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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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과 장소 지하 벙커의 작은 창 2018.06
A Small Window in an Underground Bunker 우리를 보호해주기로 한 반군조직의 차량에 갈아탔다. 트렁크에는 온갖 총기류가 그득했 고, 운전석의 좌우에는 소총이 놓여있어 언제든 빼어들 수 있었다. 글로브박스에는 수류 탄이 들어있는데 차가 움직일 때마다 굴러다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잠시라도 지체하 면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이라서 계속 다급하게 움직여야 했다. 구호 활동을 위해 시리아에 들어왔던 두 명의 이탈리아 여성들이 바로 어제 납치됐다고 했다. 대규모의 교전이 벌어지고 보호세력은 대부분 사살된 후, 외국인만 납치해 간다고 했다. 내전 중인 시리아에 들어오는 외국인은 IS에 가담하기 위해 오는 이들이 대다수이 고, 그밖의 소수는 사회활동가 아니면 미디어 쪽 사람들이다...
2022.12.02 -
‘바다는 지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준다’ 2018.05
'The sea receives all the water on earth' 바다는 끼니만큼 가까이 있었다. 눈을 뜨면 언제든 시야 가득 들어오는 바다를 볼 수 있었고, 눈을 감아도 마음을 다 차지해 버린 그 사람처럼 바다는 쉽사리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친밀하게 내밀하게 이 거대한 물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한 사람의 일생 내내 그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바다는 그에게 숙명이자 운명이며 그는 바다의 후예인 것이다. 그는 얼마나 오랜 세월 무작정 바다에 다가가기를 염원했으며 적극적으로 상기하였던가. 바다는 마당의 개만큼 곁에 있었고 잠자리에 누우면 그 바다는 곧잘 파도소리를 실어다 동침하게 해줬다. 십 분만 걸어가면 방파제나 백사장에 닿을 수 있었고, 지치지 않는 파도의 리듬과 지칠 줄 모르는..
2022.12.01 -
해변, 대관람차 2018.04
Beach, Ferris Weel 판타지랜드는 단조롭고 타락하고 무능력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여기는 모든 사람들이 기분 좋게 미소 짓는 영감의 장소이다. 이에 더하여 그런 곳들은 미리 보장된 흥분, 오락, 흥미를 제공하는 유토피아를 어느 정도까지는 진짜처럼 보여준다. , 에드워드 렐프 대관람차를 좋아한다. 해변을 좋아한다. (분지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일까? 내게는 여행지나 장기 체류지를 선택할 때, 그 장소가 바다나 강을 끼고 있는지를 가장 먼저 확인해보는 습관이 있다.) 항구도시의 대관람차를 좋아한다. 대관람차의 폐쇄적인 순환이 쳇바퀴를 도는 지옥 같은 일상을 닮았다는 상투적인 비유 때문은 아니다. 수많은 영화에서 데이트 장소로 출현하는 대관람차의 로맨틱함 때문도 아니다. 그렇다..
2022.12.01 -
광한루 연가 2018.04
Gwanghallu Love Sonata 남원 광한루원을 가본 적이 있는가. 한국정원의 백미, 전통 건축물의 집합체로서의 그곳은 건축학을 공부하는 학생, 건축인의 답사 필수지역일 뿐만 아니라 조경학 전공자에게 두 말할 나위 없는 중요한 학습장소이다. 달나라 궁전 광한청허부를 본 따서 지상에 실현해 놓았다는 전설은 건축물과 조경시설 곳곳에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소설 춘향전,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 시작 공간이다. 남원시민에겐 일상의 분주함을 이곳에 와서 쉬면서 풀어낼 수 있고, 자연과 조화되는 풍경과 건축물 조경수 등이 어우러져 시와 노래를 읊을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서 훌륭하게 인식되고 있다. 남원시민은 이 공간이 있음으로 인해 문화 자긍심을 가지며 살고 있다. 남원은 예부터 도로망이 집결되고..
2022.12.01 -
공간과 기억 2018.03
Space and Memory 인간의 건축물이 없는, 가도 가도 산과 하늘과 벌판. 나무도 없이 우뚝우뚝 솟은 산들이 마치 하늘을 찢은 것 같은 대비를 이루었다. 히말라야 산맥이 펼쳐져 있었다. 라다크의 높고 건조한 기후가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햇살은 충분히 따가웠고 흙먼지와 건조한 날씨 탓에 콧속이 말랐다. 여행기간 동안 대여한 지프를 타고 산으로 난 위태한 길을 다녔다. 안내자이자 기사로 고용한 현지인 롭산의 차분한 운전 덕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지만, 듣던 대로 길 아래 낭떠러지에서 유골만 남은 사체처럼 앙상한 차량의 잔해를 발견하기도 했다. 시야에는 오로지 높이 솟은 빌딩뿐인 서울에서 산과 하늘이 무심하게 뻗어 있는 곳으로의 이동은 비현실감을 더욱 과장되게 부풀렸다. 그러나 그 스케일이라니. 건축..
2022.11.30 -
바람과 함께 사는 집 2018.02
A House in the Wind 아파트를 버리고 작더라도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기를 꿈꾸었다. 담장을 넘어온 햇빛이 아장아장 마당을 지나 툇마루를 올라와 처마 속으로 사라지는, 그런 어렸을 적 살던 주택 집 풍경이 나이가 들면서 너무 그리웠다. 햇빛이 아깝다며 바구니에 담은 갖은 나물들을 지붕 위에 올려놓던 할머니는 아마도 환한 햇빛을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아까웠으리라. 굴뚝이 있고 다락방이 있던 집. 다락방에 엎드려 소공자, 소공녀, 보물섬,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읽다가 다락방 창문으로 보이는 초저녁 별. 저녁밥 짓는 냄새, 전봇대 긴 그림자처럼 골목으로 성큼성큼 돌아오던 아버지. 장독대가 있던 집. 장독대에 놓인 항아리에 장을 가지러 올라갔다가 지붕 위에 핀 쑥부쟁이를 보고 돌아가신 할아버..
2022.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