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코니가 바라본 세상_아파트, 우리는 발코니에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2024.2

2024. 3. 8. 09:25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The world seen from the balcony Apartment, how do we see the world from our balcony

 

 

 

 

1. 향수鄕愁


도시 한쪽에 지어진 아파트 한편 발코니에 앉아있다. 좀 비좁아도 자생란 몇 분 키우면서 계절도 느끼고 식물의 생명력을 발견한다. 다행히 동쪽으로 트인 공간이어서 여름에는 일사 조절을, 겨울에는 거실에 제법 습도 공급을 해주었음에 고맙게 생각한다. 아내의 알레르기가 없었으면 잉꼬 한 쌍이 이곳에서 자자손손 번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발아래를 내려다보면, 길 건너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은 내게 너무 익숙해 소음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새벽부터 일꾼개미들이 먹이를 찾아 콘크리트 정글을 부산하게 서울로 향한다. 마주하는 인접한 아파트 외벽은 이미 빛바래 익숙한 액자가 되었다. 남쪽을 향해 마주하는 아파트 동들 사이로, 조금이나마 가을 냄새를 느낄 수 있는 단풍나무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안에 가로등이 켜질 무렵 종종 주차장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릴 때 즈음 퇴근한다. 서울을 향한 큰 도로 사이 가로등은 사람 없는 보행로와 도로 표지판만 비추고 있다. 그 너머 골목길 사이에는 화려하지만 지저분한 상점 간판들이 널브러져 있고, 교회의 첨탑 위 십자가를 꽤나 볼 수 있다. 지금은 경기둔화로 공사하는 현장은 볼 수 없어 다행일까. 
주거형 오피스텔에 가로막혀 사랑하는 딸이 자랑하고 마음껏 누리던 환상적인 서쪽 산 노을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마음에 갑자기 아쉽다 못해 슬퍼진다. IMF를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던 우리 가족에게 노을은 등불이었고 등대였다. 좁지만 누울 수 있는 집 한 채. 코앞의 발코니는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여가 공간이었고, 산 너머 거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기품 있는 노을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았다. 생각해 보면 딸이 이 작은 공간에서 건강한 정신을 키우며 잘 자라주었다는 것에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오래전 서로를 의지하기 위해 마을이 형성되었다. 어디는 촌 동네 부락部落’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어디는 달동네, 숨돌리기 힘든 깔딱고개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약속은 없어도 사람들은 자연스레 모였다. 어느 틈에 진흙탕 마당에는 아스팔트가 깔리고 골목길 툇마루 위에서 정을 나누며 때로는 자식 자랑 주정뱅이 남편 험담하는 아주머니들이 모여 골목을 장악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 그 동네엔 교회가 지어지고 정체성 없는 ‘고야슬레브mansard roof’ 3·4층 다가구가 스멀스멀 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병원도 생겨났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묻힌 양지쪽에 햇볕 쬐는 노인들이 앉아있다. 자투리 마당 옆 2층 양옥 발코니에 나온 아주머니는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나눈다. 엄마가 발코니에서 빨래 너는 모습을 보고 아이가 큰 소리로 “엄마”를 부르며 집으로 뛰어들어간다. 종가宗家 앞마당과 비교할 수 없는 비좁은 동네 놀이터지만, 아이들은 어두울 때까지 전투적으로 놀다가 어느 틈에 마치 연극이 끝난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미 구멍가게에서 취해 비틀거리며 집을 향하는 노인을 옆집 손녀가 부축한다. 지금 생각하면 알뜰살뜰 살아온 주부들이 일궈낸 순박한 가족사를 바라볼 수 있었던 그 시절. 불과 35년 전 내가 자취하던 어느 동네의 모습이다.

