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숙(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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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의 향기처럼 아련한내 한여름 밤의 꿈 2025.8
My midsummer night’s dream, like the distant scent of regret 이제는 골동품 가게에서나 볼 수 있는 수동 타자기가 있다. 여름방학에 찾아간 할머니 댁 다락방에서 오래된 물건들 사이를 더듬다 발견했을 것만 같은 물건이다. 타자기 옆에는 희미해진 글자가 띄엄띄엄 박힌 누렇게 바랜 종이 한 장이 떨어져 있다. 쓰다가 몇 번이나 구겨 버리고 다시 썼을까? 알아보기 힘든 자음과 모음에서 머뭇머뭇 망설임이 느껴진다.할머니의 머리칼이 아직 윤기 흐르는 흑발이고 뺨은 여전히 분홍빛이던 아득히 먼 어느 날, 펜에 잉크를 채우고 빈 종이를 펼쳐 한 글자 한 글자 간절함을 채우던 순간이 있었다. 밤새워 쓰고도 차마 보내지 못해 숨겨둔 마음 한 조각이 있었다. 계절이 바뀌고 ..
2025.08.31 -
내 여름의 품사들 2025.7
The parts of speech of my summer 어릴 때는 겨울을 좋아했다. 거위털 패딩은커녕 기모 바지도 없었던 시절이라 지금보다 훨씬 더 춥게 지냈는데도 겨울이 좋았다. 스케이트를 탄 적도 없고 스키는 구경도 못 했지만 얼어붙은 논에서 썰매를 타는 겨울이 좋았다. 군밤을 먹을 수 있고 가래떡 길게 뽑아 연탄난로에 구워 먹는 겨울이 좋았다. 그런데 겨울은 더 이상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 아니다. 가을 끝자락에 겨울이 모습을 살짝 드러내면 ‘이번 겨울은 얼마나 추우려나.’, 덜컥 겁부터 난다. 추위가 싫다고 여름이 좋아진 것도 아니다. 해마다 여름이 더 길어지고 더워지니 5월에 벌써 반팔을 꺼내 입으며 닥쳐올 더위를 걱정한다. 나이 탓인지 덥지도 춥지도 않은 순한 날씨가 좋다. 사실 아파트..
2025.07.31 -
지금은 희미해진 첫사랑에게 2025.6
To my first love that has now faded 어쩌다 우리는 사랑에 빠졌을까요? 어쩌다 당신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배경화면이 되고 당신 목소리 아닌 소리는 모두 소음으로 변하는 황당한 일이 일어났을까요? 미안해요, 당신을 언제 처음 봤는지 첫인상이 어땠는지도 이젠 기억나지 않아요.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당연한 일인가요? 그렇게 사랑했는데 왜, 무엇 때문에 우리는 헤어졌나요? 나의 무엇이 당신을 못 견디게 했나요? 사랑의 이유가 되던 모든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별리의 원인으로 변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사랑이라는 환각 상태에 취해 있다가 화들짝 깨어보니 모든 것이 참기 힘든 것으로 바뀌었는지도 모르죠. 지금은 참담했던 그 이별의 순간조차 희미해졌어요.그래서 당신, 잘 살고 있..
2025.06.30 -
나는 그들에게 천국이었을까, 감옥이었을까? 2025.5
Was I a heaven or a prison to them? 엄마의 사진을 본다. 오드리 헵번 같은 플레어스커트에 고데 머리를 한 처녀가 양산 안에서 활짝 웃고 있다. 구애하는 총각을 놀리기라도 하는듯 눈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아무런 근심 없는 해맑은 얼굴이고, 아직 중력이 마수를 뻗치지 않아 단단한 몸매다. 내가 태어나기 전이다. 저절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본사를 둔 꽃배달 서비스 회사 텔레플로라(Teleflora)의 어머니날 광고가 연상된다. 어머니에게 꽃을 보내라는 이야기를, 수많은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자막) mother 텔레플로라 러브 스토리(a teleflora love story) Na) 당신의 어머니가 되기 전에, 그녀는 한 사람..
2025.05.31 -
아른한 봄, 한낮의 꿈 2025.4
A drowsy spring day, a midday dream 만약 내 마음대로 직업을 정할 수 있다면 등대지기가 되고 싶어. 출렁대던 파도 위에 어둠이 내리고 날개 접은 갈매기가 둥지에 들면, ‘딸깍’ 스위치를 올려 등대를 켜는 거야. 내가 밝힌 환하고 기다란 빛은 먼 바다까지 닿겠지? 미처 항구로 돌아오지 못 한 작은 배가 있다면 내 불빛을 보고 마음을 놓을지도 몰라. 큰 바람 불고 폭우가 파도처럼 퍼붓는 밤에는 쿵쿵대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등대빛에 간절한 소원을 실어 보내야지. 부디 아무도 상하지 않기를, 아무것도 다치지 않기를…. 깊고 어두운 폭풍의 밤이 지나고 말짱하게 맑은 아침이 시침 뚝 떼고 밝으면, 내 힘으로 큰 일을 해낸 듯한 충만함을 껴안고 잠자리에 들 거야. 꿈도 없는 단잠..
2025.04.30 -
독서는 초능력? 2025.3
Is reading a superpower? 미국의 아동 도서 주간(Children’s Book Week)은 1919년 시작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전국적인 어린이 독서 장려 캠페인이다. 매년 5월과 11월에 개최되어, 학교, 도서관, 서점은 물론 온라인에서도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또 해마다 새로운 슬로건과 유명 작가의 일러스트로 꾸민 포스터를 선보이는데, 2021년의 슬로건은 ‘독서는 초능력(Reading is a Superpower)’이었다. 영화 속의 슈퍼맨처럼 강한 힘을 가지게 해주는, 책 읽기의 혜택을 전달하기 위한 슬로건이다. 물론 책을 읽는다고 물건을 드는 힘이나 싸움을 하는 힘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독서가 인간의 지적·정서적 역량을 높여주는 초능력이라는 사실에 반대할 사람..
2025.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