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의 향기처럼 아련한내 한여름 밤의 꿈 2025.8

2025. 8. 31. 10:20아티클 | Article/정카피의 광고이야기 | AD Story - Copywriter Jeong

My midsummer night’s dream, like the distant scent of regret

 

 

 

이제는 골동품 가게에서나 볼 수 있는 수동 타자기가 있다. 여름방학에 찾아간 할머니 댁 다락방에서 오래된 물건들 사이를 더듬다 발견했을 것만 같은 물건이다. 타자기 옆에는 희미해진 글자가 띄엄띄엄 박힌 누렇게 바랜 종이 한 장이 떨어져 있다. 쓰다가 몇 번이나 구겨 버리고 다시 썼을까? 알아보기 힘든 자음과 모음에서 머뭇머뭇 망설임이 느껴진다.
할머니의 머리칼이 아직 윤기 흐르는 흑발이고 뺨은 여전히 분홍빛이던 아득히 먼 어느 날, 펜에 잉크를 채우고 빈 종이를 펼쳐 한 글자 한 글자 간절함을 채우던 순간이 있었다. 밤새워 쓰고도 차마 보내지 못해 숨겨둔 마음 한 조각이 있었다.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흐르고 쓴 사람도 받아야 했던 사람도 모두 떠난 뒤 남은 부치지 못한 편지….
다락방에는 오래된 먼지가 햇살 따라 너울거리고, 바싹 마른 잉크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후회에 냄새가 있다면 바로 이런 냄새일까?
타자기 위에는 ‘미기신’(未寄信; 부치지 못 한 편지)이라는 이름의 향수가 한 병 놓여있다.

조용하고 길게 이어진 여름의 봉인을 열다.
Unveil the Slow Summer

오래된 집에서 편지를 읽으며,
누렇게 바랜 종이와 희미해진 글자 사이에서 과거의 향기를 맡는다.

관시아(观夏 To Summer)_공식 인스타그램_2025

019년 창립한 관시아(观夏)는 중국 감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니치 향수 브랜드이다. 5년 누적 매출액이 약 1900억 원에 달하는데, 2024년 로레알의 투자를 받아 세계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관시아는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지금의 큰 성공을 이룰 수 있었을까? 관시아가 공식 인스타그램의 대문 화면에 밝혀 놓은 ‘EASTERN・CULTURE・ART・SCENTS’라는 키워드에서 그 비결을 읽을 수 있다. 관시아는 단순히 ‘좋은 향’을 만드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동양적 미학과 문학적 스토리텔링을 결합해, 향기와 공간, 텍스트가 어우러진 감성적 경험을 제공한다. 향뿐 아니라 향수병, 패키지, 매장까지 모두 중국의 전통적인 건축과 정원,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디자인으로 소비자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물한다. 관시아는 감정과 장소를 향으로 번역한다. 어떤 향수 브랜드도 하지 않았던 일이다.
관시아의 여름 한정판 제품인 미기신(未寄信)은 ‘후회’의 감정을 향기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아무도 맡아본 적 없는 ‘후회’의 향기를 바로 이거라고 장담하니, 벌거벗은 임금님의 보이지 않는 옷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뜨거워서 미기신은 2024년 출시하고 오래지 않아 품절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품절되었던 미기신을 올해 다시 출시하면서 소비자들에게 공개한 미기신의 ‘편지’다.



첫 번째 편지/2025. 04. 27

여름은 지나가기 마련이에요.
추억에 잠길까 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요.

요 며칠, 미기신(未寄信)의 귀환이 불러일으킨 화학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여러분은 향수병에 새겨진 글귀를 세심하게 들여다봅니다.
한 줄기 향기를 통해, 마치 수많은 사람들이 허공 속에서 어깨를 스치는 것 같고,
잠시나마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 생깁니다.

미기신의 향기는 가랑비 속에서 우산을 쓰고 있을 때, 
빗방울이 우산을 가볍게 때리는 느낌과 같습니다;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을 털고, 마녀 가게로 한 걸음 들어서면,
문 앞의 풍경이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흔들립니다.
   만약 후회에 향기가 있다면, 아마 ‘미기신’이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관시아(观夏 To Summer)_첫 번째 편지_2025

 

 

우산을 두드리는 가랑비를 소리가 아닌 향기로 느낀다니, 엄청난 과장이다 싶으면서도 가슴이 울렁인다. 미기신은 절제된 사진과 느릿한 문장으로 무더운 여름을 그리움과 아쉬움, 회한의 계절로 바꾸어 놓는다. 자신의 향기를 탑 노트(우루과이 카다멈/은방울꽃/아이리스), 미들 노트(유향/파피루스/버지니아 시더), 베이스 노트(과이악 우드/앰버/머스크)라고 설명하는 대신, 뿌렸을 때 불려 나오는 감정으로 설명한다.

