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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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씨 2021.5
Embers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신세계로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요즘, 인공지능의 창출도 대단하지만, 불(火)의 발견은 우리 인류역사에서 실로 획기적인 일대 사건이라고 되뇌지 않을 수 없다. 불(火)을 다루는 지혜는, 신석기 혁명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인 약 40만 년 전 구석기시대 어느 한 시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따금 산불이나 벼락을 맞은 덤불과 나무에서 자연적으로 발화(發火)가 일어나긴 했겠지만, 불을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이면서부터 우리 인류의 생활은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불씨를 어느 한 곳에 모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즉각 꺼내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몸의 아랫도리나 겨우 가리고 살 정도였던 구석기인들이 우선 당장 추위를 견딜 수 있게 되었으며, 맹수의 접근도 효과..
2023.02.03 -
다락방의 추억 2021.2
Memories of attic 다락방에 대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다양하다. 어릴 때 다락방에서 체험했던 여러 가지 일이 있으므로 추억을 반추하면 그 재미가 쏠쏠하다. 건축법에서 정의하는 다락은 지붕과 천장 사이 공간을 조성하여 물건을 저장·보관하는 공간이며,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으로서의 개념이 아니기에 그 다락의 높이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경사진 지붕 형태 아래에 천정에 있을 경우에는 평균 높이가 1.8미터 이하여야 하고, 지붕 형태가 평 슬라브일 경우는 1.5미터 이하일 경우에만 다락으로 인정된다. 기껏해야 1.5미터 높이기에 성인은 머리를 숙여가며 그곳을 드나들어야 한다. 이렇게, 다락은 공간개념과 높이 규정에서 그 의미가 일반 방과는 확연히 구분되기에 공간에서 느끼는 맛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2023.01.31 -
이음과 맞춤 2020.11
Joint and fit 사랑은, 서로 맞춰나가는 일이다. 방향을 맞추고, 높이를 맞추고, 또 생각을 맞추다가 마침내 마음마저 맞춰내는 숭고한 작업(?), 그게 사랑이란다. 그게 만만했더라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렇게 사랑타령이 요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굳이 사랑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서로 다른 존재끼리 ‘잇고 맞추는’ 것 자체가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인가 보다. 우리 한옥에도 그 흔적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본디 한옥은 톱으로 잘리고, 자귀로 깎이고, 끌로 도려내지다가, 또 때가 되면 메로 흠씬 두들겨 맞는 과정을 거쳐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참으로 기구한 팔자를 지녔다지만, 그 구성 부재들의 결구부(結構)를 볼 때마다 적잖은 전율이 느껴지곤 한다. 결구(結構) 무엇이든 완전체 ..
2023.01.26 -
마당, 그 아름다움에 관하여 2020.10
About the yard, its beauty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고 어머니의 부지런함이 고스란히 배여 있던 갈색 툇마루에서 내려 보았던 마당에 관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 때 그 날은 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이었고 백색의 마당은 더욱 눈을 부시게 한 날이었다. 우리 한옥은 처마가 깊다. 앞산의 둥그런 실루엣을 닮은 듯, 한복 소매의 공 굴린 듯, 그리고 여인의 버선코를 닮은 듯한 지붕 선은 서까래와 부연을 타고 내려와 숫, 암막새 기와로 마감된다. 처마 선은 길게 이어짐으로써 여름철 직사광선과 길게 늘어지는 서향 빛을 차단하는 기능을 가진다. 반면 그 처마 깊이로 인해 겨울철 실내는 빛이 상대적으로 작게 들어온다. 그래서 그 점을 보완한 장치가 바로 마당에 백색 마사토를 까는 일이었던 것이다. 백색..
2023.01.25 -
빛 2023.1
Light 우리는 빛이 있는 곳에서만 형태를 볼 수 있다. 지금 우리 눈앞에 현란하게 펼쳐져 있는 바로 이 삼라만상도, 사실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인식되지 않는 허상(虛像)이라고 한다. 싫든 좋든 인간은 태초부터 빛에 의지해서 세상과 사물을 인식해온 것이다. 그만큼 다른 누구보다도 형태와 공간을 창출해나가는 프로세스(process)에서 자주 번민하게 되는 우리 건축사(建築士)들에게 빛은 더 각별한 대상일 수밖에 없다. 만일 빛이 없다고 가정해 보자.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바로 여기 이 공간과 저 자리, 또 거기에 보란 듯이 떡 버티고 서있는 저 벽과 뻥 뚫린 창, 그로 인해 점차 차이를 드러내게 되는 내·외부 공간감(空間感)……. 그 어느 것 하나인들 우리가 제대로 분별해낼 수 있었을까? 때로는 심 ..
2023.01.19 -
애틋한 골목길 2020.5
Loving Alley 골목은 집을 나와 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여정 중 작고 좁은 길을 말한다. 일반적인 골목은 집들을 연결하는 길이므로 집으로 둘러싸여 있다. 어느 집은 큰 길에서 바로 진입하여 골목이 없을 수도 있다. 일반적인 아파트 단지는 골목 없이 단지 내 산책길 또는 보행자 도로를 이용하여 아파트 동 출입구를 통하여 현관문에서 나오고 들어간다. 그러므로 골목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집으로 둘러싸인 골목이 있는 곳은 길 곳곳마다 사연이 깃들어 있다. 나의 골목길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소녀를 처음 만난 곳은 우리 동네 골목길이었다. 검정 교복에 하얀 칼라 깃을 눈부시게 빛나게 하고 짙은 청색 가방을 든 소녀는 씩씩한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왔다. 우리 집은 골목 중에서 삼거리..
2023.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