 같은 존재라고 배웠다. 도면 내용에 대해 건축사가 책임을 져야 하고, 시공에 이상이 있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모든 것의 기준은 도면에 따라 결정되기에 도면을 제대로 작성하고 도면대로 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하지만 도면을 그려도 제대로 보지 않는 시공현장에서 건축사의 의도가 제대로 구현되는 프로젝트를 만들어내는 것은 지금도 쉽지 않다. 
독립한 지 4년 차가 되어가는 요즘 나는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고, 화도 내지 않으며, 타협할 줄 아는 건축사가 되어있는 듯하다. 첫해에 쌓여가던 에피소드들이 이제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걸 보면, 한국 건축 생태계에 점점 적응해 나가고 있는 걸지도, 혹은 이전에 겪었던 일들이 건축사로서 부족한 나의 경험과 실력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글. 최수희 Choi, Soohee 콜라브웍스 건축사사무소

 

최수희 건축사 · 콜라브웍스 건축사사무소

 

한양대학교 건축학과와 미시간대학교 건축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뉴욕의 Ten to One, Andrew Berman Architect 사무실에서 건축, 인테리어, 전시 등의 다양한 실무 경력을 쌓았다. 정초이웍스의 공동대표로 기존 도시, 건축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다양한 건축 작업을 진행했으며, 현재는 콜라브웍스를 공동으로 이끌며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협업을 바탕으로 건축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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