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8. 31. 10:15ㆍ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When the semiotics of size are neutralized
요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론 뮤익의 전시가 놀라운 흥행을 하고 있다. 이 전시의 대중성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극사실주의다. 20세기 전반기에 피카소와 브라크가 입체파라는 혁신적인 모더니즘 예술을 선보였다. 뒤이어 말레비치, 칸딘스키, 몬드리안은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 비구상 예술까지 발표했다. 20세기는 예술 혁신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대중은 예술을 난해하다고 여기며 멀리했다. 대중은 역시 사실적인 것에 반응한다. 왜 대중은 사실주의를 좋아할까? 대중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대상이 익숙하고 편안하다. 대중은 예술을 통해 불편해지고 싶어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문화가 아무리 아방가르드하게 진보해도 이 현실을 극복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일단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에는 관심이 가지 않는 건 생물학적으로 증명돼 있다. 유튜브의 쇼츠에서 미스 월드 선발대회를 보여주면서 아주 짧게 전 세계 각국의 미녀들을 보여준다. 나는 계속해서 한국인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나에게 가장 친숙한 존재이고 그런 존재를 찾는 것은 본능이다. 그러니 예술가들이 진부한 것을 멀리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평론가들의 예찬을 받을지 모르지만, 대중에게까지 사랑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론 뮤익 작품의 첫 번째 매력은 내가 봐왔던 그 사람, 그 대상을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으로 재현했다는 바로 그 점이다. <사진 1>
두 번째는 크기다. 극사실주의적인 사람이 나보다 훨씬 커졌을 때, 사람들은 압도되는 감정을 느낀다. 극사실주의 조각은 새롭지 않다. 이미 50여 년 전에 등장했다. 미국 조각가 듀에인 핸슨은 1960년대부터 미국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극사실주의 조각을 선보였다.<사진 2>
그는 1대1 스케일로 조각을 제작했다. 론 뮤익이 다른 점은 극사실주의적으로 재현한 대상을 2배 이상으로 키웠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얼굴의 주름이라든지 머리카락, 몸에 난 털이 갑자기 낯설어진다. 그뿐 아니라 얼굴의 형태, 눈, 코, 입도 평소 보지 못했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러니까 익숙했던 대상이 반가운데, 그 반가운 대상이 다시 낯설게 느껴지는 감상, 그것이 론 뮤익 조각이 관객에게 선사하는 즐거움이다.
디자인에서도 크기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디자인 대상 가운데 하나다. 사람들은 자세한 세부의 디자인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한다. 가장 먼저 내 감정을 건드리는 건 크기다. 거대한 건축, 큰 집, 큰 차, 큰 TV, 큰 냉장고, 신문이나 잡지의 커다란 헤드라인 글자. 이런 요소들이 그 대상을 판단하는 첫 번째 기준이다. 사물에 대한 이런 판단은 우선 사람에 대한 판단으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사람의 크기는 언제나 나의 생존과 연관되어 있어서 주목을 끈다.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복종하는 이유는 나보다 몸집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즉 힘으로 나를 압도하는 존재다. 같은 또래라고 하더라도 큰 사람은 위협적이다. 경쟁하고자 하는 본능이 강한 중고등학교 남학생들의 경우 큰 아이들은 일단 덜 위협을 받는다. 그가 싸움의 기술을 가졌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그러다 보니 주로 작은 아이들이 괴롭힘을 당한다.
이런 현상은 원시시대에는 더 일상적이었을 것이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즉 그가 공격적이고 잔인한 사람인지 온순하고 관대한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일단 그 낯선 사람을 경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그가 나보다 크다면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내 몸은 경계경보를 울리고, 동시에 내 뇌는 급박하게 판단의 회로를 돌린다. 도망을 쳐야 할 것인지, 아니면 우호적인 모습, 또는 복종적인 태도를 보여 최대한 그가 나를 경계하지 않도록 설득할 것인지 말이다. 현대인은 이런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문명화된 도시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낯선 타인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나를 공격할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명화 이전 시대에는 <동물의 왕국>에서 정글이나 사바나의 동물들이 주변의 살아 있는 생명을 늘 경계하는 것처럼 인류 역시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본능이 유전자에 깊이 뿌리내렸고,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다. 다른 인종이나 외국인 혐오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또 아무리 문명화된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도 새로운 학교, 새로운 회사에 들어갈 때는 예민한 경계의 촉수를 드리운다.
