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4.3.그룹과 건축교육

2023. 1. 11. 09:21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건축담론 Architecture Discussion

 

편집국장 註

 

건축은 산업이면서, 기술이고, 문화고, 예술이다. 물론 건설을 동반해야 한다. 혹자는 이런 부연 설명을 마다하고 “건축은 건축이다”라고 말한다. 건축하는 사람들은 공감하지만 건축의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은 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기술이나 문화, 예술로 빗대어 설명해야 한다.
건축은 한마디로 이런 모든 인문학과 공학을 담고 있다. 인문학과 공학을 엮으면 사유가 되고, 이는 철학이 된다. 그래서 건축의 연대기를 보면 수많은 철학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당연히 상징과 이면의 내용을 언급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공학과 인문학적으로 표현할 때 우리는 건축에 ‘~ISM'을 붙인다. 철학이다. 그리고 이는 여러 건축을 구분하는 논리적 바탕이 된다. 
사실 우리나라 건축에서 가장 필요하고,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 절실한 것이지만, 조선시대 이후 산업화 과정을 지나는 동안 우리에게 부재한 것이기도 하다. 존재가 없었다. 조선 건축 이후로 구분 지을 만한 건축의 이야기가 없었던 것이다. 움직임도 크게 없었고…….
지난 19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에 IMF 경제 위기가 오기 전까지 ‘한국적’ 건축의 정체성 부재에 대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어떤 구체적 철학적 이야기나 바탕이 만들어지기 보다는 한국 건축 ‘사회’에 대한 치열한 논쟁과 움직임이 전개되었고, 3040 건축계 인물들이 논쟁을 시작했다. 아마도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움직임이었을 것이다. 바로 ‘43그룹’이라고 하는 일단의 인물들이다. 이런 시도는 더 많아지고 치열해지고 다양해야 하지만, 산업 건축 주류인 우리나라에서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들 ‘43그룹’은 오늘날 대한민국 건축계의 원로들이 되었다. 
최근 “다시 한국 건축을 고민하자”는 언급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 건축의 진보와 발전을 위해서라도 우리 건축에 대해서 뜨겁게 논의했던 그 시절의 ‘43그룹’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런 이유로 이번 건축 담론에서는 ‘43그룹’이 다음 세대들에 전하는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01 4.3 Group and Architecture Education 

 

벌써 십년의 세월이 지났다. 2011년 4.3그룹의 활동 20주기를 맞아 목천건축아카이브가 주관하여 구술채록을 진행하면서 관련 전시와 심포지엄을 함께 개최하였다. 이때 참가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또 관련 자료를 검토하면서 스스로 든 생각은, 4.3그룹이 한국의 건축계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바로 교육에 있다는 것이다. 그에 관한 내 생각과 심포지엄의 전체 내용은 관련 자료와 함께 『전환기 한국건축과 4.3 그룹』(도서출판 집, 2014)으로 묶여 출간되어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이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4.3그룹의 활동 시기는 1990년부터 1994년에 걸쳐있지만, 집중적인 활동 시기는 세기말의 유럽 건축기행과 전시회가 있었던 1991~2년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막 독립하여 새로운 건축작업을 시작한 30대와 40대의 신예들이 자신의 건축 언어를 찾기 위한 방편으로 소모임을 결성하고, 주로 외부 강사를 초청한 강의와 자신들의 작품을 발표하는 세미나, 그리고 국내외의 건축 현장을 찾아가는 답사를 통하여 학습의 기회를 공유하였다.
그 시작은 당시 그들이 얼마나 준비 없이 작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지를 자각하는데 있었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얻은 경험들을 후진에게 넘겨주는 교육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4.3그룹이 처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들이 선도한 수준 높은 인문학 강의와 해외 건축 답사는 당시 번성하였던 건축 잡지에 연거푸 소개되면서 건축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나아가 이들이 중심적으로 참여한 여러 건축교육 실험들은 당시의 제도권 학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그 결실은 2002년 시작된 5년제 건축학 교육의 분리 독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4.3그룹과 관련 건축단체의 구성원 분포



지금의 시점으로 본다면, 겨우 열 명 남짓의 그것도 아직 경력이 일천한 30대와 40대의 젊은 작가들이 우리나라 건축계 전반에 영향을 끼친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의구심이 들 정도이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사람이 아니라 세대의 문제였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4.3그룹의 활동과 그 영향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1990년대 초라는 시점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건축 외부의 일반 사회를 기준으로 본다면 1990년대의 한국 사회는 간단히 민주화와 세계화의 시기로 간추릴 수 있다. 요령부득의 ‘한국적 민주주의’로 대변되는 국가주의 내지는 군부독재가 이전 시기의 상황을 요약한다면, 대통령조차 그 뜻의 차이를 몰라 헷갈려했던 국제화 또는 세계화는 결국 무차별적인 문호개방 그리고 사실은 미국식 가치기준과 제도의 적극적 수용에 다름 아니었다.
건축 내부로 본다면, 오랜 기간 한국 건축계를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였던 김중업과 김수근이라는 양김 선생이 1980년대 후반 잇달아 타계하면서 3, 40대의 젊은 세대는 정신적 지주를 잃고 방황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외 개방에 따른 경제의 폭발적 성장으로 전에 없던 많은 새로운 프로젝트가 연발하여 건축 시장이 극적으로 확장되어 가던 시기였다. 덩치가 커지면서 기존의 기관이나 단체는 전례 없는 양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새로운 시대에 맞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리더십은 오히려 약화되는 상황을 공통적으로 겼었다.
4.3.그룹은 이 힘의 공백, 혹은 권력과 권위가 불일치된 틈새에 자리하였다. 아니 4.3그룹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 참여에 좀 더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건미준(건축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을 결성하였고, 이는 후에 민예총(뒤에는 민건협) 그리고 더 멀리는 새건협으로 이어진다. 제도권 안에서도 경기대학에서 튜터 시스템에 근거한 새로운 건축설계교육에 대한 실험이 있었고, 이 경험은 sa(서울건축학교)로 이어진다. 현업의 건축사들이 참여하는 새로운 형식의 설계 교육에 대한 갈망은 커서, 이러한 설계워크숍은 대전과 대구, 광주전남 등 지역 단위의 학교와 대한건축사협회 시도건축사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건축캠프, 한국건축가협회에서 주관하는 대안학교인 SAKIA와 민건협의 여름건축캠프 등 다양한 형식으로 퍼져나갔다.

