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카피(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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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 말해요 2026.4
Speaking with Flowers 선암사에 매화가 피었단다. 누구는 아침에 눈뜨자마자 달려가 절 마당 가득한 매화 향을 만나고 왔단다. 다른 누구는 제주에 갔는데 동백은 이미 뚝뚝 떨어졌고, 대신 유채꽃이 환하게 웃더란다. 또 누구는 창덕궁 매화를 보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말았더란다. 비와 진눈깨비가 오락가락하던 쌀쌀한 3월 어느 수요일, 끝이 아득한 일을 쌓아두고 봄꽃 소식을 듣는다.남도의 꽃구경은커녕 출퇴근길 아파트 마당에서 마주치는 산수유꽃에 눈길 줄 여유조차 없으니, 오감이 활짝 열리는 꽃호강은 좀처럼 내 차례까지 돌아올 것 같지 않다. 그래도 눈앞에 꽃잎이 어른거린다. 봄꽃 모두 지고 나면 내 봄을 여읜 설움에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울게 될까 봐 책상에서도 꾸준히 꽃을 생각한다. 짐..
2026.04.30 -
0.2초의 영원 2026.3
0.2 Seconds of Eternity 1년 넘게 불을 피우지 않은 엄마의 부엌에는 오래된 주방도구들만 아마도 끝나지 않을 휴가를 보내고 있다. 투박한 양은 쟁반, 무거운 유리접시, 튼튼한 스테인리스 냄비, 찌그러진 국자, 까맣게 색이 변한 은수저… 대부분 50년 넘게 사용했던 물건이다. 아마 엄마가 새댁이었을 때부터 쓰던 것도 있을 것이다. 그 냄비에 끓인 동태찌개를 먹던 때, 나는 어렸고 냄비는 젊었다. 그 은수저로 밥을 뜨던 시절, 엄마는 건강했고 수저는 반짝였다. 어린 내가 자라 집을 떠나고, 건강했던 엄마가 퇴원할 기약 없이 병원에 있기까지 수 십 년이 흐르는 동안 그릇은 비교적 멀쩡하게 제 모습과 기능을 지키고 있다.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쟁반과 밥그릇은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엄..
2026.03.31 -
새해를 맞이하는 가장 오래된 방법 2026.2
The Oldest Way to Welcome the New Year 이란에서는 새해를 맞이하기 전,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강가에 모여 매일 사용하는 카펫을 세탁합니다. 말하자면 온 마을이 함께하는 대청소인 셈이죠.대장 격인 어머니가 힘찬 목소리로 구령을 붙이면, 나팔과 북소리 같은 악기 연주가 더해지며 청소에 한층 더 활기가 넘칩니다.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이 새해가 되기 전에 청소를 한다. 정갈한 환경에서 차분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으려는 마음일 게다. 그중에서도 이란의 새해 대청소는 유난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이란에서는 새해인 노루즈(Nowruz)를 앞두고 약 2주 전부터 코네 타카니(Khaneh Takani)라는 대청소를 시작하는데, ‘집을 흔들어 먼지를 털어낸다’는 코네 타카니의 말뜻 그대로,..
2026.02.27 -
집은 커다란 그릇 2026.1
A House is a Large Bowl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톨스토이가 단편소설에서 던진 질문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착하고 부지런하고 우직한 농부 파홈(Pahom)이다. 파홈은 1,000 루블을 내면 하루에 걸은 만큼의 땅을 모두 준다는 마을을 찾아가 전 재산을 내고 땅을 사기로 한다. 조건은 해가 지기 전에 출발지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온종일 열심히 걸었다. 자꾸 마음에 드는 땅이 눈에 들어와 멈출 수 없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저녁이 가까워졌다. 해가 지기 전에 출발지점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마침내 출발지점에 도착했지만 종일 걷고 뛰느라 지친 그는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는다. 그리고 겨우 2미터 남짓한 길이의 무덤에..
2026.01.30 -
12월, 내 가난한 풍요의 달 2025.12
December: The Month of My Poor Abundance 12월 안에 마쳐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었다. 끝이 아직 멀었다. 그런데 다른 일이 또 쌓인다. 일을 많이 맡은 것이 잘못일까, 아니면 향기로운 술잔과 다정한 만남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게 문제일까? 헷갈린다. 다시 오지 않을 하루하루를 귀하게 아껴 써야지 다짐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 열 시가 넘도록 침대에 붙어 있다. 휴일 아침의 늦잠을 떨쳐내지 못하는 게으름이 문제일까, 아니면 아직 내일이 남아있다는 막연한 기대가 잘못일까? 이것도 헷갈린다. 내가 이런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 이유는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만들어진 버거킹의 햄버거 광고를 보았기 때문이다.2021년 버거킹은 소고기 패티 대신 식물성 패티를 넣어 ..
2025.12.31 -
AI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2025.11
Thankfully, It’s Not AI 나란 인간은 참 생산성과는 거리가 먼 존재여서, 원고 한 장 쓰려면 책상 정리를 한 시간이나 하기 일쑤고 노트북을 열고도 이리저리 SNS 포스팅을 기웃거리며 시간을 흘려 보낸다. 그것도 모자라 오늘은 각종 AI와 그들의 욕망에 대해 철학적(?) 대화를 나누는 우스운 행각을 벌이기까지 했다. 챗GPT와 제미나이 그리고 퍼플렉시티에게 물었다. “넌 인간이 되고 싶다고 느낀 적이 있어? 있다면 왜, 뭘 하고 싶어서인지 설명해 줘.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니 솔직하게 이야기해 봐.” 세 프로그램의 답은 대체로 비슷하면서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챗GPT 曰, 『나는 인간이 되고 싶다고 느낄 수는 없어요. 감정을 이해할 순 있지만, 실제로 느끼지는 못하니까요. 그래서 ..
2025.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