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내 가난한 풍요의 달 2025.12

2025. 12. 31. 10:20아티클 | Article/정카피의 광고이야기 | AD Story - Copywriter Jeong

December: The Month of My Poor Abundance

 

 

 

12월 안에 마쳐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었다. 끝이 아직 멀었다. 그런데 다른 일이 또 쌓인다. 일을 많이 맡은 것이 잘못일까, 아니면 향기로운 술잔과 다정한 만남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게 문제일까? 헷갈린다. 다시 오지 않을 하루하루를 귀하게 아껴 써야지 다짐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 열 시가 넘도록 침대에 붙어 있다. 휴일 아침의 늦잠을 떨쳐내지 못하는 게으름이 문제일까, 아니면 아직 내일이 남아있다는 막연한 기대가 잘못일까? 이것도 헷갈린다. 내가 이런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 이유는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만들어진 버거킹의 햄버거 광고를 보았기 때문이다.
2021년 버거킹은 소고기 패티 대신 식물성 패티를 넣어 고기 맛을 낸 햄버거 ‘불가능 와퍼’(Impossible Whopper) 광고를 팬데믹 시대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연결해서 만들었다. 광고에는 집에서 일하는 것인지 직장에서 사는 것인지 구별할 수 없는 재택근무, 사람 자체보다 프로필을 더 선호하는 데이트, 플라스틱으로 포장되어 비행기로 날아오는 기후변화에 대한 책, 재채기를 팔꿈치에 대고 하는데 그 팔꿈치를 부딪치며 하는 인사 등 코로나 시기 우리 삶의 역설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렇게 역설이 난무하는 혼란스러운 시대에는 고기 없이 고기 맛을 내는 임파서블 와퍼가 딱 어울린다고 주장한다.


Na)
조는 요즘 재택근무를 하는 건지, 직장에서 살고 있는 건지 헷갈린다.
엠마는 마크와 데이트하는 것보다 마크의 프로필과 데이트하는 게 더 좋다는 걸 깨달았다.
에스테반은 온라인 바이올린 마스터클래스를 들었지만, 아직 ‘마스터’와는 거리가 멀다.
더스틴은 기후변화에 관한 책을 샀다. 그런데 그 책은 플라스틱 포장에 싸여 비행기를 타고 영국에서 온다. 이제 그는 혼란스럽다.
제이슨은 오랜만에 현실 대화 속으로 뛰어들었다. 음소거도 안 되고, 카메라도 못 끄고, 듣는 동안 화장실도 갈 수 없다. 혼란스럽다.
트루디는 사무실에 가서 일하고 싶지만, 동시에 파자마 차림으로 일하고 싶다.
사이먼과 사라는 아기를 낳았는데, 사람들은 벌써 다음 아기는 언제냐고 묻는다. 지금 이 아이가 뭐가 문제라도 있는 걸까?
테런스는 기침은 팔꿈치에 대고 해야 한다는 걸 안다. 그런데 다들 팔꿈치 인사를 하지 않나? 또 혼란스럽다.
요즘처럼 혼란스러운 때엔, 버거킹의 불가능 와퍼(Impossible Whopper)가 딱이다.
소고기 없이 만든 와퍼, 그런데 (소고기가 들어간 것과) 맛은 똑같은 와퍼.

버거킹_불가능 와퍼(Impossible Whopper)_영상광고 : 혼란스러운 시대(Cnfusing Times)_ 2021

 

팬데믹이라는 헷갈리는 시대에 딱 맞는, 헷갈리는 버거를 출시한 버거킹은 이듬해 닭고기 없이 닭고기 맛이 나는 식물성 치킨 너겟을 내놓으며 코로나 시대의 재치 있는 광고 시리즈를 이어갔다.


Na)
게리의 딸은 오늘도 공주 드레스를 입고 싶어 한다. 이게 나쁜 양육일까?
자다는 전 남자친구에게 보낸 문자를 지우고 싶다. 하지만 그건 ‘문자를 지웠다’는 표시를 남긴다. 그게 원래의 문자보다 더 안 좋다.
프레데릭은 아이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 하지만 그러려면 먼저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전문가들은 아이를 갖는 것이 지구 환경에 가장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다.
스텔라의 이웃이 맥스라는 이름의 강아지를 한 마리 데려왔다. 그런데 스텔라 아들의 이름도 맥스다. 이웃이 강아지에게 사람 이름을 지은 걸까, 아니면 스텔라가 아들에게 강아지 이름을 지은 걸까?
대릴은 육체적인 만남을 위해 앱을 다운받았고, 그곳에서 아내를 만났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육체적인 관계를 갖지 않는다.
알레한드로는 블랙프라이데이에 친환경 세탁기를 샀다. 그건 환경을 위한 좋은 소비였을까, 아니면 아주, 아주 나쁜 짓이었을까?
소피는 수돗물이 위험하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리고, 플라스틱 생수가 지구를 망친다는 기사도 읽었다. 그녀는 어떻게 수분을 보충해야 할까? 3일 안에 알아내야 한다.
세상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진다. 그래서 버거킹은 닭고기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닭고기 맛이 나는 식물성 치킨너겟을 출시했다.
혼란스럽다.

버거킹_식물성 치킨 너겟_영상광고 : 더욱 혼란스러운 시대(Even More Confusing Times) 편_ 2022년

버거킹의 헷갈리는 시절 시리즈는 세계 3대 광고제의 하나인 클리오(Clio) 광고제에서 ‘교활한 풍자와 신랄한 관찰이 가득’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캠페인은 영상 광고에만 머물지 않았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흔하게 겪는 역설적인 상황을 나열한 라디오 광고를 내보냈고, ‘100% 혼란스러움 0% 닭고기’라고 너스레를 떤 인쇄 광고를 만들었다.


