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2026.6

2026. 6. 30. 10:20아티클 | Article/정카피의 광고이야기 | AD Story - Copywriter Jeong

“Do not be hasty with impatience”

 

일곱 시간 동안 기차가 달리는 모습만 보여주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었다. 열두 시간 동안 장작을 패고 쌓고 모닥불을 피우는 모습이나 뜨개질하는 장면을 생중계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134시간 동안 항해하는 크루즈 배의 여정을 아무 편집 없이 방송해서, 최장 시간 생방송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그 지루한 걸 누가 볼까 싶지만 그 나라 인구의 반 이상이 봤단다. 노르웨이 공영방송 NRK에서 제작한 「사크테-tv」의 얘기다. 사크테(sakte)는 노르웨이어로 ‘느린’이라는 뜻이란다. 영어로 하면 슬로(slow)-tv인 셈이다.
사크테-tv는 거창한 기획회의에서 탄생하지 않았다. 이 프로그램을 만든 프로듀서 토마스 헬룸과 프로그래밍 헤드 루네 뫼클레부스트는 ‘술집에서 나올 법한 엉뚱한 아이디어’였다고 회고했다. 2009년 베르겐-오슬로 철도 개통 100주년을 기념할 다큐멘터리를 고민하던 중 점심시간에 나온 발상이었다. 처음에는 내부에서도 황당한 아이디어로 받아들여졌지만, 그 황당함이 오히려 기획의 이유가 됐다. 제작진은 기차가 베르겐에서 오슬로까지 가는 7시간을 카메라 4대로 촬영하고 터널 구간에는 철도 100년 역사 아카이브 영상을 끼워 넣었다. 7시간 동안 내레이션이나 극적인 반전은 없었다, 광고도 없었다. 2009년 11월 27일 금요일, 사크테-tv의 첫 영상이 전파를 탔다. 방송하는 동안 노르웨이 인구 500만 명 중 124만 6천 명이 한 번 이상 시청했고, 그중 약 17만 2천 명 정도가 7시간 가까운 방송 대부분을 지켜봤다.

 

NRK 사크테-tv_베르겐철도_베르겐에서 오슬로까지:Minutt for Minutt_2009
NRK 사크테-tv_Boat Ride:후르티그루텐(Hurtigruten)_2011

 

2011년에는 판을 키웠다. 베르겐에서 키르케네스까지 노르웨이 해안선을 따라 134시간, 즉 5일 반짜리 크루즈를 생중계한 것이다. 기네스북이 세계 최장 생방송 다큐멘터리로 기록한 방송이다. 방송하는 동안 인구의 절반인 254만 명이 한 번은 채널을 틀었고, 최고 동시 시청자는 69만 2천 명이었다. 배가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각 항구 도시들이 경쟁하듯 환영 행사를 열었다. 한밤중에 선상 담당자 안나 빌트슈타인-하그베르그가 갑판이 너무 조용하다며 마이크를 잡고 즉흥 노래를 불렀다가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기도 했단다. 결혼 프러포즈가 세 건 카메라에 잡혔고, 노르웨이 여왕이 손을 흔드는 장면도 담겼다.


