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숙(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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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가자” 2021.8
“Let’s run away” 한여름에 집에 오시는 손님은 대개 커다란 수박 한 덩이를 사 왔다. 시장에서부터 한참을 들고 온 그 수박의 꼭지 옆에는 세모 모양의 칼자국이 있었다. 수박이 잘 익었는지 잘라서 속을 보고 맛까지 확인한 흔적이었다. 엄마는 커다란 대야에 펌프의 물을 길어 올려 수박을 담가 놓고는 동생을 얼음 가게로 심부름 보냈다. 동네마다 있었던 얼음 가게 미닫이 유리문에는 얼음 氷자와 ‘어름’이라는 글자가 페인트로 쓰여 있었다.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커다란 쇠톱으로 잘라서 주는 얼음을 동생은 어떻게 들고 왔을까? 비닐백도 에코백도 없던 시절, 냄비를 들고 가서 받아왔던가? 삼촌은 얼음집에서 사온 ‘어름’을 송곳과 망치로 조각냈다. 이리저리 튀는 얼음조각을 우리 형제들은 앞다투어 주워 입에 넣..
2023.02.08 -
“와인?그기 뭐이 대단허다고?” 2021.7
"Wine?What's so great about that?" 프랑스에서는 놀랍게도 1956년까지 14세 미만의 아이들이 점심시간에 학교 매점에서 와인, 사과주 또는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오랫동안 알코올이 어린이의 건강을 유지하고 성장을 촉진하며 지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고 한다. 특히 와인은 1897년부터 세금 감면을 받을 수 있는 법적인 「위생」 음료였다. 1956년 8월이 되어서야 프랑스에서는, 14세 미만 어린이의 학교 구내식당 내 알코올 섭취가 금지되었다. 대신 아이들에게 우유 한 잔과 설탕을 주자는 캠페인이 시작되었는데, 이에 반발한 부모들은 아이들이 등교하기 전 아침에 술을 주어 마시게 했단다. 와인이나 맥주를 마신 아이들은 벌게진 얼굴로 땀을 흘리며 학교에 도착..
2023.02.07 -
엄마의 하얀 지갑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2021.6
Where did mom's white purse go? “내가 속상한 일이 있어.” 엄마가 수화기 너머에서 얘기했다. 짚이는 구석이 있었지만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뭔데?” “지갑이 없어졌어.” “엄마가 잘 둔다고 숨겨 놓고 못 찾는 거 아냐?” “그런가 해서 내가 다 찾아봤어, 없어.” “전에도 그런 적 있잖아. 지갑 잃어버렸다고 온 집안 다 뒤졌는데 안 보이다가 한참 만에 나왔잖아.” “내가 언제? 집에 없어, 훔쳐갔어.” “누가 훔쳐가?” “누구긴 누구야, 가져다가 지 마누라 준 거야.” 엄마는 남동생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줘도 안 가질 정도로 낡은 지갑을 훔쳐갈 이유가 없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엄마는 막무가내였다. 매일 전화를 드리고, 1주일에 한 번은 꼭 국이며 반찬을 들고 가 진지를 챙기..
2023.02.06 -
스며들다, 통영 2021.5
Tongyeong, in the vibe 난생처음 통영엘 갔다. 가보니 통영은 그리움의 마을이었다. 작곡가 윤이상이 평생 돌아오고 싶어 한, 시인 유치환이 바닷가 우체국에서 날마다 편지를 부치던, 소설가 박경리가 죽은 뒤 돌아와 묻힌… 고요하고 깊은 그리움이 물결마다 골목마다 스며있는 정다운 동네였다. 통영에서 수십 년 만에 자전거를 탔다. 바다를 옆에 두고 길게 뻗은 자전거 도로가 한산했다. 비틀비틀 서툰 실력으로도 달릴 만 했다. 통영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어떡하면 좋으냐고 떼쓰듯 물었다. 무얼 먹어야 하냐고, 어느 섬에를 가야 하냐고, 섬에 왔는데 차가 없으니 어쩌냐고… 어린애 같은 내 물음을 받은 이들은 하나같이 하던 일을 멈추고 길고 충분한 대답을 주었다. 전화를 걸어 차편을 알아봐 주기도 했다...
2023.02.03 -
“작년의 너도 올해의 나도 참 수고했어, 우리!” 2021.4
"Good job, last year! This year, too! We both did!” 출퇴근길 지하철에 타면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다. 마스크 때문에 안경에 김이 서리면 마스크를 벗지 않고 안경을 벗는다. 유니폼처럼 마스크를 맞춰 쓰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 어쩐지 나는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참 성숙하고 착한 공동체 의식을 지녔구나, 감탄이 들기도 한다. 작년 초 마스크를 사기 위해 약국에 줄을 설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마스크를 쓰고 살게 될 줄은 몰랐다. 봄이 지나고 다시 봄이 찾아와 개나리, 진달래가 피고 지고 벚꽃잎 흩날리는 4월까지 이럴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마스크를 벗고 살던 시절이 어땠는지 까마득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영화관에도 미..
2023.02.02 -
쉬운 이별은 없다 2021.3
There is no easy parting 큰 아이가 집을 떠났다. 발단은 우여곡절 끝에 다니게 된 회사가 집에서 1시간 반 거리에 위치한다는 사실이었다. 코피 쏟으며 출퇴근할 수는 없노라며 출근이 결정된 지 3일 만에 방을 보러 갔고, 방을 보고 3일 만에 그 방으로 이사를 가버렸다. 어마어마한 월세를 내느니 나 같으면 출퇴근에 시간이 좀 걸려도 집에서 다닐 텐데, 최소한 좀 더 싼 월세를 알아보고 따져보고 움직일 텐데… 엄마의 투덜거림과 상관없이 아이의 생각은 확고했고 양보가 없었다. 속으로는 비용을 계산하면서도 지하에 있는 방이나 너무 좁은 방은 삶의 질이 많이 떨어진다고 맞장구 쳤으니 엄마인 나도 불만을 얘기할 처지는 못 된다. 1년 치 월세를 모으면 경차 한 대 살 돈이 되는 걸 아는지 모르는..
2023.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