만약 후회에 향이 있다면, 첫 문장은 어떤 향이어야 할까요? 아마도 수정처럼 맑은 꽃과 화이트 머스크의 은은한 빛이 어우러진 낮고 여운이 남는 숲의 향이 될 것입니다. 파피루스는 가장자리가 닳고 연약한 촉감의 낡고 누렇게 바랜 편지를 연상시키며, 과이악 나무와 삼나무는 바랜 잉크와 펜의 역할을 하여 아쉬움의 냄새를 만들어 냅니다.
향수를 뿌리는 순간, 종이 사이 숨겨져 있던 마음의 문장이 잉크처럼 조용히 번져 나갑니다. 말하지 못한 사랑의 감정은 속삭임으로 녹아들어 향기처럼 가벼워지고 마침내 기억 속으로 사라집니다.

관시아(观夏 To Summer)_공식 인스타그램_2025

부치지 못한 편지 안에서 시간은 옛날 그대로 얼어붙어 있다. 어떤 사정이 있었을까?  마치 그 편지를 내가 받아보지 못한 것처럼 안타깝다, 궁금하다. 편지의 발신인과 수신인은 언젠가 만나 부치지 못 한 편지 속의 사연을 털어놓고 이야기했을까? 그러나 ‘언젠가’라는 날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언젠가를 기약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할리데이비슨의 광고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Someday.
“I’ll do it someday.”
Monday, Tuesday, Wednesday, 
Thursday, Friday, Saturday, Sunday.
See? There is no Someday.

It’s time to ride.

 

 

언젠가.
“언젠가는 할 거야.”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봤지? 언젠가라는 요일은 없어.

지금은 라이딩 할 시간입니다.

할리데이비슨(미국)_인쇄광고_2003

나의 지나간 여름을 반추한다. 차가운 마루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비밀의 화원’을 읽던 어린이가 보인다. 옥상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은하수를 바라보던 소녀가 있다. 볕에 그을린 얼굴로 남도의 친구들 집을 떠돌던 아가씨도 존재한다. 그 수많은 여름에 나는 자주 주춤거렸고 게을렀고 모른 척했다. 흘러간 내 여름에 ‘언젠가’를 되뇌며 그렇게 밀쳐두었던 소망들이 나도 모르게 ‘후회’로 쌓여 있다.
그래서, 다시 찾아온 여름의 한가운데서 여름이 이후를 생각한다. 훗날, 아직 오지 않은 어느 날 이렇게 지독하게 더운 여름인데도 끝나버린 것이 아쉽게 남을 후회가 있을까 혼자 묻는다. 그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마음이 시키는 일을 ‘언젠가’ 대신 ‘지금’ 하자고 호기를 부려본다.
자못 비장한 다짐을 하고 몇 시간이 지났다…. 에잇, 참지 않고 바로 지금 실행에 옮긴 행동이 고작 온라인 쇼핑이더냐? 큭큭큭.

그림엽서를 한 장 꺼냈다, 만년필을 손에 쥐었다, 여름이 가기 전에 반드시 부치고야 말 편지를 쓴다. 지나간 어느 여름 차마 부치지 못하고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편지 대신,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적는다. 내 편지를 받는 당신, 발신인 없는 편지를 받거들랑 나인 줄 알아보고 답장을 보내 주시길. ‘후회’의 향이 나는 편지를 받으면 ‘먼 후일’* 말고 받은 즉시, ‘무척 그리다가 잊’*게 하지 말고 미처 잊어버리기 전에 반가운 기별을 해주시길….

*김소월, 『먼 후일』 일부

 

 

 

https://www.instagram.com/tosummerofficial/
관시아_공식 인스타그램 링크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와 인연을 맺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의 벨컴과 독립 광고대행사인 샴페인과 프랜티브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일했다. 지금은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의 CD로 퍼포먼스 마케팅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응답하라 독수리 다방(2015)』, 『광고, 다시 봄(2019)』, 『똑똑, 성교육동화(2019)』 시리즈 12권, 『김민준의 이너스페이스(2020)』가 있다.

abacab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