 

2012년 12월 6일 인사동 KCDF 갤러리에서 열린 4.3그룹 20주년 기념 전시의 모습


경기대의 건축교육 실험이 설계스튜디오의 튜터제를 선보였다면, sa는 인문학 강좌와 건축기행, 그리고 이 둘을 묶은 설계워크숍의 형식을 보급하는데 공로가 있다. 이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건축과 인문학의 관계 설정은 스스로의 건축 작업이 단지 기술적 차원의 해결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결과여야 한다는 당위를 만들어 내었고, 스스로의 작업을 하나의 개념으로 이어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 말하는 인문학이란 전통적으로 건축학 내부에 있던 건축역사학을 넘어서, 미술사학과 예술학, 그리고 문학과 철학 등 협의의 인문학은 물론 사회과학, 심지어 과학과 공학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전 학문 분야에 걸친 지식의 확장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이러한 박학의 굴레가 피로감을 주기도 하고, 또 디지털 건축 등 신기술 습득의 압박 또한 커지면서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지만, 다가올 21세기를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채로 맞이하고 있던 세기말의 정서에서는 뭐라도 기댈 곳이 필요했으리라.
건축기행은 이미 1970년대부터 각 대학의 건축과 학생회나 동아리 활동 등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이 시기엔 마이카 시대의 개막과 함께 전국의 구석구석을 누비는 개별 여행이 확산되고 또 해외여행 자유화 시대를 맞아 외국의 건축물 기행이 학생, 일반 할 것 없이 유행처럼 퍼져나갔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의 튜터가 10명 내외의 소수의 학생들 담당하여 설계의 전 과정을 대면 지도하는 튜터제는 특별한 이념적 지향에 따른 변화라기보다는 비정상이 정상화되는 자연스런 과정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같은 날 열린 심포지엄 후의 기념 사진

 


4.3그룹의 활동은 1994년에 마무리되었지만, 그 후 앞서 언급한 sa와 각종의 건축캠프, 그리고 민건협 등의 활동은 200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2002년 마침내 건축학 교육 개편이 이루어진다. 즉, 건축학과 건축공학의 교육이 분리되고, 건축학에는 5년제의 설계 중심 교육프로그램이 시행되었다. 건축학 교육개편의 발단은 엉뚱한 곳에서 시작하였다. 당시 셰계 단일 시장을 꿈꾸며 발족한 WTO 체제 하에서의 전문자격의 국제적 상호 인증을 위하여, UIA의 자문을 거쳐 건축사가 되기 위해선 대학에서 최소 5년의 전일교육이 필요하다고 결정하였고, 무역에의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정부는 서둘러 이 기준을 충족시키길 원하였다. 그래서 외교부에서 국토부를 거쳐 교육부에 전달된 정부의 의지가 서울대학을 시작으로 각 대학에 퍼지게 된 것이다.
5년제의 새로운 교육과정이 비교적 순조롭게 정착된 데에는 앞서 언급한 선행의 건축교육 실험들의 역할이 컸다. 이제 새로운 교육프로그램을 시행한지도 벌써 20년이 가까워지고, 그 졸업생들은 이미 건축사가 되어 현업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 성패를 논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고 또 학교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외국의 건축대학들과 교류를 하면서 느낀 바로는 국제적 수준의 교육이라고 하는 일차적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오히려 부족한 것은 수준은 국제적이지만 내용은 지역적인, 특색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가는 일로 보인다.

30년 전 4.3그룹에 참여하였던 건축사들은 지금 60대와 70대가 되어 현장에서 활동하는 가장 원로그룹에 속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과 글을 묶어 책으로 내고, 국내외에서 활발한 건축전을 여는 등 새로운 건축사의 이미지를 집단적으로 구축한 첫 세대로 기록될 것이다. 첫 세대와 낀 세대의 차이는 이후에 그 맥락이 계승되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1990년대라고 하는 한국 현대사의 큰 변곡점을 통과하며 4.3그룹의 멤버들은 앞 세대의 뒷자리가 아닌 뒷 세대의 앞자리를 차지하였고, 그것은 이들이 교육의 이슈를 선점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영광이었다.

 

 

 

 

 

 

 

 

글. 전봉희 Jeon, Bonghee 서울대학교 교수, 건축학

 

 

 

글. 전봉희 Jeon, Bonghee 서울대학교 교수, 건축학

 

1992년 조선시대 씨족마을에 관한 연구로 서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97년 이후 서울대에서 재직하고 있다. 건축역사와 건축아카이브, 건축문화유산의 보존관리 등에 주력하고 있으며, 문화재위원과 한국건축역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현 서울대 박물관장.

 

 

 

 

jeonpark@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