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기행경복궁에서 영월 김삿갓 묘까지 2021.1

2023. 1. 30. 09:04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Feng Shui Trip From Gyeongbokgung Palace to Yeongwol Kim Satgat Mausoleum 

 

경복궁의 풍수지리적 고찰

경복궁의 뒷산인 북악산(北岳山)은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백악(白岳)’으로도 불린다. ‘흰 바위를 이고 있는 산’이란 뜻이겠지만 ‘백(白)’은 원래 ‘으뜸’의 뜻을 갖고 있으니 고을의 으뜸 산인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이 북악을 서울의 주산으로 정한 것은 풍수지리학적인 면을 크게 고려해서다. 이 산은 양쪽으로 두 팔을 힘차게 펼쳐 청룡(靑龍), 백호(白虎)의 긴 맥을 이루어 놓았다. 그 앞으로 넓은 평지, 정면으로는 안산(案山)에 해당하는 알맞은 높이의 남산을 바라보고 있다. 풍수의 대가인 도선국사도 이 산을 “가히 궁궐의 주룡(主龍)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 팔조 총론(경기 편)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태조가 중 무학을 시켜 도읍 터를 정하도록 하였다. 무학이 백운대에서 맥을 따라 만경대에 이르고, 다시 서남쪽으로 비봉에 갔다가 한 대의 돌비석을 보니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 : 무학이 산의 맥을 잘못 찾아서 여기에 온다)」라는 6글자가 있었는데, 이는 도선이 세운 것이었다. 무학은 길을 바꿔 만경대에서 정남 쪽 맥을 따라 바로 백악산 밑에 도착하였다.

세 곳 맥이 합쳐져서 한 들로 된 것을 보고 드디어 궁성 터를 정했는데, 곧 고려 때의 오얏(나무)을 심던 곳이었다. 이 태조는 왕이 되자 새 나라의 기틀을 잡기 위해 도읍인 한양(서울)의 어디쯤에 궁궐터를 잡을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다시 어명을 받들어 새 왕도를 찾아 나섰던 무학대사(1327~1405)는 인왕산을 진산으로 삼고, 백악과 남산을 좌우의 용호(龍虎)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개국공신인 정도전(1337~1398)의 주장은 달랐다.

예로부터 제왕은 남면(南面) 하여 나라를 다스렸지 동향(東向) 하였다는 말은 들어본 일이 없다면서 북악을 주산으로 삼고, 인왕(仁王)과 낙산(駱山))을 좌우 용호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반대 의견들도 있었다. 크게 세 가지였다. 북악산이 돌산으로 험악하고, 경복궁 좌우로 흐르는 물이 부족하고, 북서쪽(현 자하문 쪽)이 골이 졌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풍수 관료가 이양달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 태조는 갈등 끝에 ‘북악 주산론’의 정도전의 뜻을 따라 궁궐터를 정했다. 경복궁이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게 된 것은 바로 태조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논란이 있어 1433년 풍수 관리 최양선이 장문의 상소를 올려 “경복궁 터가 흉하며 승문원 터(현재 현대건설 사옥과 운현궁)가 좋다”는 주장을 펼쳐 세종은 풍수 관리와 대신들로 하여금 다시 논의케 하였다. 또한 직접 북악산에 올라가 그 진위를 살핀 뒤 경복궁 터가 길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1865년 흥선대원군은 이곳에 궁궐을 중창한다. 그는 풍수에 능하여 아버지 묘를 ‘2대 천자가 나온다’는 예산으로 이장한 주인공이다. (김두규의 국운풍수)

경복궁(景福宮)이란 이름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 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는 말에서 두 글자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위와 같이 경복궁의 위치는 당시의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것으로, 산을 받치고 도읍 터의 북쪽에 자리 잡았다. 궁의 정면으로 넓은 시가지가 있고 마주 보이는 남쪽에 안산인 남산이 있으며, 내수(內水)인 청계천과 외수(外水)인 한강이 흘러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의 더없이 좋은 명당 터다.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에서 참조)

 

