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사사무소 연백당(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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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境界) 2024.10
Boundary 우리는 순간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이른바 ‘테두리’라는 경계(境界)를 통해서 사물을 인식하곤 한다. 그리고 그 경계는 다름 아닌 ‘선(線)’으로 분별된다. 간단히 스케치하는 과정만 살펴봐도 그렇다. 얼굴을 그릴 때나 건물을 그릴 때, 우리는 반사적으로 그 윤곽에 해당하는 선(線)을 먼저 긋고 나서, 그걸 다시 작은 선과 명암으로 구체화해 나가다 보면 점차 대상이 뚜렷해지는 것이다. 어렸을 때 추억 하나를 떠올려보자. 맨땅에 네모반듯하게 커다란 영역을 설정한 후에, 가위바위보 게임으로 위치와 순서를 정하고 나서, 자그마한 돌이나 병뚜껑을 손가락으로 툭툭 튕기며 자기 영역을 확보해나가는 놀이를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땅따먹기’ 게임이다. 그 단순한 놀이에도 일정한 선(線)이 서로..
2024.10.31 -
변곡점 2024.6
Inflection point 요즘은 지난 흔적을 반추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아마 타고난 성향 탓일지도 모른다. 한때 명리(命理)와 자미두수(紫微斗數)에 관심을 두고 뭇 사물의 본성을 헤아려보다가, 문득 내 사주(四柱)를 짚어보니 그랬다. 명리로 풀어보면, 10개의 천간(天干) 중에서 “단단히 벼른 쇠붙이”로 상징되는 ‘신(辛)’이 일간(日干)이었고, 자미두수에서는 “봉흉화길(逢凶化吉)”의 운세로 대표되는, ‘천량(天梁)’이라는 별(星)이 명궁(命宮)에 자리 잡고 있었다. 또 그게 ‘노인의 성향’을 띤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당시, 한참 젊은 시절에 노인의 기질이라니? 다소 의아했지만, 돌이켜보니 대충 그런 본성(本性)대로 취사 선택을 하며 살았다는 걸,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기실 따지고..
2024.06.30 -
날갯짓 2024.1
Flapping 고요 속에서 소리가 더 분명해지듯,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이 모든 물상(物像)은 ‘공간’을 전제로 하고 있다. 공간(空間)이 없다면, 일체의 현상(現象)이 드러날 수 없는 것이다. 공간이 없다니, 그럴 수도 있을까? 우리가 숱한 갈등과 번민 속에 구현해놓은 설계안이 바로 ‘공간’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부실시공’이라는 세간의 눈총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온종일 이 현장 저 현장을 누비고 다니는, 우리들의 감리 행위도 모두 다 3차원의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게 2D(two-dimensional space)이든 3D(three-dimensional space)이든, 우리의 삶터 자체는 언제나 이렇게 생생히 펼쳐져 있는, 이른바 3차원의 공간이라는 사실에 일말의 의구심조차 ..
2024.01.31 -
김제 벽골제 2022.7
Gimje Byeokgolje 서기 330년! 지금으로부터 무려 1700년 전의 사건을, 삼국사기는 이렇게 담담히 전하고 있다. 이른바 벽골제의 초축(初築)에 관한 얘기다. 二十一年 始開 碧骨池 岸長 一千八百步 (이십일년 시개 벽골지 안장 일천팔백보) 흘해왕 21년에 처음으로 벽골지(碧骨池)를 축조하였는데, 그 둑의 길이가 1,800보(步)였다고 한다. 1,800보(步)가 어느 정도인지는 단위 환산에 따라 다소 달라지겠지만, 현재까지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길이는 약 3.8킬로미터에 이른다. 무려 십 리(里) 길이다. 자동차 운행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3.8킬로미터의 거리는 눈 깜짝할 새에 그저 스쳐 지나가는 ‘짧은 거리’이겠지만, 멀고 먼 저 옛날 그것도 초기 철기시대에 맨몸으로 땅을 파고 밟고, 또 흙과..
2023.02.21 -
옹이 2022.2
Node 오늘 아침, 가구(架構) 조립을 앞둔 대들보와 우연히 마주쳤다. 처음에는 그 크고 웅장한 체격에 압도당했지만, 곧바로 뽀얀 목질(木質)에 선명히 박혀있는 옹이가 눈길에 밟혔다. 그것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 몸에 옹기종기 붙어 있었을 그 수많은 가지와 어찌 생이별했을까? 생살이 잘려나간 아픔은 또 어찌 견뎌냈을까? 그래, 얼마나 힘들었으면 마침내 땅 위에 반듯하게 뉘어져 있는 이 순간까지 모든 옹이란 옹이의 얼굴에서, 저렇게 피눈물을 흘리듯 송진을 토해내고 있을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대들보가 갑자기 애처로워졌다. 흔히 곧고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에서는 쉽사리 찾아볼 수 없지만, 보통 나무에는 수많은 옹이가 박히게 된다. 그 생김새도 각양각색이다. 이제는 흉터조차 희미..
2023.02.16 -
메신저 2021.12
Messenger 요즈음은 메시지(message) 전성시대인 것 같다. 더구나 성큼 다가온 정치의 계절을 맞아 유력 정치인들이 생산해 내는 메시지는 한층 더 요란해졌다. 한때는 파란 머플러를 휘날리며 “새빨간 거짓말”을 힘주어 외치던 이가 있었는가 하면, 또 빨간 넥타이로 남다른 ‘정열’을 강조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빈 손바닥에 근대 이전의 유물인 ‘왕(王)’을 새겨놓고 주술처럼 펴 보이며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속으라는 얘기인지, 웃으라는 얘기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체를 보통 메신저(messenger)라고 한다. 군대에서는 이를 전령(傳令)이라고도 부른다. 고대의 전령은 우선 잘 뛰어야만 했다. 사실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마라톤도, 마..
2023.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