 

 


2 근원根源
한국인에게 건축은 반세기가 넘는 동안 화려했다. 건축은 국가를 재건하고 경제성장에 맞는 도시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었다. 당연히 찬사를 받아 마땅하지만, 선과 악을 넘나들면서 한마디로 건축은 황금알 낳는 거위와 같았다. 세상의 변화는 때맞춰 한국을 도왔다. 중동 건설 붐은 국가와 가정에 기초를 다지는 기회를 주었으며, 주부들에게 투자에 대한 비전을 알게 해주었다. 한마디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다. 덕분에 자녀들을 먹일 수 있었고, 대학까지 공부시킬 수 있는 ‘강남 8학군’이 완전히 정착되어 대치동과 목동에 학원이 기업화되면서 아파트와 함께 천지개벽의 시대를 맞이한다.
건국 후 국토개발은 시대적 배경에 따라 방법이 조금씩 변화했지만, 소위 따불빽이라 불린 가방 하나 메고 농촌에서 상경하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는 서울 구도심의 형편에 영동(영등포 동쪽), 즉 강남 개발이 차선책으로 계획되었다. 이즘 미국의 모더니즘은 지역주의적 한국판 모더니즘(modernism 또는 근대주의)으로 강남에서 싹트게 되는 계기가 된다. 정치적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새로운 돌파구로 보는 것이 타당할 수도 있겠다. 
예컨대 강남 개발은 국가와 사회 간의 빅딜big deal이었고, 그에 파급된 개발로 다양한 산업 분야가 생성되었다. 이런 폭발적인 격동의 변화는 두 번째 대 변화인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으로 궤도를 수정했다. 그러다 ‘파시즘’ 정권 시절 프로야구 구단이 등장하면서 모더니즘 시대는 서서히 본질을 잃게 된다. 그 후 포스트모더니즘은 자본주의와 타협하게 된다.
지금 건축은 눈총 거리가 되었다. 요즘은 잠재력 있는 인기 전공도 아닐뿐더러 부정적인 인식이 적지 않다. 특히 건축사는 정치적으로 부동산 경기에 휩쓸리거나 힘 있는 자들에게, 특히 도급순위가 좋은 건설사를 비롯한 비전공 건축업자들과 기업중개사들에게 조력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해 있기도 하다. 세간에는 건축사가 너무 많다는 하소연이 이미 오래되었고, 건축사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설계시장의 현실을 마주하면서 표현하기 힘든 절망 같은 좌절을 공감하고 있다.

 



3. 회자回刺
신작로新作路 사거리가 뚫리고 네 모퉁이 여덟 개 신호등이 켜지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혹시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세월은 순식간에 달음질하는지라 때로는 마라톤 같기도 하지만, 때로는 치열하게 달려가야 하는 경주와 같아서 세월은 인생을 엎고 뛴다는 말이 옳은 것 같다. ‘잘 살면 육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는 사람의 수명은, 그 잘난 아파트 수명과는 너무나 반비례한다. 순간순간 바뀌는 것이 사람 마음 아니던가. 지난날 무심코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어느 날 기억나게 되면 몹시 부끄러울 때가 있다. 도시의 흔적도 사람과 같지 않을까? 그러나 아직 까지는 신작로가 생기기 전 그때 모습들을 생각하면, 아름답고 애처롭고 그리운 여운으로 남게 될 것 같다. 그러나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다 바뀌어버렸다. 도시가 모든 것을 다 먹어버렸다.

