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사사무소 연백당(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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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 2022.7
Gimje Byeokgolje 서기 330년! 지금으로부터 무려 1700년 전의 사건을, 삼국사기는 이렇게 담담히 전하고 있다. 이른바 벽골제의 초축(初築)에 관한 얘기다. 二十一年 始開 碧骨池 岸長 一千八百步 (이십일년 시개 벽골지 안장 일천팔백보) 흘해왕 21년에 처음으로 벽골지(碧骨池)를 축조하였는데, 그 둑의 길이가 1,800보(步)였다고 한다. 1,800보(步)가 어느 정도인지는 단위 환산에 따라 다소 달라지겠지만, 현재까지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길이는 약 3.8킬로미터에 이른다. 무려 십 리(里) 길이다. 자동차 운행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3.8킬로미터의 거리는 눈 깜짝할 새에 그저 스쳐 지나가는 ‘짧은 거리’이겠지만, 멀고 먼 저 옛날 그것도 초기 철기시대에 맨몸으로 땅을 파고 밟고, 또 흙과..
2023.02.21 -
옹이 2022.2
Node 오늘 아침, 가구(架構) 조립을 앞둔 대들보와 우연히 마주쳤다. 처음에는 그 크고 웅장한 체격에 압도당했지만, 곧바로 뽀얀 목질(木質)에 선명히 박혀있는 옹이가 눈길에 밟혔다. 그것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 몸에 옹기종기 붙어 있었을 그 수많은 가지와 어찌 생이별했을까? 생살이 잘려나간 아픔은 또 어찌 견뎌냈을까? 그래, 얼마나 힘들었으면 마침내 땅 위에 반듯하게 뉘어져 있는 이 순간까지 모든 옹이란 옹이의 얼굴에서, 저렇게 피눈물을 흘리듯 송진을 토해내고 있을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대들보가 갑자기 애처로워졌다. 흔히 곧고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에서는 쉽사리 찾아볼 수 없지만, 보통 나무에는 수많은 옹이가 박히게 된다. 그 생김새도 각양각색이다. 이제는 흉터조차 희미..
2023.02.16 -
메신저 2021.12
Messenger 요즈음은 메시지(message) 전성시대인 것 같다. 더구나 성큼 다가온 정치의 계절을 맞아 유력 정치인들이 생산해 내는 메시지는 한층 더 요란해졌다. 한때는 파란 머플러를 휘날리며 “새빨간 거짓말”을 힘주어 외치던 이가 있었는가 하면, 또 빨간 넥타이로 남다른 ‘정열’을 강조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빈 손바닥에 근대 이전의 유물인 ‘왕(王)’을 새겨놓고 주술처럼 펴 보이며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속으라는 얘기인지, 웃으라는 얘기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체를 보통 메신저(messenger)라고 한다. 군대에서는 이를 전령(傳令)이라고도 부른다. 고대의 전령은 우선 잘 뛰어야만 했다. 사실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마라톤도, 마..
2023.02.14 -
불씨 2021.5
Embers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신세계로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요즘, 인공지능의 창출도 대단하지만, 불(火)의 발견은 우리 인류역사에서 실로 획기적인 일대 사건이라고 되뇌지 않을 수 없다. 불(火)을 다루는 지혜는, 신석기 혁명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인 약 40만 년 전 구석기시대 어느 한 시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따금 산불이나 벼락을 맞은 덤불과 나무에서 자연적으로 발화(發火)가 일어나긴 했겠지만, 불을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이면서부터 우리 인류의 생활은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불씨를 어느 한 곳에 모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즉각 꺼내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몸의 아랫도리나 겨우 가리고 살 정도였던 구석기인들이 우선 당장 추위를 견딜 수 있게 되었으며, 맹수의 접근도 효과..
2023.02.03 -
이음과 맞춤 2020.11
Joint and fit 사랑은, 서로 맞춰나가는 일이다. 방향을 맞추고, 높이를 맞추고, 또 생각을 맞추다가 마침내 마음마저 맞춰내는 숭고한 작업(?), 그게 사랑이란다. 그게 만만했더라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렇게 사랑타령이 요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굳이 사랑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서로 다른 존재끼리 ‘잇고 맞추는’ 것 자체가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인가 보다. 우리 한옥에도 그 흔적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본디 한옥은 톱으로 잘리고, 자귀로 깎이고, 끌로 도려내지다가, 또 때가 되면 메로 흠씬 두들겨 맞는 과정을 거쳐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참으로 기구한 팔자를 지녔다지만, 그 구성 부재들의 결구부(結構)를 볼 때마다 적잖은 전율이 느껴지곤 한다. 결구(結構) 무엇이든 완전체 ..
2023.01.26 -
빛 2023.1
Light 우리는 빛이 있는 곳에서만 형태를 볼 수 있다. 지금 우리 눈앞에 현란하게 펼쳐져 있는 바로 이 삼라만상도, 사실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인식되지 않는 허상(虛像)이라고 한다. 싫든 좋든 인간은 태초부터 빛에 의지해서 세상과 사물을 인식해온 것이다. 그만큼 다른 누구보다도 형태와 공간을 창출해나가는 프로세스(process)에서 자주 번민하게 되는 우리 건축사(建築士)들에게 빛은 더 각별한 대상일 수밖에 없다. 만일 빛이 없다고 가정해 보자.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바로 여기 이 공간과 저 자리, 또 거기에 보란 듯이 떡 버티고 서있는 저 벽과 뻥 뚫린 창, 그로 인해 점차 차이를 드러내게 되는 내·외부 공간감(空間感)……. 그 어느 것 하나인들 우리가 제대로 분별해낼 수 있었을까? 때로는 심 ..
2023.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