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희미해진 첫사랑에게 2025.6

2025. 6. 30. 15:20카테고리 없음

To my first love that has now faded

 

 

 


어쩌다 우리는 사랑에 빠졌을까요? 어쩌다 당신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배경화면이 되고 당신 목소리 아닌 소리는 모두 소음으로 변하는 황당한 일이 일어났을까요? 미안해요, 당신을 언제 처음 봤는지 첫인상이 어땠는지도 이젠 기억나지 않아요.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당연한 일인가요? 그렇게 사랑했는데 왜, 무엇 때문에 우리는 헤어졌나요? 나의 무엇이 당신을 못 견디게 했나요? 사랑의 이유가 되던 모든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별리의 원인으로 변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사랑이라는 환각 상태에 취해 있다가 화들짝 깨어보니 모든 것이 참기 힘든 것으로 바뀌었는지도 모르죠. 지금은 참담했던 그 이별의 순간조차 희미해졌어요.
그래서 당신, 잘 살고 있나요? 나 없이 행복한가요? 한동안 당신이 불행하기를 바랐어요. 아니 나를 떠났으니 당연히 불행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보이는 모든 것이 당신을 떠오르게 해서 툭하면 눈물을 쏟았어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이미 사라져버린 사랑의 날들을 복기했어요. 뾰족한 상처의 끝을 시간으로 문지르면서 허수아비처럼 몇 달을 살았지요. 만약 내가 그때, 일본의 생활 서비스 온라인 플랫폼인 쿠라시노마켓(くらしのマーケット_생활의 시장)을 알았다면 분명히 단골 손님이 되었을 거예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쿠라시노 마켓이 뭐냐고요? 청소, 수리, 이사, 요리 등 일상 생활에 필요한 일을 전문가가 와서 대신해주는 온라인 서비스 플랫폼이에요.

#실연한 남자 주인공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천장의 전구가 나가도 갈 생각을 안 한다. 밥도 먹지 않고 웃지도 않는다. 아무 때나 펑펑 눈물을 흘리고 벽에다 여자친구의 이름을 반복해서 쓴다. 다행히도 ‘생활의 시장’의 출장 서비스가 와서 전구를 갈아주고 요리와 청소를 해주고 마술사를 보내 웃게 한다.

 

노래) 너 없는 세상에서는 빛을 찾을 수 없어.
         괴롭고 괴로워서 아무것도 목으로 넘길 수 없어.
          나는 이제 눈물을 멈출 수도 없어.
          간절히 바라는 마음은 어느새 너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네 이름이 반복해서 떠오르고 방 안에는 아직도 네가 남아 있는 것 같아.
자막) 출장천장전구 교체 ¥3,000
          출장요리사 ¥7,000
          출장누수수리 ¥2,200~
          출장마술사 ¥3,000~
          출장벽지도배 무료 견적 접수 중
          출장욕실청소 ¥4,500~
          출장가사대행 ¥2,000~
          실연을 당하면 사람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오늘도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당신을 
          200개 이상의 서비스로 응원합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출근하는 주인공. 집 앞에서 아름다운 여성이 인사를 하자 그 여성에게 마음을 빼앗겨 ‘누수해결서비스’가 달려올 만큼 침을 질질 흘리며 쓰러진다. 


          사랑에 빠져도 사람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급하면 바로 달려와 줄 전문가가 있다, 쿠라시노 마켓

 

쿠라시노마켓_동영상광고_2022

 

광고에서는 실연이 갑자기 코미디로 변해버렸네요. 사랑에 빠지거나 실연을 당하거나 똑같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상태가 되니, 생활 서비스를 이용하라는 재치 있는 광고에 웃음이 터졌어요. 식음을 전폐하고 지내다가 다른 여자를 보고 침을 흘리다니 안심이 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합니다. 맞아요, 실연의 상처가 아무리 커도 다른 사랑이 찾아오면 치유가 되죠. 그래서 그러니까 당연하게도 결국…, 나도 다시 사랑에 빠졌어요. 눈이 먼 상태가 되었다가 헤어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들을 반복했지요. 몇 번을 다시 해도 사랑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고 실연엔 더욱더 속수무책이었어요. 누가 그랬던가요? “몇 번을 다시 해도 사랑은 언제나 첫사랑”이라고. 사족을 달자면 이별도 언제나 첫 이별인 셈이었어요.

 

 

필트(FILT)_표지_2023년 2/3월호

 

몇 번을 해도, 사랑은 늘 첫사랑.

“연애에 빠져 있는 상태는 상당히 특수한 거죠. 엄청나게 바보 같은 짓을 하기도 하고, 나중에 생각해 보면 부끄러운 짓을 하기도 하고요. 드라마라면 좋아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좋은 대사를 할 수 있겠지만, 현실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고요. 아무것도 아닌 상대방의 말에 일희일비하거나 이 순간을 잘라내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중략) 식은땀도 나고, 연락하고 싶지만 그만두자고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요. 그런 평소와 다른 마음의 움직임은 몇 번을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아요.”

2023년 개봉한 일본 영화 ‘에고이스트’의 주인공 스즈키 료헤이(鈴木亮平)가 격월간지인 <필트(FILT)>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이야기예요. 당신도 공감하시나요? 다행이면서 불행하게도 사랑 때문에 ‘잘라내고 싶’었던 나의 순간들은 모두 지나갔어요. 전구를 갈지 못하는 일도, 밥 대신 눈물만 삼키는 짓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어요. 지금은 내 아이들의 연애에 감정이입하는 나이가 되었지요. 당신도 아이가 있겠죠? 그 아이는 혹시 짝을 찾았나요? 첫사랑과 헤어진 후 ‘먹지 않아도 배가 안 고프고, 자지 않아도 잠이 오지 않’던 내 큰 아이와,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겠’다던 둘째 아이 모두 늘 첫사랑 같은 사랑을 계속하고 있어요. 축하할 일이지요.
유월입니다, 여름이 시작되었어요.
다시 유월이고, 또다시 여름이에요.
몇 번을 반복해도 처음 맞이하는 것 같은 6월입니다. 생전 처음인 것처럼 두려워요. 처음인 것처럼 설레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 처음인 6월을, 다시는 오지 않을 이 6월을 잘 살아봐요. 첫사랑 하는 것처럼 6월과 사랑에 빠지는 것도 좋겠어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당신, 사랑해서 좋았고 헤어져서 다행인 나의 첫사랑 당신! 나 없이도 아니 내가 없어서…, 언제나 평온하고 충만하길 진심으로 빌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eps58id-o0w&t=15s 
쿠라시노마켓_동영상광고_2022_유튜브 링크 

https://filt.jp/lite/issue121/f01.html
필트(FILT)_ 스즈키 료헤이 인터뷰
2023년 2/3월호_필트 홈페이지 링크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와 인연을 맺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의 벨컴과 독립 광고대행사인 샴페인과 프랜티브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일했다. 지금은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의 CD로 퍼포먼스 마케팅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응답하라 독수리 다방(2015)』, 『광고, 다시 봄(2019)』, 『똑똑, 성교육동화(2019)』 시리즈 12권, 『김민준의 이너스페이스(2020)』가 있다.

abacab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