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7. 31. 10:20ㆍ아티클 | Article/정카피의 광고이야기 | AD Story - Copywriter Jeong
The parts of speech of my summer
어릴 때는 겨울을 좋아했다. 거위털 패딩은커녕 기모 바지도 없었던 시절이라 지금보다 훨씬 더 춥게 지냈는데도 겨울이 좋았다. 스케이트를 탄 적도 없고 스키는 구경도 못 했지만 얼어붙은 논에서 썰매를 타는 겨울이 좋았다. 군밤을 먹을 수 있고 가래떡 길게 뽑아 연탄난로에 구워 먹는 겨울이 좋았다.
그런데 겨울은 더 이상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 아니다. 가을 끝자락에 겨울이 모습을 살짝 드러내면 ‘이번 겨울은 얼마나 추우려나.’, 덜컥 겁부터 난다. 추위가 싫다고 여름이 좋아진 것도 아니다. 해마다 여름이 더 길어지고 더워지니 5월에 벌써 반팔을 꺼내 입으며 닥쳐올 더위를 걱정한다. 나이 탓인지 덥지도 춥지도 않은 순한 날씨가 좋다. 사실 아파트와 사무실이라는 콘크리트 건물에서 주로 지내니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 하며 흘려보내는 날이 대부분이다. 봄인가 싶으면 어느새 여름 지나 가을이 훌쩍 다가오기 일쑤인 무덤덤한 날을 살고 있다.
그러다 광화문 교보생명 사옥에 걸린 ‘광화문글판’에서 시 한 줄을 만났다.
여름은 동사의 계절
뻗고, 자라고, 흐르고, 번지고, 솟는다.
이재무 시인의 ‘나는 여름이 좋다’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내가 여태 몰랐던 여름의 맨 얼굴을 본 기분이 들었다. 여름은 그런 것이었구나. 움직이고 성장하고 변화하는 동사의 계절이 여름이로구나! 갑자기 여름이 다시 보였다. 하루가 다르게 짙푸르게 변해가는 가로수 이파리의 풋내가 코를 찔렀다. 예고 없이 쏟아지는 소나기의 깔깔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미 와버린 여름, 폭염의 계절을 지루하게 견디지 말고, 나도 역동하며 동참하고 싶다는 마음이 불끈 솟았다. 광고대행사 벨기에 DDB가 이케아를 위해 제작한 ‘여름을 놓치지 마세요.’ 캠페인에 공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햇살을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기세요.
금방 비가 쏟아질 것 같이 먹구름 잔뜩 낀 하늘 사이를 비집고 화면에 가까스로 자리 잡은 환한 여름 햇살 한 줄은 벨기에의 여름이 대체로 짧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벨기에의 여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가니 날씨가 좋으면 무조건 의자를 꺼내 야외에 앉아서 햇볕을 즐기라고 광고는 말하고 있다.
여름은 휴가의 계절이다. 지금은 연중 아무 때나 휴가를 가지는 게 일반화되었지만 여전히 ‘여름’하면 ‘휴가’가 저절로 연상된다. 항공사나 여행사, 숙박업체와 같은 여행 관련 업종은 물론이고 아웃도어 의류나 용품, 빙과나 음료 회사들까지 여름철 특수를 노린 광고를 만들어 소비자를 유혹한다.
숙소 추천 플랫폼 호텔스닷컴은 “당신에게 딱 맞는 그곳을 찾아보세요.”라며 환상적인 여행지와 숙소를 보여주고, 에미레이트항공은 “다음은 어디로?”라는 도전적인 카피로 항공권 예약을 부추긴다. 싱가폴에어라인은 “얼마나 멀리 가는지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가는지가 중요합니다.”라며 여행의 동반자를 고민하게 하고, 스위스관광청은 “자연 속으로 들어가자.”를 외치며 스위스의 웅장한 자연을 자랑한다.