사회구조는 이미 자본 하나로 모든 분야를 잠식한 상황이 되었다. 식탐과도 같은 자본주의의 맛을 본 이상 절대로 뒤로 되돌아갈 수 없거니와 포기할 수도 없다고 확신한다. 게다가 약간의 힘(학연. 지연. 명성)이 있다면 살기 좋은 사회라고 스스로 자칭하지 않던가. 그들이 걷는 신작로 그 길은 힘 있는 자들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통로일 수도 있다. 그래서 ‘신작로는 자본주의의 상징이며 한국 근·현대사의 얼굴’인 것이다. 모든 인프라는 자동차를 통해 소통한다. 자동차가 주인이 되어버린 도시! 순식간에 지역주의와 이기주의로 돌변한 마을과 그 마을의 경계를 보면 죽은 도시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지만 우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한다. 왜? 우리 단지 집값은, 절대 떨어지면 안 되니까!
복과 덕을 사고 판다는 복덕방. 어르신들의 소일거리 직업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이 순간에도 기업으로 탈색된 공인중개사는 끊임없이 수요와 공급을 부추긴다. 지난날 개발과 건설에 너그러이 관용과 아량으로 자비를 베풀던 국가 정책들을 그리워하며, 누군가는 지금 우리 마음속에 가만히 자리하고 있는 ‘자본주의 욕망과 쾌락’에서 비롯된 제2의 ‘강남 불패’를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불행하게도 ‘각자도생’이라는 신종 언어에 서민들과 청년들, 여성들에게 민생고의 아픔을 안겨주고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우리는 전 국토의 70%에 육박하는 ‘아파트 공화국’을 기필코 이룩했다. 어느 날 내 휴대폰 앨범에 있는 예쁜 자식들, Z세대들을 보니 고향이 아파트가 되었다. 오직 ‘우리 단지’, ‘우리 학군’, ‘우리만의 집단’으로 정착되었다. 성, 캐슬Castle이 되어버린 아파트! 흔한 농담으로 아파트 출입이 평택 미군 기지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는 브랜드 아파트 단지라는 말이 있으니 말이다. 아파트는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아파트는 짓는 사람 마음을 닮아간다. 사는 사람도, 다시 되파는 사람도 아파트를 닮아간다. 지난해 친구의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4억으로 장만한 브랜드 아파트가 17억으로 올랐단다. 그런데 최근 2억이 떨어져 15억이 되어 가슴이 아파 소주 한잔 마셨단다! 그날 나는 강도 높은 인내를 시험할 수밖에 없었다.

 

 


4. 빛나는 도시Shining city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빛나는 도시(1922)』에서 밝힌 계획적 이상은, “주거와 상업, 레크레이션과 운송의 기능을 분리하고, 도시 거주자의 즐거움을 위해 넓다란 녹색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국의 도시계획가 “에버너저 하워드Ebenezer Howard의 ‘전원도시(1989)’의 근본적인 계획 의도는, ‘유토피아적 도시’를 건설하는 계획을 구상하였다.” 또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는 브로드 에이커 시티Broadacre City를 계획했고, 그의 원대한 계획적 의도는 “저소득 근로자들이 자유로운 주거 환경에서 가족과 함께 산다면 더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을 희망했다. 즉 “자유와 민주주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질 것으로 믿었지만, 미국의 개인주의에 밀려 안타깝게도 ‘교외건축’의 사상적 뿌리로 이관되었다.”

 

<사진 1> 맨해튼 주변과 인근 대규모 블록(맨해튼과 주변 마천루가 건축된 필지. 초고층 오피스, 주상복합, 건축물 중심으로 건축). ©Google Earth 위성지도
<사진 2> 강남 테헤란로 주변과 인근 작은 블록(강남 테헤란로 주변에 건축된 고층건물 필지.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건축). ©네이버지도 위성사진
<사진 3> 맨해튼과 주변 마천루 건축 현황. ©Google Earth 위성지도
<사진 4> 강남 테헤란로 주변 고층건물 건축 현황(역삼동-선릉). ©네이버지도 위성사진