사진 1) 경복궁 근정전 전경


우리나라의 지세는 백두대간에서 한북정맥이 출각하여 춤을 추듯이 뻗어 내려오면서 중후하고 수려한 북한산 줄기가 북악산에 이르렀다. 북악산은 화강암이 박환(깎이고 다듬어짐)이 돼서 매우 좋은 산으로 인자한 장군의 상인데 후장(뒷면)이라 안 좋다는 일부 지사의 주장도 있다. 이러한 사전 지식을 습득하고 서울건축사 풍수지리연구회에서는 2020년 5월 29일 경복궁 답사를 하였다. 박시익 건축사(본 연구회 고문)의 설명에 따르면 정도전이 현재의 경복궁 위치를 택한 것 중 가장 큰 이유로 남향을 들었다. 그리고 무학대사가 반대한 이유를 세 가지로 들었는데, 첫째로 용이 순하지 못하고 흉측(두 개의 눈)하여 동족상쟁의 우려가 있다. 둘째는 백호의 맥이 끊어져 있고 셋째는 관악산이 정면으로 보여 화(火)의 기운이 우려된다. 이 외에도 주산인 북악산 뒤에 조산(祖山)인 북한산이 너머다 보이는 형상으로 강대국(중국 등)이 넘보게 된다는 것이다. (사진 1)

사진 2) 경복궁 교태전 전경


경복궁의 중심 건물은 근정전(국보 223호)이지만, 혈처(穴處)는 교태전(交泰殿)인데 궁의 내전으로 왕비가 거처하던 침전이다. 교태전이라는 명칭은 주역(周易)의 64괘 중 태(泰)괘에서 따온 것인데 괘의 형상은 위로는 곤(坤)이고 아래는 건(乾)이 합쳐진 모양이다. 지천태(地天泰), 즉 땅과 하늘의 기운이 조화롭게 화합하여 만물이 생성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건물엔 용마루가 없다. 왜냐하면 왕자를 생산하는 곳이기에 하늘의 기운을 받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위가 땅(곤)이고 아래가 하늘(건)로 바뀐다는 점이다. 이것은 여성 상위를 뜻함이다. (사진 2)

 

사진 3) 교태전 후원 아미산


교태전 앞에서 좌향(坐向)을 확인하고(계좌정향 癸坐丁向) 뒤에서 L-rod 테스트를 해보았다. 결과 북악산 중심 맥이 교태전 후원의 아미산(계단식 화단)을 통해 이 건물 중심부로 들어왔다. 따라서 이곳이 경복궁의 혈처이고 명당자리인 것이다. (사진 3)

경복궁에서 보면 조산(朝山)인 관악산이 천지정위(天地正僞)로 음양이 바로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청룡과 백호도 중요하지만 안산과 조산이 중요하다. 단, 관악산이 화산(火山)이라 화재의 기운을 막고자 숭례문의 현판 글씨를 세로로 만들고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세웠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진 4) 경회루 연못

경회루(慶會樓)도 돌아보았다. 이곳은 궁궐의 연회 장소로 왕실 정원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건물 주변의 연못엔 남원의 광한루처럼 3개의 섬이 있는데, 이것은 삼신사상(三神思想)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반영한 삼신산(三神山)을 의미한다. 삼신산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세 신산으로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추산(瀛湫山)이다. 사기(史記) 열자(列子)에서 비롯된 이야기로 중국 진시황과 한무제가 불로사약을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수천 명을 보냈다고 한다. 그 이름을 본 떠 우리나라의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추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진 4)

경회루의 기둥은 24개로 우리나라 24절기를 의미하며 국회의사당 형태적 모티브로 제공되었다. 참고로 궁궐의 마당에는 나무가 없는데, 이는 풍수적으로 마당 안에 나무가 있으면 곤궁해지고(곤困) 자객이 숨어들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 자금성 안에도 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 잔디 또한 죽은 자의 무덤에 심는 것으로 여겨 궁 안 마당에는 심지 않는다.

