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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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바둑과 그레질 2020.4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세기적인 대국에서 ‘신의 한 수’로 그간의 관심을 모아왔던 프로바둑기사 이세돌이 지난해 11월 마침내 은퇴를 선언했다. 그런데 은퇴를 하는 그 순간까지 역시 그다웠다. 평범한 대국으로 마무리 짓지 않고 이른바 접바둑을 선택한 것이다. 세칭 ‘입신(入神)의 경지’라 불리는 프로9단이 먼저 흑돌을 잡고 ‘치수고치기’ 대국을 벌인 것도 그렇거니와, 최종 3국에서는 이미 승패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았다는 듯 181수만에 미련 없이 돌을 던진 뒤, 복기(復碁)하는 과정에서 그 특유의 진지한 자세를 견지한 것도 쉽사리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몇 년 전 세간의 기대와는 달리 알파고에게 1승 4패로 완패한 직후, “오늘의 패배는 이세돌이 패배한 것이지 인간이 패배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이세돌..
2023.01.12 -
공동체 2019.12
Community 한동안 가족공동체 해체의 전조증상이라도 되는 양, 우리 청년들이 집을 뛰쳐나가 ‘혼밥’, ‘혼술’, ‘혼놀’에 탐닉하는 붐(boom)이 일더니, 어느 날부턴가 ‘셰어하우스(share house)’라는 독특한 주거형태가 우리 곁에 슬며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주거발전과정에서는 다들 쌓고 늘리는 데만 급급했는데, 이제는 그 행태를 일단 멈추고 잉여공간을 ‘나눠서 함께 살자’라는 취지란다. 어쨌든 이 역시 주거공동체의 또 다른 변태(變態)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그동안 이 지구상에 출현했던 수많은 주거공동체들의 시원은 우리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깊고 오래됐다. 두 발로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다른 동물과 본격적으로 차별화되기 시작한 이른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2023.01.07 -
경계 밖으로 스스로를 추방하는 자 2019.11
One who banishes himself out of boundaries 중국 당나라 시대의 문장가인 유종원(773-819)이 쓴 글 중 재인전(梓人傳)은 대목장인 양잠(楊潜)의 직무에 대한 태도를 그린 내용인데, 재인은 오늘날의 건축설계하는 이와 같다. 이 글에 따르면, 그가 사는 집은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일을 시작할 때면 도면을 현장의 벽에 붙여놓고 여러 직공들을 불러모아 명확하게 임무를 부여하고 조정하며 질책을 한다. 그는 모든 재료와 공법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으며 일이 끝나고 집이 완성되면 대들보에 자기의 이름만을 새겨 남긴다. 혹시 일하는 도중에 건축주가 틀린 지시를 하면 그 부당함을 말하고 해소 되지 않으면 즉시 그 일에서 손을 떼고 유유히 떠난다. 공공적 프로젝트를 할 때는 임금을 ..
2023.01.06 -
창고, 그 유용한 공간 2019.7
Warehouse, useful space 장정의 해군시절은 고단했다. 고속전투정 출항 15분 전을 알리는 명령이 정내 스피커를 통해 울리면 스크루를 돌리는 엔진 소리와 함께 불완전 연소된 매연이 정내 홋줄 요원들 코끝뿐만 아니 라 눈도 시리게 했다. 출항 5분 전 방송이 추가로 나와서 이제 바다로 나간다는 기대가 그 매운 고통을 그나마 풀어주었다. 이윽고 '홋줄 풀어'의 구령이 떨어져야 비로소 가슴이 후련 해지는 쾌감의 항해는 시작되는 것인데, 배 뒤에 배치된 장정은 물보라를 세차게 차고 나가는 그 때가 바로 고단함을 잠시 잊을 수 있는 기분 좋은 시각이었다. 배가 바다로 나아가면 새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 그리고 흰 구름, 아울러 배꼬리 에서 부서지는 흰 포말은 출항 전 매연의 고통을 날려 보내고 군생..
2022.12.23 -
공간과 장소 지하 벙커의 작은 창 2018.06
A Small Window in an Underground Bunker 우리를 보호해주기로 한 반군조직의 차량에 갈아탔다. 트렁크에는 온갖 총기류가 그득했 고, 운전석의 좌우에는 소총이 놓여있어 언제든 빼어들 수 있었다. 글로브박스에는 수류 탄이 들어있는데 차가 움직일 때마다 굴러다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잠시라도 지체하 면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이라서 계속 다급하게 움직여야 했다. 구호 활동을 위해 시리아에 들어왔던 두 명의 이탈리아 여성들이 바로 어제 납치됐다고 했다. 대규모의 교전이 벌어지고 보호세력은 대부분 사살된 후, 외국인만 납치해 간다고 했다. 내전 중인 시리아에 들어오는 외국인은 IS에 가담하기 위해 오는 이들이 대다수이 고, 그밖의 소수는 사회활동가 아니면 미디어 쪽 사람들이다...
2022.12.02 -
‘바다는 지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준다’ 2018.05
'The sea receives all the water on earth' 바다는 끼니만큼 가까이 있었다. 눈을 뜨면 언제든 시야 가득 들어오는 바다를 볼 수 있었고, 눈을 감아도 마음을 다 차지해 버린 그 사람처럼 바다는 쉽사리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친밀하게 내밀하게 이 거대한 물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한 사람의 일생 내내 그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바다는 그에게 숙명이자 운명이며 그는 바다의 후예인 것이다. 그는 얼마나 오랜 세월 무작정 바다에 다가가기를 염원했으며 적극적으로 상기하였던가. 바다는 마당의 개만큼 곁에 있었고 잠자리에 누우면 그 바다는 곧잘 파도소리를 실어다 동침하게 해줬다. 십 분만 걸어가면 방파제나 백사장에 닿을 수 있었고, 지치지 않는 파도의 리듬과 지칠 줄 모르는..
2022.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