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경사로 그리고 저소음 구역 2024.3

2024. 3. 31. 09:30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Stairs, ramps and low noise areas

 

 

 

 

 

“내 건물에 장애인이 들어올 일은 없는데 왜 장애인 경사로를 설치해야 합니까?”
건축 설계 일을 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상황을 겪으며 좋든 나쁘든 인상적인 기억들이 생기기 마련인데, 저 말을 듣던 날의 놀라움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당시 건축주는 허가를 진행하며 관련 부서들과 협의하는 단계에서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로 건물 입구의 단차를 경사로로 바꿔야 하는 일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멈칫했지만, 지어질 건물이 관련 법률에 의해 장애인 등의 편의시설 설치 대상인 ‘공공건물 및 공중이용시설’에 해당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건축주는 이유를 듣고 난 후에도 자신의 건물에 공공이니 공중이니 하는 말이 왜 붙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지만, 경사로를 설치하지 않으면 허가가 불가하다 하니 최소한의 변경으로 이 일을 마무리 짓기로 하고 대화를 마쳤다. 결국 편리하게 쓰일지는 의문스러운, 조금은 궁색한 경사로를 덧붙인 채 허가는 완료되었다.

오래전이지만 지금도 가끔 그때의 놀라움을 곱씹어 보는 이유는 건축주가 ‘공공건물 및 공중이용시설’이라는 용어를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건축물이라는 뜻이 아니라 ‘공공건축’의 의미로 잘못 받아들였기 때문도 아니고, 장애인 편의시설을 일상생활에서 이동, 시설 이용 및 정보 접근 등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 ‘모두’를 위한 시설이 아니라 ‘장애인’만을 위한 시설이라 오해한 것 때문도 아니다. 정말 놀랐던 건 정도의 다름이 있었을 뿐이지 나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때 허가를 진행하던 건물은 임대하는 공간 없이 전체를 건축주가 운영하는 사업의 사옥과 주거 용도로만 쓸 예정이라 제한된 사람들만 오가는 것을 전제로 계획된 공간이었다. 에너지절약계획서를 작성해 허가해야 하는 규모의 프로젝트가 처음인 저연차 실무자였던 나는 당장 해야 하는 일들만으로도 힘에 부치는데 또 수정할 부분이 생겼다는 것에 낙담하며 ‘관계자들만 쓸 건물인데 편의시설이 필요한 불특정의 사람들이 이용할 일은 없지 않나?’라고 약간은 불평스럽게 생각해 버린 차였다. 그래도 기준에 맞게 변경해야 하는 일이니 건축주에게 확인하고 진행하려 내용을 전달했고, 돌아온 건 “내 건물에 장애인이 들어올 일은 없는데 왜 장애인 경사로를 설치해야 합니까?”라는 말이었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행동은 의외로 강력한 힘이 있어서, 나도 생각했던 내용이지만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발화되고 나니 정말이지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사적으로 전유되는 건물이라 하더라도 주변 환경 없이 홀로 지어질 수 없는 건데, 존재하되 그 스스로가 환경이 되는 것은 거부하겠다는 점에서 말이다.

대단한 전환점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덕분에 약간의 경각심이 생겨 어떤 장소에 처음 방문하거나 새로운 것을 볼 때 물리적으로써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의미를 포함하여 여러 경계가 만드는 턱을 유심히 보는 편이다. 그런데 얼마 전 <웰컴 투 렉섬>이라는 축구 다큐멘터리를 보고 그런 시선 또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웰컴 투 렉섬>은 축구에 무지한 할리우드 스타 라이언 레이놀즈와 롭 매킬헤니가 영국 웨일즈 동남부의 렉섬이라는 도시의 아주 오래된 축구클럽을 인수하여, 팀이 속해있던 프로축구 최하위 리그에서 상위리그로 승급하기 위한 여정을 담은 시리즈다. 재미있는 점은 축구클럽의 구성원과 축구장, 시설 등 그 내부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클럽과 지역사회의 상호 관계, 운영하는 직원들과 서포터들의 다양한 삶, 지역공동체의 역사, 가족의 일원이자 사회 구성원으로서 축구 선수의 모습 등 리그 순위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을 각기 에피소드의 주제에 맞게 집중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시리즈가 끝날 무렵에는 이 모든 내용들이 서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어느 하나를 떼어놓고는 렉섬의 성과를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소재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 시청이 끝난 후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건 ‘저소음 구역’이라는 제목의 에피소드다. 이야기는 자폐스펙트럼에 속해있는 서포터 밀리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밀리는 어렸을 때 장애인 축구를 시작했고 렉섬의 여자축구팀에서 뛰었으며, 지금은 구장의 저소음 구역에서 시즌권으로 경기를 챙겨보며 팀을 응원하는 열혈 서포터다. 자폐스펙트럼과 저소음 구역에 관한 내용을 SNS에 공유하고 선수들, 그리고 구장 직원들과 연대감을 느끼며 구성원으로서 자신만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경기장의 휠체어석은 알고 있지만, 저소음 구역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구단의 사이트에 들어가 봤다. 저소음 구역은 자폐스펙트럼 장애처럼 소리나 빛 등 감각적 자극에 민감한 관중들이 이용하는 자리인데, 귀 보호장치라든지 전용 화장실, 안정이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는 공간 등과 함께 제공되는 것이었다. 물론 구장에는 휠체어 사용자를 위한 관중석 공간도 있었고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 표시와 오디오 해설 서비스, 청각 장애인이나 난청인이 이용할 수 있는 히어링 루프도 있었다. 또한 치매 친화적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고대비의 색상으로 칠한 화장실과 미끄럼 방지 처리가 된 노란색의 계단 등을 제공한다고 소개되어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낮아지는 경계들이 있다니 놀라울 뿐이었고 내가 경험하고 감각했던 공간들은 어떠했는지, 잘 알지 못해 보지 못하고 지나친 건 없었는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건축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지만, 건축을 하는 입장으로선 어떤 고민들을 해봐야 하는지도 말이다.
일이 많고 힘들다는 핑계로 계단을 경사로로 수정하는 걸 불평했던 그때의 나는 이제 규모는 작지만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일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되었다. 여러 공모전에 지원해 지어질 확률이 적은 계획안을 작성하며 관성적으로 해결하려고만 한 일은 없었는지, 그때처럼 궁색하게 덧붙인 것은 없었는지 생각해 본다. 축구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예전 건축주와의 일을 떠올리고 조금 더 생각이 깊어졌듯이, 언뜻 보기엔 상관없어 보이는 일들이 연결되어 좋든 나쁘든 인상적인 기억들이 계속 갱신되면 언젠가 하고 있는 일도 덧붙인 게 아니라 원래 그러하듯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 많은 일들을 지나 시리즈의 끝에 렉섬이 결국 상부리그로 승격했듯이 말이다.

 

 

 

 

 

글. 임서연  Lim, Seoyeon 오운 건축사사무소

 

임서연 건축사 · 오운 건축사사무소

 

한양대학교 건축학부를 졸업하고 디아건축사사무소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2020년부터 오운건축사사무소를 개소해 운영하고 있다.

office@oownarchitectur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