한편 뉴욕의 격자 도로망은 1881년 ‘맨해튼 그리드 계획’으로 완성한다. 어느 날 한국도 도시계획 설계를 추진 중에 거장들의 근대 도시계획을 반영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것을 만들기에는 거리가 먼 실효 없는 계획이 마치 위대한 도시계획인 양 조용히 우리 신도시와 개발 지역에 이입해 응용되었다.
맨해튼과 ‘강남 개발’의 차이점이 있다면 블록의 크기가 절대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맨해튼’은 초고층 마천루들이 즐비하지만, 한국은 마천루의 한계를 일찍이 알고 있었다. 이미 세계적 스타 도시에 진입한 서울이지만, 고민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님을 비전문가들도 익히 알고 있었으며, 어느 도시가 크고 작다는 식의 규모는 일단 접어두고, 한국의 블록은 “‘맨해튼’ 블록에 비해 10배나 작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그러니 건축 규모를 비교<사진 1~4>해 보면 짐작할 수 있을뿐더러, 특히 도시 인프라의 다양성과 기반 시설의 안전성 차이를 추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판단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오늘의 강남은 지하주차장도, 녹지공간도, 또 부실공사에 따른 재건축 예정 건물 등까지 도시의 순환체계에 애물단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이는 한국 도시의 대표적인 비교 사례일 수도 있겠다. 앞으로 강남을 비롯한 제1기·2기·3기 신도시들도 강남과 같은 입장에 처할 수도 있다. 어쨌든 한국의 1기 신도시(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1989년 시작)에 이식한 가짜 ‘하워드형 도시계획’은 1983년 전후 시작한 강남 개발에 뒤늦은 영향을 주었고 파시즘 정권의 화려한 치적이 되었다. 더욱이 블록화 기법을 변형해 땅을 잘게 조각내야 땅따먹기에 도움이 되니, 말하지 않아도 호박이 넝쿨째 굴렀을 것이다. 안쓰럽게도 이러한 개발에 대한 기법은 지방 대도시로 급속히 전이되어 갔다.

한국 현대사에서 지금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L.H 공사를 중심으로 도시계획과 개발을 주도하면서, 민간 건설사의 성장은 아마 인류사에 기록에 남을 정도로 ‘공룡그룹’으로 빠르게 비대해진다. 그러나 그 안에 국가의 불균형 성장은 지금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 되었다. 자칫 잘못하면 다음 세대가 뒷정리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말할 수 없는 악조건들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지난 세월 승승장구하는 꿀맛 같았던 부동산 돈벌이 맛을 본 사람이라면, 지금도 누군가는 대박을 꿈꾸며 그 로망을 갖고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나일 수도 있고 혹 내 친구의 아내일지도 모른다.

최근 한 가지를 다시 확인했다. 비록 이것이 물리적이든 자연적이든, 분명한 것은 “사람이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사람을 만든다”는 정론이다. 건축학에서 아름다운 공식을 다시 확인했단 뜻이다.
드넓은 한밭 벌 옆 세종 신도시 한복판을 여행하면서 도시 전체가 새 옷을 입고 서 있는 고층 아파트들이 내 눈에는 마치 감정 없는 돌덩어리로 보이는 것은 왜일까? 밀레니엄 신도시! 발코니 없는 이 거대 신도시는 모두가 새것이다. 모든 것이 처음이다. 그리고 이 도시의 사람들은 새로이 이식되었다. 그러나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여기의 아파트들도 모두가 그리운 남쪽을 향하고 있다. 전 국토의 남향화南向化를 꿈꾸며 당당히 밤하늘에 서 있다. 펜트하우스 위 페디먼트Pediment에 브랜드 로고가 화려하게 자신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왕관을 쓴 것처럼.

 

Vincent van Gogh(Self-portrait)



여기의 아파트는 대화할 수도 없다. 마주 볼 수도 없다. 발 내 벗을 공간도 없다. 쉬는 날 마주 앉아 계절을 만나는 여가餘暇 시간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다. 젊은 장승같이 서 있는 밋밋한 아파트 정면에, 무채색 창틀 사이로 노을이 반사되면 거실에 등이 켜질 뿐, 좁아진 거실 창에 비치는 실루엣Silhouette은 주인장 자신의 번뇌를 대변하는 듯하다. 어쩌면 우리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삶과 일치할 수도 있겠다.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하면, 자식들 학군을 생각하면. 열어서는 안 되는 비밀의 거실 창에 서서 진짜 자신을 품고 있는 공간은 내팽개치고. 무언가를 위하여 내일을 향하여 자신의 현실을 그려나간다. 마치 고흐Vincent van Gogh의 자화상처럼.