그러한 본능이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사람들은 물리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우선 권력이 있는 자들은 집을 크게 지었다. 외부에서 봐도 크지만, 내부에 들어가서도 천장이 높아서 사람을 압도한다. 주로 왕과 귀족들이 그렇게 집을 짓지만, 신의 집은 그보다 더 압도적인 크기로 지었다. 그 거대한 건축물의 목적은 단 하나다. 그것을 보는 사람을 위협하는 것이다. 마치 낯선 땅에서 거인을 만난 것처럼 그 앞에서 왜소해지고 주눅이 들어 그 건축의 주인, 즉 왕이나 성직자에게 일단은 복종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런 건축물들이 오늘날에는 관광 명소가 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근대 이전에 살았던 무지한 백성들이 느꼈던 감정, 즉 크기에 압도 당하는 마음을 현대인도 똑같이 느낀다. 또 하나는 현대인은 과거의 무지한 백성들과 달리 그 크기가 주는 권위를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그 크기를 그저 감상할 뿐이지 그 권력에 복종하지는 않는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고대 그리스 신전에는 늘 압도적인 크기의 신상이 있었다. 파르테논 신전에는 거대한 아테나 여신이 있었다.<사진 3>
고대인들은 그 여신을 현대인처럼 감상하지 못한다. 마치 미술관의 관객이 론 뮤익의 거대한 얼굴 조각을 이모저모 낱낱이 살피듯이 아테네 여신을 보지 못했다. 어쩌면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전 세계의 그 수많은 위대한 문명의 산물, 특히 교회와 사찰, 궁전과 같은 권력자들의 건축이란 사실은 백성을 억압하고 복종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태어났을 뿐이다.<사진 4>
예수나 부처는 과연 그렇게 거대하고 화려한 교회와 사찰을 좋아했을까? 위대한 성인들의 목적은 오히려 그런 권력의 상징들을 깨뜨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죽은 뒤 종교 건축은 그 종교 창시자들의 뜻과 정반대로 나아갔다. 종교가 권력화되었다는 건 그것을 이용하는 성직자들의 권력이 강화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그 종교 창시자의 뜻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종교 창시자의 뜻과는 반대로 거대해진 건축물에서 가장 명징하게 느낄 수 있다. 권력자들은 크기가 사람들 마음속 깊은 곳에 공포감을 일으키는 메커니즘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런 식으로 건축물, 자동차, 가전제품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크기는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서 첫 번째로 고려되는 디자인의 대상이다.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의 세계에서도 크기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어느 분야 못지않게 활용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헤드라인 글자의 크기다. 중요한 뉴스의 헤드라인은 압도적인 크기로 디자인된다. 사람들은 큰 크기의 글씨를 보면 본능적으로 읽고 싶어진다. 마치 크고 낯선 사람을 만나면 위험하다고 느끼는 것처럼 커다란 글씨에서도 위협을 느껴 무시할 수 없고 어떻게든 반응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보지 않고는 못 견딘다. 요즘처럼 개인 미디어가 발전하지 않은 시절에는 아주 중요한 뉴스는 ‘호외’라는 별도로 발행된 신문을 길거리에서 배포했다. 나는 1979년,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사망했다는 호외를 봤던 기억이 난다. 오랜 기억 속에 호외는 검정색 바탕에 커다란 흰색 제목 글씨로 남아 있다. 그 커다란 글씨로부터 뭔가 무섭고 중요한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던 어렴풋한 기억이 있다.
정보는 문자라는 기호로 전달된다. 그것은 소리의 작용과 비슷하다. 작은 소리는 무시하지만 큰 소리에는 반응한다. 큰 글자는 물질적으로 커다랗게 외치는 목소리와 비슷하다. 커다랗게 외치는 소리는 다급하다는 성질을 갖는다. 이 청각의 정보 역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준다. 소리가 없는 시각 정보 디자인에서 그것은 크기로 변환되어 사람들에게 주목을 끌고 두려움을 주려는 것이다. 이렇게 디자인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큰 것에 대한 두려움의 본능을 활용한다. 그리하여 크기를 통해 수많은 사물과 커뮤니케이션의 체계를 이루었다. 서체가 수많은 크기로 서비스되는 이유는 크기가 주는 미묘한 변화가 사람들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큰 것은 나의 생명, 또는 나의 이익을 빼앗아 갈 잠재적 가능성이 높은 대상이다. 그렇게 고대부터 현대까지 권력자들은 큰 것으로 과시의 욕망을 실천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발전한 지역에서는 큰 것에 대한 집착이란 그저 권위주의에 대한 열망이고 그것은 속물적이고 때로는 악의적인 태도라고 인식한다. 크기의 기호에 대한 마지막 열망이 남아 있는 곳이 내가 보기에는 100층이 넘는 초고층건물이다. 초고층건물은 왕궁도 아니고 종교건축도 아니다. 대개는 기업이 만든다. 초고층건물은 단지 용적률에 대한 실용적인 목적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그 정도의 용적률이 과연 필요할까 싶다.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압도적인 크기로 자신의 권위와 재산을 과시하려는 욕망의 산물일 뿐이다.
다른 한편 현대미술에서는 크기가 주는 두려움의 감정을 이용하지만 일단 이목을 끈 뒤 좀 더 자세한 감상으로 이끌려고 한다. 론 뮤익의 조각이 대표적이다. 론 뮤익의 거대한 조각을 관객이 흥미로워하고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두려움의 요소를 희석시킴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마치 거대한 고딕 성당에 들어갈 때 현대의 관광객이 신에 대한 숭배의 마음이나 경건한 마음 없이 그 건축의 물리적인 형태를 감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감상의 차원으로 크기의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론 뮤익의 거대한 조각을 고대나 중세의 어느 마을로 가져다 놓는다면,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것을 숭배할 것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우리는 크기가 가졌던 기존의 기호학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권력과 권위, 금력 따위는 더 이상 숭배하거나 복종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크다는 것은 이제 권위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눈에 띄는 특이한 모습일 뿐이다. 팝 아티스트 클래스 올덴버그는 전혀 특이하지도 않은 숟가락이나 사과, 곡괭이 따위를 거대하게 만들어서 특별한 것으로 만들었다.<사진 5> 거기에는 더 이상 고대나 중세의 권위주의가 없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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