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7. 09:07ㆍ아티클 | Article/정카피의 광고이야기 | AD Story - Copywriter Jeong
Everyone needs someone
지금의 내 나이에 죽어버린 선배의 1주기 추모식에 갔었다. 학생운동을 거쳐 오랜 세월 노동운동에 헌신하다가 병을 얻어 고향인 제주도에 내려가 살던 선배였다. 납골당이 있는 추모공원에 마련된 제례실에 조촐한 제사상을 차려놓고 선후배와 가족들이 둘러 앉았다. 모인 이들의 대다수가 죽은 이보다 나이가 많았다. 선배는 죽어 나이가 멈추어 버렸는데 나만 나이가 들어, 나도 선배와 동갑이 되었다. 길지 않은 생애의 약력을 읽고 선배의 친구가 추모사를 낭독했다. 둘러 앉은 사람들이 돌아가며 선배와의 인연이나 추억을 이야기 했다. 이른 아침 비행기로 내려온 후배는 추모식 내내 훌쩍거렸다. 덩치가 산 만한 녀석이 “형 좋아했어요. 지금도 좋아합니다.” 겨우 두 마디를 어렵게 말하고는 다시 우는데 나도 덩달아 눈가가 뜨거워졌다. 추모식 끝에서는 모두 소리를 모아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각자 종교도 다르고, 추모의 예식도 다르니 학교 다닐 때 자주 어울려 불렀던 노래를 부르는 것은 괜찮은 선택이었다.
나는 무슨 말을 했던가? 선배에 대한 기억을 더듬자 집에 있는 고사리 나물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선배가 손수 뜯어 말렸다며 보내준 나물이다. 살림은 언제나 뒷전인 내게 나물 반찬 만드는 일은 노벨상 받는 일만큼이나 멀고 먼 일이어서 받은 지 3년이 되도록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아, 그리고 뒷모습…. 제주 집으로 가려던 공항에서 위급한 상황이 되어 응급실로 실려갔다가, 임시로 수소문해 들어간 신촌 어느 병원의 입원실에서 선배를 만났다. 아니 벽을 보고 잠든 선배를 보았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는 뒷모습이 고작 대여섯 살 아이처럼 작아 보였다. “형 만날 때마다 구박 했어요. 막걸리 마시지 말라고, 몸 잘 돌보라고. 괜히 그랬어. 이렇게 빨리 갈 줄 알았으면 그냥 맘 편하게 마시라고 할 걸….” 일어나서 이런 얘기를 했다. 어떤 거창한 기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사소한 목소리 뜻없이 한 말들만 생각났다. 세상 뜨기 일주일 전, 서울대 병원에서 마지막 보았을 때도 선배는 병을 이기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털고 일어나겠다고 말했고, 친구가 싸가지고 간 과일을 맛있게 먹었다. 선배의 부고를 듣고 달려간 장례식장에 앉아 국밥을 먹었다. 선배가 차려준 밥이니 잘 먹어야겠다 중얼거리며 국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오랜만에 만난 선후배들과 슬프지만 반가운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49제는 작년 12월 31일이었다. ‘날도 참 잘 잡는다,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거야 형’ 속으로 선배에게 말했다.
제주도에서 선배는 다른 이의 과수원을 빌려 저농약으로 귤농사를 지었다. 농약을 안 쳐서 병충해가 생기면 자기 과수원까지 옮는다고 옆집 과수원 주인에게 야단을 맞기도 했단다. 선배가 키운 노지 귤은 유난히 달았다. 팔아준다는 마음으로 주문했다가 달콤한 맛에 반해 다른 집에 선물로도 보냈다. 노지 귤이 나오는 철이 되니 선배의 귤이 먹고 싶다. 선배가 못난 글씨로 운송장을 적은 귤 상자를 받고 싶다. 그런데 2억 가지가 넘는 상품을 취급한다는 전자상거래의 거인 아마존(Amazon.com)에서도 선배가 키운 귤은 찾을 수가 없다.
