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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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림의 슬기 2022.9
The wisdom of counting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어머니가 인두를 이용해 저고리 동정을 다림질하신 것이 기억난다. 어머니는 인두를 숯불에 올려놓고 적당한 온도에 다다르면 동정을 다림질하셨다. 그때 인두가 너무 달궈지면 동정이 손상되므로 적정한 온도에 기준을 정하기 위해 어머니는 소리 내어 셈을 하시곤 했다. 이윽고 수차례 인두 다림질을 마치고 동정이 반듯하게 다려지면, 동정 달기 바느질을 하시고 어머니는 일을 마치셨다. 어머니 하시는 일을 도와드릴 나이가 안되었고 손도 서투르므로 나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 기억이 나는데, 중요한 사실은 정확한 시간을 기다려서 알맞은 온도를 이용하여 해당 일을 균등하게 적용시킨 후, 원하는 품질로 일을 마친다는 지혜를 배운 것이다. 그 헤아림의 슬기는..
2023.02.23 -
몽당연필, 아날로그의 추억 2022.8
A stubby pencil, analog memories 호랑이 담배 피다 금연할 즈음, 연필을 깎아 도면 그리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렸던 그 해, 실습생 때부터 얼마간 모아온 몽당연필. 왜 그딴 걸 모았느냐구? 기인 같았던 선배 한 분께서 무조건 그러라고 해서다. 졸업하고 처음 입사한 사무실에선 모든 드로잉을 할 때 샤프가 아니라 반드시 연필을 쓰게 했다. 점점 짧아지면 볼펜대에 끼워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쓰다가 검사받고 새 연필을 타 쓰고를 반복하던 어느 날, 벌꿀 유리병에 몽당연필이 반쯤 채워졌을 무렵 그 선배는 늦은 밤 포장마차에서 취한 목소리로 그 이유를 설명해 주셨다. “네놈이 끝까지 설계밥을 먹을지 아닐지 내 알 바 아니나 혹여 연필 가루 계속 마시고 있다면 강산이 몇 ..
2023.02.22 -
김제 벽골제 2022.7
Gimje Byeokgolje 서기 330년! 지금으로부터 무려 1700년 전의 사건을, 삼국사기는 이렇게 담담히 전하고 있다. 이른바 벽골제의 초축(初築)에 관한 얘기다. 二十一年 始開 碧骨池 岸長 一千八百步 (이십일년 시개 벽골지 안장 일천팔백보) 흘해왕 21년에 처음으로 벽골지(碧骨池)를 축조하였는데, 그 둑의 길이가 1,800보(步)였다고 한다. 1,800보(步)가 어느 정도인지는 단위 환산에 따라 다소 달라지겠지만, 현재까지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길이는 약 3.8킬로미터에 이른다. 무려 십 리(里) 길이다. 자동차 운행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3.8킬로미터의 거리는 눈 깜짝할 새에 그저 스쳐 지나가는 ‘짧은 거리’이겠지만, 멀고 먼 저 옛날 그것도 초기 철기시대에 맨몸으로 땅을 파고 밟고, 또 흙과..
2023.02.21 -
마라톤을 합시다 2022.6
Let's run a marathon 무슨 일이든지 체험담을 얘기하는 것이 실감 나고 바로 적용이 가능하기에 경험 위주로 말씀드리지요. 본인은 원래 축구도 좋아하였지만 대학교 졸업 후 테니스에 상당히 심취하여 일주일에 한 번 이상 테니스 단식 게임을 해야 잠이 올 정도였습니다. 조기 축구회에도 가입하고자 하였으나 마눌님의 휴일 운동 금지령과 더불어 가족을 배려하고, 특히 주일에 주님과 함께 보내기 위해서는 조기 축구가 날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테니스에 더 심취했지요. 그러나 이 운동은 짝이 있어야 가능한 운동이라, 파트너가 없으면 테니스장을 나가기가 두려웠었죠. 테니스를 같이 하시던 분들이 전근을 가시고 또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짝이 없어지고… 파트너가 없이 운동하기도 그렇고 해서 한동안, 근 1년..
2023.02.20 -
노래, 곁에 오래 두고 사귄 벗 2023.2
Song, a long-time friend 중학교 졸업반 겨울 방학 동안에 기타를 처음 접하고 배우다가 음악에 대해 좀 더 깊이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긴 겨울 방학을 기타와 함께 보내고 나서, 고교 입학 후 음악 첫 시간에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충실히 잘 배우면 작곡이 가능하도록 가르쳐 주겠다” 하셨는데, 이 말은 마치 가물었던 내 마음 밭에 단비처럼 내려와 노래와 음악에 대한 커다란 환상을 심고 무궁무진한 꿈을 키우게 해주었다. 당시 대학가요제가 태동하여 인기가 엄청나던 때였고, 기타 반주를 하며 포크 송을 부르는 것에 대한 멋과 욕구가 지대했던 때라, 그동안의 초·중학교 음악 수업에 대충 얻은 지식을 일거에 바꾸고,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그러나 한 학기 후 대학입시라는 중..
2023.02.16 -
옹이 2022.2
Node 오늘 아침, 가구(架構) 조립을 앞둔 대들보와 우연히 마주쳤다. 처음에는 그 크고 웅장한 체격에 압도당했지만, 곧바로 뽀얀 목질(木質)에 선명히 박혀있는 옹이가 눈길에 밟혔다. 그것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 몸에 옹기종기 붙어 있었을 그 수많은 가지와 어찌 생이별했을까? 생살이 잘려나간 아픔은 또 어찌 견뎌냈을까? 그래, 얼마나 힘들었으면 마침내 땅 위에 반듯하게 뉘어져 있는 이 순간까지 모든 옹이란 옹이의 얼굴에서, 저렇게 피눈물을 흘리듯 송진을 토해내고 있을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대들보가 갑자기 애처로워졌다. 흔히 곧고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에서는 쉽사리 찾아볼 수 없지만, 보통 나무에는 수많은 옹이가 박히게 된다. 그 생김새도 각양각색이다. 이제는 흉터조차 희미..
2023.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