이후 사크테-tv는 기차와 배를 넘어 노르웨이의 일상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2012년에는 가울라 강 연어 낚시 시즌 개막일을 24시간 생중계했다. 첫 연어가 잡힌 것은 방송 시작 3~4시간이 지나서였다. 방송이 끝난 뒤 국장은 “조금 짧지 않았나요?”라고 농담을 던졌다. 2013년 장작의 밤(Nasjonal Vedkveld)은 4시간 대담을 한 뒤 8시간 동안 장작불 타는 것을 생중계했다. 100만 명이 시청했고 뉴욕타임스도 기사를 쓰는 등 해외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이 방송은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장작을 쌓을 때 나무껍질을 위로 해야 하나, 아래로 해야 하나를 두고 노르웨이 전국이 두 편으로 나뉘어 논란을 벌인 것이다. 장작불 생중계가 나간 뒤에는 ‘남자들은 장작의 밤을 가졌다. 이제 여자들에게 뜨개질의 밤이 필요하다.’는 시청자의 요구가 이어졌다. 제작진은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2013년 뜨개질의 밤(Nasjonal Strikkekveld)을 기획해, 자정에 양 한 마리를 무대에 올려 털을 깎고 실을 뽑아 스웨터를 완성하는 세계 기록에 도전했다. 또 짹짹 쇼(Piip-Show)를 기획해 카페처럼 꾸민 새 모이통을 놓아두고, 먹이를 쪼아 먹는 새를 3개월 동안 생중계했다. 2013년 노르웨이 언어위원회는 ‘사크테-tv(sakte-tv)’를 올해의 신조어로 선정했다.
사크테-tv의 황금률은 단 하나, ‘편집하지 않는다’이다. 프로듀서인 헬룸은 이것을 소 한 마리로 설명했다. 촬영 중 우연히 소 한 마리가 화면에 들어왔다. 카메라를 고정하고 끊지 않았다. 계속, 계속, 계속. 그러자 이야기가 생겨났다. 이 소는 뭘 하는 걸까, 왜 혼자 있을까, 어디로 가는 걸까…. 헬룸은 이렇게 말했다. “삶의 많은 부분은 지루합니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흥미로운 순간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기다려야만 합니다.” 사크테-tv는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로 퍼졌고, 영국항공은 베르겐-오슬로 기차 여행 영상을 장거리 항공편의 기내 채널에 넣었다. BBC는 영국판을 만들었고, 스웨덴은 엘크가 이동하는 모습을 3주간 생중계했다. 광고 없는 공영방송이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실험이, 21세기 빠른 미디어 시대에 가장 느린 방송으로 살아남았다.

 

NRK 사크테-tv_장작의 밤, 연어 강(Lakseelva), 뜨개질의 밤, 짹짹 쇼(Piip-Show)

 

나는 언제나 서둘러야 했다,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늘 할 일을 과연 오늘 다 끝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매일의 기본값이었다. 일이 넘쳐흐르면 한숨을 쉬면서 목록을 적었다. 적으며 ‘하나씩 하나씩!’이라고 중얼거렸다.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할 수는 없으니 ‘하나씩’을 실천은 하지만 조급한 마음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내가 하는 일의 의미나, 가치를 셈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해야만 하는 일은 밥벌이였고 최소한의 요리와 청소였고 스스로 만든 인연에 대한 돌봄이었다. 어쩌다 아무 숙제가 없는 날엔 혹시 잊은 건 아닌지 머릿속을 가만히 뒤적여 보기까지 했다. 멍하니 구름의 움직임을 쳐다보거나 한가하게 빈둥거리는 일은 사치에 가깝게 느껴졌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는데 노르웨이 인구의 절반이 사크테-tv의 134시간짜리 크루즈 생중계를 시청했다는 숫자를 보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1년 넘게 언제 끝날지 아득한 일의 목록을 끼고 살았다. 마감이 다가올수록 급하고 불안해졌다. 조급함이 최고에 달했을 때 김수영 시인의 「봄 밤」을 만났다.

 

봄 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는 땅 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靈感이여


_ 김수영/1957

 

‘서둘지 말라’고 속삭이는 김수영의 「봄 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각각 딱 맞는 속도로 시간이 흐르고 있는 사크테-tv의 화면을 떠오르게 했다. 김수영을 읽으며, 서둘러 달려가는 마음을 불러 세웠다. ‘당황하지 말라’고, 천천히 해도 괜찮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아니 그래서 몸과 마음이 고요한 날을 기다린다.
지루한 날들이 지겹게 계속되다가 아주 가끔 흥미로운 일이 생기는 인생이면 좋겠다.
이제 내게 완벽한 날이란 새가 모이를 쪼는 속도로 느릿느릿 흘러가는 하루다.

 

https://www.youtube.com/watch?v=fCD2Rs_wUtM&list=PLPWAiTZVyHAtBNpBjNveHFLfb8_Qdti3t
NRK 사크테-tv_베르겐철도_베르겐에서 오슬로까지:Minutt for Minutt_2009_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hFd_jOr5X9E&list=PLh_yTud_b4M-U-jCIMAFy8cPvrvDIjWYE
NRK 사크테-tv_Boat Ride:후르티그루텐(Hurtigruten)_2011_유튜브 링크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와 인연을 맺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의 벨컴과 독립 광고대행사인 샴페인과 프랜티브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일했다. 지금은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의 CD로 퍼포먼스 마케팅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응답하라 독수리 다방(2015)』, 『광고, 다시 봄(2019)』, 『똑똑, 성교육동화(2019)』 시리즈 12권, 『김민준의 이너스페이스(2020)』가 있다.

 

abacab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