 



5. 품격品格을 맡기다
‘과학은 건축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했던가. 언덕 위에 하얀 집도 있지만, 인간의 탐욕貪慾과 교만驕慢을 보여주는 거대 건축물들을 비롯해 욕망慾望을 드러낸 과학적 건축물도 무수히 많다. 자신의 권위와 신분을 대변하는 그런 집들 말이다. 건축은 인생을 닮아서 사회적이자, 삶과 죽음의 표상表相 이기도 하며, 곳곳에 모순이 도사리고 있어서 때로는 영혼靈魂과 육신을 잔인하게 망가트리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건축은 사람에게 매우 정직하다.

세상이라는 지구환경의 순환체계를 바라보면, 인간사에 가장 저주받은 용어인 ‘진화론’이라는 말이 오히려 무색할 정도로, 매우 정교精巧하고 정밀精密한 상황으로 운행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안에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지식으로 끝까지 뭔가를 찾아 극복하려고 도전한다, 그래서 현대건축도 자신의 방법대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생각해 보면 현대건축은 희극과 비극을 넘나들며 미래를 꿈꾸는 ‘아키토피아Architopia’를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다.

어느 날 ‘인류세人類世’ 라는 용어가 세상에 등장했다. 그래서일까 의문이 생겼다. 사람들은 세상에 도움이 안 되는가 보다! 그럼 나는 최소한 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일까?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존엄과 사는 의미를 심각하게 고민하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와 동정은 무심히 보는 것이 지배적이라 하겠다. 나 살기도 벅찬 세상이니 말이다. 어쩌면 개인의 인권을 무시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건축은 분명히 ‘돈 되는 아파트’다. 우리끼리(비슷한 수준의…) 사는 ‘우리만의 아파트’다. 속된 말로 ‘브랜드 아파트’에 국민들은 몰빵하고 있다. 신도시·아파트 가격·재건축·도시 정비 등 전문용어가 귀에 들리면 솔깃해한다. 황혼기 어른도 M·Z세대도 온통 아파트에 울고 웃는다. 3포 세대도 영끌 족도, 아파트를 향한 관심으로 살아간다. 이 순간도 동시대 연장선에서 산다는 사람들은 과시욕의 표출을 아파트로 보여준다고 단언한다. 얼마나 로망이 강했으면, 어느 동네의 30년 된 삼성아파트 이름을 래미안 브랜드로 개명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아파트는 자신들을 드러내는 표상이 되었다. 자신에 대한 관점을 고급 아파트로 대신하려는 보상심리 상태는 아닐까 조심스레 꼬집는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인격과 품격을 아파트화”하는 한국 사회의 단면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전세 사기로 인생이 망가진 젊은이들은 누가 책임지는가? 매일 휴대폰으로 파격 세일 분양 광고 메시지는 누가 보내는가? 그 집은 누가 사 주는가? 2023년 12월 중순인 현재 305곳 건설사 건설업면허증을 국토부에 반납했고, 은행과 건설사들 ‘PF’ 합계가 22조 8천억 원이나 되며, 지방에는 미분양 관계로 죽는다고 하소연이 나오고 있고, 조만간 건설사가 죽는다고 방송에 대서특필하게 되면 누군가 도와줄 것이고, 지난 몇 년 전 그때처럼 또 건설사는 기사회생할 것이다. 이 또한 관행처럼! 

 

 


6. 혼돈混沌
사회 전반에 화장실 냄새를 풍기는 부조리한 행태의 원인은, 건국 이래 잘못된 교육제도에 의한 영향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회적 문제는 진정한 민주사회로 나아가지 못하는 족쇄이며, 최근 교사들의 안타까운 죽음과 같은 현실을 보게 될 때, 이루지 못한 교육 민주화, 사회 민주화에 대한 현실을 갈망하게 된다. 솔직히 이런 일련의 잘못된 아픔들을 타파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쉬운 말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본다. 사람들에게 ‘민주주의 본질’을 아는지, 사회의 구성을 유지하기 위해 올바른 소통疏通이 무엇인지 아는지 되묻고 싶다. 결국 승자독식주의는 자본주의까지 이겨버렸다. 한국 사회에서 힘은 자본도 이성理性도 이기는 수단이 되었으니 말이다.