쓸쓸한 마음으로 아마존의 올해 연말 광고를 찾아 보았다. 스마일 심볼이 그려진 아마존의 배달 상자를 가득 실은 트럭이 달린다. 아마존의 상자를 들고 기차를 탄 사람도 있다. 눈보라 치는 추운 벌판에서 배달된 상자를 받는 사람도 있고 아파트에서 받는 사람도 있다. 한 해를 정리하며, 크리스마스 즈음에 누군가의 산타가 되어 선물을 사고 보내고 받는 모습이 정답고 따뜻하게 보인다. 등장 인물들이 돌림노래처럼 이어서 부르는 노래 가사에 ‘모든 사람들은 누군가가 필요해요’(Everybody needs somebody)라는 구절이 반복된다. 사랑할 사람이 필요하고 그리워할 사람, 입맞춤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가사에 고개를 끄덕인다. 맞다, 이 땅에 살아있는 우리는 누구 한 명 예외없이 누군가가 필요하다. 어깨를 감싸줄 사람, 얼굴을 묻고 울 수 있는 사람,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불러내도 되는 사람….
노래) 모든 사람들은 누군가가 필요해요.
모든 사람들은 사랑할 누군가가 필요해요.
모든 사람들은 누군가가 필요해요.
그리워할 누군가가,
입맞춤할 누군가가.
나는 네가 필요해, 너, 너 바로 네가.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가 필요해요.
입맞춤할 누군가가,
그리워할 누군가가.
Na) 내가 하나 알려줄 얘기가 있어요.
그 누군가를 가졌다면 그 사람을 꽉 잡으세요.
그들이 어디에 있든 당신의 사랑을 전하세요.
아마존닷컴_TVCM_2019_카피
선배가 떠나고 1년이 지났다. 아무도 죽지 않은 것처럼 세상의 시간은 흘렀다. 아무도 잃지 않은 것처럼 나의 시간도 흘러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지난 1년, 나는 삼백 예순 다섯 날만큼 기뻤고 슬펐고 불행했고 행복했다. 그 때마다 예상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나타나 나의 기쁨을 진심으로 함께해 주었고, 나의 슬픔을 덜어주었다.
아주 힘겹게 여름을 보내고 있을 때는 지구를 반 바퀴 돌아야 닿는 곳에 사는 친구가 와서 많은 시간을 내주었다. 책을 내기 위해 일본어 번역 감수가 필요한 순간에는 마침 일본에서 귀국한 선배가 귀찮아 하지 않고 해결해 주었다. 선배들은 이 늙은 후배의 재롱을 어여삐 봐주었고, 후배들은 이 모자란 선배를 기꺼이 찾아주었다. 보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인간의 바닥을 만나기도 했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게 쏟아지는 위로와 배려를 누리기도 했다. 살아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살아 있었기에 먹고 마시고 웃고 울 수 있었다.
1년의 끄트머리에 서서 나는 나와 인연 맺은 누군가에게 마음 속의 인사를 건넨다. 내 곁을 떠나간 당신, 잊고 사는 날이 많지만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야. 나를 배신한 당신, 죽어 버렸으면 싶게 밉지만 한 때의 진심까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내 옆에 있는 당신, 나를 참아주어 고마워. 당신 덕분에 나 무너지지 않고 살고 있어. 멀리 있는 당신, 비 오는 날에도 꽃피는 날에도 그대 얼굴 보고 싶어. 지금은 잊혀진 당신, 혹시 나를 기억한다면 먼저 연락해 줘. 미안함까지 보태 열 배로 반길게…. 그리고 그 모든 누군가에게 떼를 쓰듯 부탁한다. 부디 오래 살라고. 이희중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당신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해질 때까지’ 내 곁에 있어 달라고. 내 곁에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할 누군가가 되어 달라고…. 여기 이희중 시인의 시를 덧붙인다.
상가(喪家)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
오래오래 살아서
내가 그들 곁에 있다는 사실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고
그보다 더 오래오래 살아서
지긋지긋한 일이 될 때까지
견뎌야 한다
그러고도 더 오래오래 살아서
내게도 그들이 지긋지긋한 존재가 될 때까지
더 견뎌야 한다
그래야 순순히 작별할 수 있다
유족과 조객들이
영안실에서 밤새 웃고 떠들며 논다
고인도 그 사이에 언뜻언뜻 보인다
- 이희중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업 계에 입문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주)샴페인,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 계열의 벨컴에서 크리에이티브 디 렉터로 일했다. 독립대행사인 (주)프랜티브에서 ECD로 일하 다 독립하여 다양한 광고물 제작과 글쓰는 일을 하고 있다.
abacab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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