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8. 31. 10:40ㆍ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Bohwagak Art Museum
이 무더운 여름날 다소 뜬금없겠지만, 상엿소리부터 한 번 들어보자. 생멸(生滅)에 대한 항변 같기도 하고, 언젠가 우리 모두 접어들 ‘그 길목’에 뿌리는 헌사(獻辭) 같기도 하다.
북망산천이 머다더니만 문전산(門前山)이 북망이네. (중략)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이 진다고 서러마라.
명년 삼월이 돌아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우리 인생 한번 가면 다시 오진 못하리라. (……) <상엿소리 1>
간다. 간다. 떠나간다. 이승길을 하직하고,
부모처자 이별하고, 저승으로 나는 가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는 날을 일러주오.
못 가겠네, 못 가겠네. 서러워서 못 가겠네. (……) <상엿소리 2>
이렇듯, 우리 인간들이 지닌 죽음에 대한 거부는 실로 대단했다. 그랬기에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고 싶다는 갈망 역시 원초적이었을 것이다. 그 흔적은 동굴에 모여 집단생활을 하던 원시시대부터 우리네 삶터에 고스란히 퇴적되어 있다.
이라크 샤니다르(Shanidar) 동굴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 유적이 그렇고, 충북 청원군 두루봉 동굴에서 발견된 ‘흥수아이’ 유적이 그렇다. ‘흥수아이’ 유적에서는 수만 년 전 장례의식의 흔적까지 엿볼 수 있는데, 그만큼 죽음은 구석기시대부터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존재의 이면(裏面)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알다시피 불로장생을 꿈꾼 대표적 인물은 진시황(秦始皇)이다. 거대한 아방궁을 짓고, 여기저기로 불로초(不老草)를 구하러 다녔다는 얘기가 지금까지 회자되는가 하면, 무려 연인원 340만 명을 동원하여 축조했다는 ‘병마용갱(兵馬俑坑)’의 실체가 최근 발굴조사로 또 드러나기도 했다. 그랬던 그도 지금으로 치면 한참때인 50세에, 그것도 수레 위에서 객사했다고 하니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진시황만 그런 게 아니었다. 생명의 본질상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되는 죽음 앞에서, 사라지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쓴 흔적은 우리 주변 도처(到處)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역사를 들춰보면 우선 ‘고복(皐復)’이란 장례 절차가 눈에 띈다. 옛날에는 임종(臨終)이 확인되면, 가까운 이가 지붕 위로 올라가서 망자(亡者)가 입던 속옷 하나를 꺼내 들고 크게 휘저으며, 망자의 이름을 아주 청승맞도록 길게 늘어뜨리며 부른다. 저승길을 재촉하지 말고, 이승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절규였다. 이른바 초혼(招魂)이다. 김소월의 시(詩) ‘초혼’도 그 풍토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
애별이고(愛別離苦)에 몸부림치던 우리네 풍습은 초혼(招魂) 하나로 단념하고 그친 게 아니었다. 장례절차 곳곳에도 그게 스며들어 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풍습이지만, 장례를 치를 때 제사상과 별도로 대문 근처에 또 하나의 밥상을 차려놓았다. 그걸 ‘사자상(使者床)’이라고 하는데, 보통 그 상(床)에는 하얀 쌀밥과 그 옆에 ‘묵은 간장’ 세 종지를 올려놓는다. 그런데 그 발상이 참 능청스럽다. 저승길을 재촉하던 저승사자가 급한 마음에 그 간장 세 종지를 한꺼번에 들이켰다가, 그만 목이 타서 망자의 집안으로 다시 뛰어 들어오라는 염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저승사자를 더 붙잡아두고 싶었던 모양이다.
흔히 우리는 불사조(不死鳥)를 죽지 않는 영생의 상징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전설 속의 불사조(phoenix)도 아예 처음부터 죽지 않는 존재는 아니었던가 보다. 500년 주기로 제 몸을 불로 태워서 일단 재(灰)가 된 후에, 그 ‘재’에서 다시 새롭게 태어난다는 얘기도 적당히 얼버무려져 있기도 하다.