당신에게 딱 맞는 그곳을 찾아보세요.(Find Your Perfect Somewhere.)
다음은 어디로?(WHERE NEXT?)
얼마나 멀리 가는지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가는지가 중요합니다.(IT’S NOT JUST HOW FAR YOU GO, IT’S WHO YOU GO WITH.)
자연 속으로 들어가자.(Get Natural.)
올해는 5월에 벌써 후끈한 30도를 겪고, 6월 중순에 이른 장마를 맛보았다. 기상청은 지난 5월, 올여름은 기온이 평년 (23.4~24.0℃)보다 높겠고, 강수량은 평년(622.7~790.5㎜)보다 대체로 많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여름이 뜨거워지는 만큼 온열질환자도 늘어날 것이다. 그래서 행정안전부는 포카리스웨트 음료를 만드는 기업과 손잡고 온열질환 예방 캠페인을 만들었다.
Na) 여름을 보내는 방법은 달라도
여름을 지키는 방법은 같다.
초록 여름도, 빨간 여름도 수시로 수분 채우는 여름.
자막) 15분마다 시원하게 수분 섭취하기
Na) 큰 여름도 작은 여름도 그늘로 피해가는 여름.
자막) 33°C 이상엔 그늘로 피해가기
Na) 무거운 여름도 더 무거운 여름도 오후엔 쉬어 가는 여름.
자막) 무더위 시간대엔 옥외작업 쉬어 가기
Na) 누구나 똑같이 안전한 여름이 되도록 모두의 여름을 함께 지켜요.
이 캠페인은 행정안전부와 동아오츠카가 함께합니다.
이 캠페인에서 말하는 ‘초록 여름’은 초록 작물이 자라는 밭에서 일하는 농부의 여름이고, ‘빨간 여름’은 화마와 싸우는 소방대원의 여름이다. ‘큰 여름’과 ‘작은 여름’은 어른과 어린이의 여름이고, ‘무거운 여름’과 ‘더 무거운 여름’은 택배 기사와 건설현장 노동자의 여름이다. 광화문글판에서 ‘동사’로 움직였던 여름이 온열질환 예방 영상에서 명사와 형용사를 만나 구체적인 형태를 띠게 된 것이 재미있다.
여름에 어울리는 광고를 보며 2025년 내 여름의 동사가 무엇일까 생각한다. 이 여름, ‘뻗고, 자라고, 흐르고, 번지고, 솟는’ 것들 틈에서 나는 어떻게 움직이고 싶은가 자문한다. 또 올여름을 관통했으면 싶은 나의 명사와 나의 형용사를 고민한다….
그리고, 이재무 시인의 고백에서 영감을 얻어서 적는다.
내 여름은 들추고 드러나고 변신하고 나아간다, 그랬으면 좋겠다.
명사를 만난 내 여름은 천둥 여름 해바라기 여름이고, 형용사로 표현한 내 여름은 가벼운 여름 들뜬 여름이다. 그렇게 되길 소망한다.
여름엔 절제를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를 마구 들키고 싶고 내 안쪽 고이 숨겨온
비밀 몰래 누설하고 싶어라
나는 여름이 좋다
이재무_‘나는 여름이 좋다’ 부분
https://www.youtube.com/watch?v=NJuce90rO8s
Hotels.com US_영상 광고_2022_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Po1uHO_c2ag
스위스관광청_TVCM_2020_유튜브 링크
https://play.tvcf.co.kr/952590
동아오츠카X행정안전부_영상 광고: 온열질환 예방 캠페인_2024_tvcf링크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와 인연을 맺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의 벨컴과 독립 광고대행사인 샴페인과 프랜티브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일했다. 지금은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의 CD로 퍼포먼스 마케팅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응답하라 독수리 다방(2015)』, 『광고, 다시 봄(2019)』, 『똑똑, 성교육동화(2019)』 시리즈 12권, 『김민준의 이너스페이스(2020)』가 있다.
abacab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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