한편 교육과 경제, 정치에 숨어든 집단이기주의集團利己主義와 개인주의個人主義는 경계를 나누고, 이념까지 나누며 스스로 자신들을 묶어버렸다. 이젠 회복할 수 없는 빈부의 격차로 ‘비대칭 도시화’에 따라 인간의 존엄까지 퇴보시켰다. 아직도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산술이 성립되고 관습법까지 전이轉移시키는 한국사회다. 이것들은 불명예 기록경신의 산물이며, 그 앞에 브랜드 아파트가 당당히 서 있다는 뜻이다. 경제 상위 2%의 국민만 빼고 다수의 삶은 혹독한 고난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더욱이 다가올 미래는 새로운 종種들의 출현과, AI를 이용한 통제에 휩싸일 것이다. 원자재를 수입해 되팔아 먹고살던 나라가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린 개구리가 되었다. 1차 산업인 농업의 3대 농산물의 98% 이상을 외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방 농업은 회복할 수 없을 지경으로 망가져 버렸다. 미국의 달러 가치에 울고 웃어야 하는 경제 속에서 미국은행에 종속된 한국은행은 이자놀이로 배불리는 경영이 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경제가 성장하던 3차 산업 시대에는 값싼 노동력과 노동착취, 모방제품으로 먹고 살 수 있었지만, 4차 산업 시대에는 융합融合이 없이는 결코 창조할 수 없다는 새로운 과제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는 회복의 시기와 그 끝이 언제인지 예상조차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냥 하루하루 버티고 있을 뿐이다. 그 사이 누구는 아파트 가격의 숨통이 트이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싶다.

청년들은 취업 때문에 많은 것을 잃었다. 잠시 용돈벌이였던 아르바이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Z세대가 너무 많아 국가의 재원이 상실될 지경이다. 모두가 공감하는 미래의 희망인 신생아 출산은 세계 최저이며, 2030년에는 초고령 사회로 40% 이상이 노인 인구에 접어드는 초고령 국가를 앞두고 있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문 닫는 현실을 앞두고 있는 현실이며, 본격적인 ‘저성장 고물가 시대’로 접어들어 생존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가는 모습이다. 도시 유목민으로 전락한 것도 모르고 말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 삶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도시 속 현대건축’이다. 혹시 건설사가 아파트 한 세대를 팔면 이문이 얼마나 남는지 아는가? 비싼 모델하우스 건축비가 자기 집 분양가에 포함된 줄도 모르고, 가전업체 홍보장인 모델하우스와 인테리어에 현혹된 주부들, 의무적으로 발코니 확장을 할 수밖에 없는 분양 평형에 놀림거리가 되고, 내가 살 집의 조망이 어디를 보는지도 모르고 떡하니 계약하는 이들, 앞으로도 건설사와 공인중개사의 돈 된다는 설득에 꾸준히 현혹될 것이다. 
국토부는 무엇을 했는가? 발코니 확장법 시행 이후, 전국에 지은 아파트의 확장한 발코니 부분만 모아 모아 재산세에 반영해도, 펑크 난 국세國稅를 꽤나 채울 수 있으련만. 이런 반복적인 일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잘못 대응하는 대표적인 좌표가 될 수 있어서 우려된다. 그 우려 속에 다음 세대가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것에 더욱 마음이 아플 뿐이다. 서민들은 당장 살아가기에 급급하다. 잠시 주춤하다 다시 솟아나는 아파트 투기, 부추기는 부동산 거품, 강남 불패 이후 주기적으로 쓴 뿌리가 다시 살아난다. 다시 한번 묻고 싶다. “우리는 왜 보편적인 상식과 사고를 무시하며 살아가는가?” 왜 나만을 위해, 우리만을 위하여 살아가는가.

‘아파트 문화’와 건설을 고려하면 환경과 인간의 조화가 필요하다. 아파트에 대한 인식(건축적 이해, 도시화와 사회적 구조의 상관관계)과 편견(팔 집과 살집, 건축의 본질)이 완전히 달라지기 위해서는 먼저 부정부패부터 척결해야 하며, 사회적 합의에 따른 거주에 대한 인식과 관용 없는 법적 집행에 따른 도전이 필요할 것이다. 도시는 그들만의 공간이 아니다. ‘도시는 우리 모두의 공간’이다.