동양에서 불사(不死)의 염원은 봉황(鳳凰)에 담겨 있다. 청동기 시대부터 농경의 신으로 숭배되기도 했던 봉황은, 오직 벽오동(碧梧桐)에만 깃들며, 천년에 한 번 열리는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는 전설을 품고 있는데, 서양의 불사조 전설과 흡사하다.
그 봉황도 때가 되면 활활 타오르는 불 속으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그걸 흔히 ‘봉황열반(鳳凰涅槃)’이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봉황은 그 열반으로 단멸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타 죽은 ‘재(灰)’ 속에서 다시 한 개의 알로 환원되고, 그 알에서 부활하여 마침내 더 강한 생명력을 지닌 영원의 존재로 재생된다고 한다.
역시 안쓰럽다. 유한한 생명체가 지닌 제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인간의 욕망과 갈애(渴愛)만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때로 그 한계에 함몰되지 않고, 아예 다른 차원으로 삶의 가치를 승화시킨 사례도 적잖다. 멀리서만 찾을 게 아니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아주 노골화되던 1938년, 서울 성북동에서는 한국 최초의 사립미술관, ‘보화각(普化閣)’이 문을 열었다. 그 문 앞에는 우리 문화유산의 잠재적 가치에 남다른 식견을 지닌 간송 전형필 선생이 우뚝 서 있었다.
간송은 당시 상상을 초월한 거금을 들여 반출위기에 처한 유물(遺物)을 사들이는가 하면, 이미 반출된 유산(heritage)이라도 우리 민족의 품으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때로는 일본 제국주의와 직접 대결했으며, 때로는 주변의 힐난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숱한 어려움 속에 되찾은 우리 문화유산을 온전하게 갈무리할 공간, 그곳이 바로 보화각(普化閣)이었다.
당시 보화각 건립에는 박길룡(1898∼1943) 건축사 등 당대 전문가들이 참여하게 되었고, 간송 역시 전시실의 진열장 스케치는 물론, 인건비와 유물 구입 등 각종 지출내용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기록해 나갔다고 한다. 그 일련의 기록들을 모아 지난 어느 따뜻한 봄날, 보화각의 재(再)개관전이 열리게 된 것이다.
문화(Culture)란, 일단 밀쳐두었다가 먹고살 만할 때 되찾는 분실물이 아니다. 엄동설한에도 그 밑뿌리가 살아있어야만 다시 싹이 나고 재생할 수 있는 유기체라고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요즘 케이컬쳐(K-culture)의 열풍도 급작스레 출현한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그 엄혹했던 시절에 밑불을 놓을 줄 알았던 ‘간송’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근대 여명기에 우리 문화의 자부심을 하나둘 일깨워가던 간송은 일찍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지만,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그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굳이 애먼 초혼가(招魂歌)를 부르고, 또 사자상(使者床)에 간장 종지까지 올려놓으며, 유한한 생명체의 단멸(斷滅)을 그렇게 애통해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본시, 이 시공간(space time) 자체가 생멸을 거듭하는 게 자연의 이치이자 순리일 텐데, 어디 불사조가 따로 있고, 봉황열반이 따로 있으랴?
글·사진. 최상철 Choi Sangcheol 건축사사무소 연백당
최상철 건축사· 건축사사무소 연백당
그동안의 건축설계 작업과정에서 현대건축의 병리현상에 주목하고, 산 따라 물 따라 다니며 체득한 풍수지리 등의 ‘온새미 사상’과 국가유산 실측설계 현장에서 마주친 수많은 ‘과거’와의 대화를 통하여 우리의 삶터를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건축’에 담겨있는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을 알기 쉬운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작품으로는 「애일당」, 「마중헌」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내가 살던 집 그곳에서 만난 사랑」, 「전주한옥마을(공저)」 등이 있다.
ybdcs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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