 


영월 망산과 주천강

사람은 태어나면서 먼저 그 산천(山川)을 닮는다. 필자는 소싯적부터 산을 좋아해서 산으로 많이 돌아다니다 자연스럽게 풍수를 접하게 되었다.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知者樂水)’라고 했던가. 어진 사람들은 대개 산을 좋아하는데 산수와 인심 그리고 학풍은 뛰어나지만 돈보다는 명예를 중시하고(그래서 학교나 도서관 연구소 등은 고 지대에 적합)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들은 물을 좋아 한다고 했는데, 물은 바로 돈(재물)과 연결된다. 

사진 5) 주천 지형도

대개의 도시들은 평지에 위치하며 강이나 바다를 끼고 있는데, 이것은 강과 바다를 통해 각종 물산이 유입돼 시장이 활성화되고 경제력이 커지면서 인구 유입이 늘어나고 땅값과 집값이 오르게 되는 것이다. 수도 서울이 대표적인 경우이며 풍수에서는 높은 지대(산동네) 보다 낮은 곳에 재물이 모이는 이치가 바로 그것이다.
영월의 주천면은 산(망산 등)의 능선과 강물(주천강)의 곡선이 동심원을 이루는 형국이며 물이 궁수(弓水)로 환포하고 있어 받아들이고 얻어내는 형상으로 모든 것을 내 편으로 만드는 지형이다. (사진 5)

사진 6) 망산 빙허루


풍수에서는 산의 높이 보다 지세가 좋고 인물이 나올 수 있는 산을 명산으로 본다. 망산(望山:392m)이 바로 야트막하지만 명산급이다. 주천면(酒泉面)은 글자대로 술 솟는 샘이 있는 마을이다. 술이 좋다는 것은 바로 물이 좋다는 의미로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지명인데 조선시대 지리지에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선비들이 술을 마시는 자리는 누각이나 정자가 있기 마련이고 주변 경관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아야 한다. 망산 끝자락엔 주천이란 지명을 유래하게 만든 주천샘이 있을 뿐 아니라 바로 그 아래 주천강이 흐른다. 강 옆의 산 위엔 망산의 명물 빙허루(憑虛樓)가 있는데, 욕심을 버리고 허공에 기댄다는 의미로 조선조 숙종이 꿈에 본 좋은 자리에 만든 누각으로 전하며, 사방이 탁 트여 전략적으로도 중요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누각에 앉아 술 한 잔 마시며 경관에 취하고 술에 취해 음풍농월했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사진 6)

 


망산은 글자 그대로 주변을 내려다볼 수 있는 산이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사방이 보인다. 과연 주천읍 뒤로 마주 보이는 산들이 목형(木型)의 문필봉과 금형(金型)의 노적봉으로 인물과 재물을 두루 갖춘 인재가 탄생할 만하다. 실제 이곳 출신 국회의원만 4명이다. (사진 7)

 

사진 7) 빙허루에서 본 주천읍과 산


또한 망산은 갈마음수형 명당으로 알려져 있는데, 망산에서 주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주천읍은 만선한 배가 떠나는 쌍돛대 형국의 명당이라고 한다. 하지만 1960년대 전후 시멘트 광산이 들어서면서 산이 훼손돼 돛대가 전부 부러져 버렸다고 한다. 그 뒤부터 인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고도 한다. 산의 암석 채취는 화를 당한다. 이렇듯 풍수는 자연과의 교감이 핵심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사진 8) 김종길 전통가옥


주천면 김종길 전통가옥

조선 순조 27년(1827년)에 세워진 중부지방 양반가옥의 전형을 보여주는 대표적 건축물로 강원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우람하고 장중한 대들보와 아름답게 다듬어진 상량, 힘 있게 기와를 받치고 있는 서까래가 위풍당당한 이 가옥의 특징은 지붕의 합각을 음양의 이치에 따라 동쪽에는 해를, 서쪽은 달로 장식한 매우 독창적인 것으로 이 집이 유일하다. 이 집은 1996년 타계하신 김종길 선생의 6대조께서 건축하였다고 하는데, 풍수적으로 볼 때 ㅁ자 형태의 마당이 장방형으로 길고 안채에서 봤을 때 주천강 너머로 망산의 마이봉이 둥그스름한 금산의 노적봉으로 아주 길한 양택이다. (사진 8) 