지금 우리는 국가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주거·교육·의료복지 수준을 독일처럼 과감하게 개혁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당리당략黨利黨略을 우상偶像시 하는 국회의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들이 국민을 홀대하기에 심지어 지방 공직자까지 시민 위에 군림하려는 행동이 더 강해지고 있지 않던가. 이러한 일련의 증거들을 인정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 긴 시간 코로나19 시기를 지나며 비대면에 의한 익숙한 경계는 이제 당연시되었다. 언제 우리가 인터넷으로 공직자 누구가 시간이 있는지 운을 떼고, 며칠 후 힘들게 약속을 하여 1층 접견실에서 대화를 했던가. 그것도 이곳저곳 작은 청사에서! 이 또한 우리 사회의 관행 하나를 더 만들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오래전 조선 사대부 족보에 애국한 분이 불과 몇 분이나 되는가. 그때도 못 먹고 못 입은 민초民草들에게 고난을 위임하지 않았던가? 지금 고난의 현대사를 믿고 싶지 않지만, 욕망은 끝이 없는지라 아직도 수구주의자들이 더 잘 살고 있다. 혹 지금 우리 건축사들도 견리망의見利忘義한 그들 옆에 기회를 엿보며 공생共生하고 있지나 않을까 싶다.

 



7. 회귀回歸
코펜하겐이 낳은 젊은 현대 아키텍트 비야케 잉겔스bjarke ingels의 담론을 간단히 정리하겠다. 그의 건축적인 ‘기능 혼합functional mashup’ 아이디어는 여러 도시에 교훈으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20세기 이후 도시들은 도시 기능을 구역 별고 분리하려 했지만,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도시 번영 프로젝트’·‘지속 가능 프로젝트’·‘행복 프로젝트’의 실타래를 계속 쫓아가 보면 결국 서로 만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하나의 물체나 건물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 이동성, 경제, 기하학 시스템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어 도시 생활(미래 우리가 살아야 할 현실)을 정의한다.” 그리하여 그의 질문은 한마디로 “이 도시에서 최우선시하는 정책 목표는 무엇입니까?”라는 일침을 가했다. 
최근 매스컴에 김포시, 구리시 등 서울(메가시티, Megacity)편입에 대해 난리 법석을 치르고 있다. 그렇다면 ‘서울’, 이 거대도시의 목표는 무엇인가?

나는 가끔 어떤 글을 기억해 내고자 한다. 내가 아는 도시를 볼 때 지난 과거에 대한 견해를 드러낸다면, “완벽한 도시라는 미래상은 흔히 비극적 실험으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공동체가 파괴되기도 했다.” 그리고 사람이라는 별종別種에 대한 물음에 “인간은 독자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즉흥적으로 질서를 확립하는 데 무척 능숙”하게 적응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적응에는 시련과 고통이 항상 동반되었고, 그 수혜자는 서민이었다.
“역사가 일종의 안내자라면 역사는 그들이 성공을 거두리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理性을 잃고 자본주의 위에 군림하고 있는 ‘아파트 공화국’에도 이 의미가 적용될 수 있을까? 

‘발코니가 바라본 세상’은 도시·아파트·사람의 희비喜悲와 희락喜樂을 축약하여 맺는다.

당신의 발코니는 어떻게 사용하나요.
발코니가 없다고요?

 

 

 

 

글. 천서진 Cheon, Seojin 종합건축사사무소 아키리움

 

 

천서진  건축사 · 종합건축사사무소 아키리움

 

대한민국 건축사(KIRA)로 서울시립대 석사를 취득했다. 현대건설(주), 김중업건축(주), 맥 종합건축(주) 등에서 근무한 바 있으며 경기미술대전, 한국건축전 등에서 수상했다. 「교회건축의 노인프로그램 도입에 관한 설문조사 연구」 논문을 발표했고, 「지역사회 노인을 위한 종교시설의 활용 가능성 연구」를 했다.

a7w7arch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