Na)
우리의 휴대전화는 점점 더 똑똑해지고 있다. 그리고 점점 더 혼란스럽다.
엘레나는 헤어진 남친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를 지우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메시지를 삭제했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처음의 문자보다 더 나쁘다. 그녀는 혼란스럽다.
미구엘은 방금 오래된 접이식(폴더블) 휴대폰을 업그레이드했다. 그런데 곧바로 새로 나온 접이식 휴대폰 광고를 보았다. 그는 업그레이드한 걸까 아니면 다운그레이드한 걸까? 그는 혼란스럽다.
테일러의 휴대폰에서 그녀가 사용하지 않는 유일한 앱은 전화 앱이다.
트레벨린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다시 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겨우 이틀 전에 업데이트를 했는데 업데이트 내용은 단지 아이콘을 다시 둥근 모양으로 만든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이 업데이트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혼란스럽다.
더욱 혼란스러운 지금은 버거킹의 식물성 치킨 너겟을 맛보기 가장 좋은 시기다.
닭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치킨 너겟, 닭고기 맛이 난다.
버거킹_식물성 치킨 너겟_라디오 광고:더욱 혼란스러운 시대(Even More Confusing Times) 편_ 2022년

 


코로나19가 창궐할 때는 문을 열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는 일이나 남들과 같은 공기를 숨쉬는 일마저 꺼림칙하게 여겨졌다. 6시 이후엔 두 명 혹은 네 명 이상 모이지 못 했고,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마음껏 모여 축하나 위로를 할 수도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해왔던 많은 행동이 전염병을 옮기는 원인이 되는 세상에서, 낯선 동네에서 길을 묻는 일도 조심스러웠다. 그 끔찍한 시절을 어떻게 견뎠는지 아득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3년 5월 5일 22시(제네바 현지시각 15시) 코로나19에 대한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공식적으로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2020년 1월 30일 비상사태 선포 이후 약 3년 4개월 만의 공식적 결정이었고, 국제사회는 이를 사실상 팬데믹 종식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우리 정부는 WHO 발표 직후인 5월 11일 팬데믹 경보 단계를 ‘심각’에서 ‘경계’로 하향 조정한다고 발표했고, 같은 해 8월 31일 코로나19를 독감, 수족구병 등과 같은 4급 감염병으로 전환해 국내에서 팬데믹 공식 종료를 선언했다.

버거킹_식물성 롱치킨/식물성 치킨 너겟_인쇄 광고:더욱 혼란스러운 시대(Even More Confusing Times) 편_ 2022년

마스크를 벗은 지 2년 4개월이 지났다. 코로나는 지나갔지만 혼란스러운 세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이 모순투성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일이 남았는데 약속 시간은 다가온다. AI가 내 일자리를 빼앗을까 두렵지만 AI에게 일을 시키는 게 벌써 익숙해졌다. 자식 갑질(?)에 마음의 상처를 입으면서도 자식 앞에서는 항상 비굴해진다. 제주 올레길, 서울 둘레길을 완주하겠다고 버킷리스트에 적어두고는 동네 산책조차 뒤로 미룬다.
계절마저 체감하는 시간을 벗어나 혼자 멀리 가있다. 겨우 8월을 넘겼나 싶은데 화들짝 철렁 덜컥, 12월이다. 돌아보니 올 한 해가 별똥별 떨어지는 순간처럼 짧은 하루 같다. 그 찰나 속에서, 어떤 하루는, 1년처럼 길고 길었다. 나태주 시인의 시처럼 ‘하루 같은 1년 / 1년 같은 하루, 하루’*였다.
아메리카 원주민인 퐁카(Ponca)족은 12월을 무소유의 달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12월이면 무엇이든 더 소유하고 싶어진다. 폭신한 목도리와 장갑, 따끈한 어묵 국물과 매콤한 떡볶이, 화나고 슬펐던 일을 잊는 망년(忘年)의 자리, 문래동 골목의 칼제비와 계란말이 정도는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두둑한 지갑, 늦도록 잔을 기울여도 거뜬한 체력 그리고 함께 나이 들어가는 오랜 친구들…
이런 것들을 욕심껏 쟁여두고 그 가난한 풍요 속에서 나는, 뒤죽박죽이던 2025년의 나와 작별하고 싶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2025년의 갈팡질팡을 추억하고 싶다.

 

 

Burger King - Confusing Times
버거킹_불가능한 와퍼(Impossible Whopper)_영상광고:
혼란스러운 시대(Cnfusing Times) 편_ 2021_유튜브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PihoSfE13o4&t=1s
버거킹_식물성 치킨 너겟_영상광고:
더욱 혼란스러운 시대(Even More Confusing Times) 편
2022년_유튜브링크


*나태주, 「12월」 일부, 『꽃을 보듯 너를 본다』(지혜), 2020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와 인연을 맺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의 벨컴과 독립 광고대행사인 샴페인과 프랜티브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일했다. 지금은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의 CD로 퍼포먼스 마케팅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응답하라 독수리 다방(2015)』, 『광고, 다시 봄(2019)』, 『똑똑, 성교육동화(2019)』 시리즈 12권, 『김민준의 이너스페이스(2020)』가 있다.

abacab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