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숙(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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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자란다” 2020.10
“Your beauty continues to grow” “여기가 노인만 않는 덴 줄 알아요? 노약자석이라고 써 있잖아, 약자도 된다고!” “노인이 앉아야지 그럼, 젊은 것들이 어디를 앉아?” 출근 시간이 살짝 지나서 많이 혼잡하지 않은 지하철 안이었다. 이어폰 안으로 노약자석 쪽에서 일어난 소란스러움이 들려왔다. 백발의 할아버지 한 명과 아주머니 한 명이 시비하는 소리였다. 자리가 없어서 서있는 노인이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잔뜩 화가 나서 폭언을 퍼부었다. 아주머니도 지지 않고 대꾸를 했다. 결국 우리나라 사람들 싸움 끝에 늘 나온다는 나이타령이 등장했다. “당신 몇 살이야?” 뜻밖에 할아버지가 아니라 아주머니가 물었다. “나? 팔십 둘이다, 왜?”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내 남편..
2023.01.25 -
광고와 현실 그리고 소망 사이 2023.1
Between advertising, reality and hope # 광고 1 광고가 계속되는 내내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노는 영상과 소리만으로 꽉 채워진 광고가 있다. 전파를 탄 지 2주 만에 유튜브 조회수 1,000만 회를 넘기고 10주 만에 4,000만회를 넘기며 화제가 된, KCC의 아파트 브랜드 스위첸의 ‘내일을 키워가는 집’ 광고 영상이다. 광고는 ‘놀멍.’이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장작불을 보며 멍하게 있는 것을 의미하는 신조어 ‘불멍’이나 물이나 숲을 멍하니 바라보는 물멍, 숲멍을 본떠 만든 단어다. 노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며 고요한 마음 상태가 되라는 뜻으로 읽힌다. 놀멍할 시간을 충분히 주기 위해 영상은 인위적인 연출이나 배경음악, 광고 멘트를 모두 생략하고 40초가 넘도록 어..
2023.01.19 -
“살아 있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요?” 2020.4
“How does it feel to be alive?”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대책없이 늘었다. 업무는 최대한 온라인을 통해 해결한다. 새해를 맞아 야심 차게 시작하려던 수영은 기약없이 연기되었다. 다니던 요가 수련장은 한 달 넘게 문을 닫고 있다. 대학 친구들과 실내에서 하던 동아리 모임도 두 달째 중단하고 있다. 1년 전부터 6월로 날을 잡고 계획하고 있는 해외 여행은 성사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친구나 선후배가 보고 싶으면 고작 코로나 사태가 지나간 후에 보자는 문자로 위안 삼는다. 악수도 포옹도 노래도 꾸욱 참아야 한다. 가족 이외에 만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대신 집에 있는 기계들과 대화하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밥을 하려고 전기밥솥의 단추를 누르니 ..
2023.01.18 -
“청춘 맞나? 청춘 맞다!” 2020.8
“Is it Youth? It’s Youth!”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는 20대 직원이 일곱 명 있다. 푸른 청춘답게 그들은 까르르 잘 웃는다. 디자이너는 손이 빠르고 기획 담당은 진지하다. 연차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니 물론 자주 실수를 하고 회의 때 엉뚱한 얘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당당하고 꿋꿋해서 눈물 쏙 빠지게 야단을 맞아도 포기하지 않고 보고서를 새로 고쳐온다. 갑자기 회식을 제안하면 운동을 해야한다고 거절하고, 외모에 대한 얘기는 성차별이 될 수 있다고 상사를 따끔하게 꼬집기도 한다. 눈치 보느라 업무와 상관 없는 내키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지 않는다. 대신 해야할 일이면 꾀부리지 않고 빨리 해치운다. 21세기 청춘이 일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는 일은 즐겁다. 내가 매일 만나는 그들의 모습을..
2023.01.18 -
“문제가 없는 척하지 마세요” 2020.7
“Don’t pretend there’s no problem” 올해 여든 여덟이 되신 우리 엄마는 다섯 살 어린애 같을 때가 많다. 잇몸이 퉁퉁 부어 치과에 갔는데 이를 뽑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진료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도망을 치셨다. 엄마를 모시고 간 동생은 허둥지둥 진료비를 내고, 미안하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엄마를 잡으러 뛰어야 했다. 평소에는 무릎이 아파 거북이 걸음이던 엄마가 얼마나 날쌔던지 동생은 따라가느라 땀을 다 흘렸다고 한다.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치과에서 왜 도망 갔어?” “무서워서.” “애기도 아니고 뭐가 무서워?” “아유, 윙 소리만 나도 무서워. 이제 살 만큼 살았어,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래.” 앓던 이가 저절로 흔들려서 빠지고 어금니까지 성치 않으신데도 엄마는 치과..
2023.01.17 -
“우린 겨우 이런 일로 행복합니다” 2020.6
“We’re just happy with this small matter”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이던 시절, 담임 선생님이 아침 조회에 낯선 얼굴의 학생을 데리고 들어오는 일이 가끔 있었다. 교실에 가득찬 70명 가까운 아이들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잔뜩 긴장한 표정의 전학생을 쳐다보았다. “오늘부터 우리 반에서 함께 공부하게 될 전학생이다. 반갑게 맞아주길 바란다. 저기 빈 자리 보이지? 거기 앉으면 되겠네. 들어가기 전에 자기 소개하고 들어가.” 전학생은 어느 학교에 다니다 온 누구라고 이름을 겨우 더듬더듬 얘기하고는 들어가 앉는다. 그러면 나는 종일 새로 온 아이를 궁금해 했다. 얼굴이 참 예쁘네, 공부는 잘 할까?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할까? 동생이 있을까? 저 아이가 다니던 학교는 어땠을까? 매일..
2023.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