 

사진 9) 어라연 계곡


정감록 십승지 중 하나인 어라연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에는 십승지지(十勝之地)가 나온다. 전쟁이나 전염병, 흉년에도 끄떡없는 대표적 명당이자 깊은 피난처이기도 했다. 영월은 강원도에서도 유일하게 10승지지가 있을 정도로 깊고 외진 고장이다. 영월읍 동편엔 한강 상류가 남북으로 흐른다. 그런데 한강 동부의 만경대산 줄기가 동서로 뻗어 한강의 지류로 북쪽의 함백천과 남쪽의 옥동천의 분수령이 된다. 거운리 일대에 있는 이 곳 어라연이 바로 십승지 중 하나이다. 세월이 흘러도 멎지 않고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잠시 피안의 세계에 와 있는 듯하다. (사진 9)

 


김삿갓(김병연) 묘

때로는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흔들리며 살고 싶을 때가 있다. 마치 김삿갓처럼.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金病淵 1807~1863)으로 조선 후기의 방랑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의 특이한 생애는 그 자체가 이미 한국적인 서민 생활의 애환이요, 해학이요, 풍자요, 익살이다.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 마을에 위치한 묘소는(사진 10) 태백산과 소백산이 이어지는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자리 잡고 마대산 줄기가 버드나무 가지처럼 흘러내리는 ‘유지앵소형(柳枝鶯巢形)’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봉분을 앞에는 자연석으로 만든 상석과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비석에는 ‘시선 난고 김병연지묘(視仙蘭皐金炳淵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묘 앞쪽으로 시비(詩碑)가 서 있고 아래 쪽 평지엔 ‘난고 김삿갓 문학관’이 있으며, 이곳에서 약 2㎞ 떨어진 곳에는 김병연의 생가터가 있다.

묘소 앞에 이르러 먼저 술을 따르고 예를 갖춘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용맥이 기세 좋게 내려오지 못하고 퍼져 있으나 청룡, 백호가 비교적 잘 감싸고 있다. 백호의 어깨 부분이 약한 것이 흠이긴 하다. 또한 안산이 금산처럼 보이는 문필봉으로 가깝게 마주하고 있어 시인(문장가)이 묻힐만한 장소다. 그리고 무엇보다 묘소 앞에 흐르는 물이 득수 형국으로(들어오는 물은 보이고 나가는 물은 보이지 않음)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에 바람도 적은 편안한 음택지로 보인다.

바람은 응축된 생명의 기를 흩어지게 한다. 그래서 바람은 피해야 하고 생명의 원천인 물은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장풍득수의 원리다.
“지금 당신이 웃으며 거기에 서 있듯이 나도 한 때는 웃으며 거기에 서 있었고, 내가 지금 여기에 누워 있듯이 당신도 언젠가는 여기에 누울 것이요. 어서 돌아가서 나를 따라올 준비를 하시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삿갓, 아니 김병연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사진 10) 김삿갓 묘역


맺는 말

오래전부터 사회 저변에는 우리의 원형을 찾자는 목소리가 있었고 가장 우리 다운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선진국으로 제 역할을 해내려면 전통문화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풍수지리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도 그중의 하나다. 풍수는 미신이 아니고 통계학이다. 풍수의 궁극적 목표는 개인의 발복을 떠나 국가와 사회가 더욱 번영하도록 하는 데 있다. 오늘날 4차 산업의 핵심인 ‘창조’도 전통과 역사적 가치에 근간을 두고 있다. 풍수가 한국 전통문화의 중심에서 한류로 이어져 세계화를 이룰 수 있게 되길 염원한다.

 

 

 

 

 

글. 이종호 Lee, Jongho 시원 건축사사무소

 

 

이종호 시원 건축사사무소·건축사

 

시원 건축사사무소 대표 건축사로서 건축작업과 함께 집필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노원문화정보센터 등 다수의 설계공 모에 당선됐으며, 수상 경력으로는 제1회 간향건축문학상, 행정중심복합도시 수필 공모전 당선(국무총리상)이 있다. 현 재 서울건축사 풍수지리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leewoonp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