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숙(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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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2019.5
"Ours are precious!"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일어설 줄을 모르고 앵콜을 외쳤다. 이미 한 곡 앵콜을 들었지만 아쉬움은 더 커졌다. 세 시간 가까이 휴식 시간도 없이 계속된 공 연이었다. 의자도 불편하고 거미줄이 보이기도 하는 좁은 소극장, 그런데도 관객들은 불편한 좌석도,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라는 것도 잊은 듯했다. 가수가 다시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조금 전까지 빠른 리듬의 곡을 열창한 그는 숨을 몰아 쉬었다. 객석과 무대가 가까워 가수의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이 눈에 보였다. 가수가 기타의 지판에 왼손을 얹었다. 관람객들은 숨죽이고 시선을 집중했다. 맑은 음성이 극장 가득 퍼졌다. 좀 전까지와는 다른 조용한 노래였다. 생각나는 사람 조용한 사람 그리운 사람 언제쯤일까 무엇을..
2022.12.20 -
봄 꽃 피면, 봄 술 한 잔 2019.4
When spring flowers bloom, what about a spring drink? 봄이다. 햇살은 다사롭고 꽃 향기가 골목을 떠다닌다. 그리고, 봄바람이 분다. 4월에 부는 바람은 살랑살랑이다. 꽃샘바람처럼 매서운 대신 부드럽고 다정하 다. 밖으로 나오라는 봄의 손짓 같다. 미세먼지만 아니라면 몇 시간이고 바람에 흔들리며 걷고 싶다. 4월이 되면 제일 먼저 김소월의 「바람과 봄」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이 시에서 소월은 속삭인다. 이 봄, 마음이 이토록 흔들리는 건 내 탓이 아니라고, 저녁 어 스름이 찾아오면 술 생각이 나는 것도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건 모두 꽃향기 때문이고 봄바람 때문이라고 「바람과 봄」 봄에 부는 바람, 바람 부는 봄, 작은 가지 흔들리는 부는 봄바람, 내 가슴 흔들리..
2022.12.16 -
“차가운 그녀의 목소리에도 내 심장은 식지 않는다” 2019.3
“Even her cold voice does not cool down my heart” 눈보라 치는 산에서 한 남자가 독백한다. 굳은 표정, 눈을 만지는 손이 외롭다. 그 날 하늘은 유난히 푸르렀고 새 하얀 눈이 모든 숲을 덮었다. 가장 아름답게 별이 반짝이던 모든 것이 완벽한 겨울이었다. 겨울이 아니라면 준비해 간 도시락을 펴놓고 먹었을 나무 테이블과 의자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눈 덮인 등산화의 지퍼 고리에는 반지가 하나 매 달려 있다. 자막에 보이는 시간은 오전 11시. 카메라가 빠져서 보니 남자는 테이블 위에 조각처럼 서있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손을 모아 입김을 불어 보 고 패딩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 쓴다. 독백이 이어진다. 벌써 세 시간 째 끝없는 기다림 기다릴 준비는 되어있..
2022.12.15 -
설에는 마음을 주세요! 2019.2
Give your heart in Lunar New Year's Day! 우리는 해마다 두 번의 새해를 맞는다. 부산스럽게 새해 인사를 하며 양력 새해 를 맞은 후 겨우 한 달쯤 지나서 음력 새해가 찾아오면, 마치 처음인 양 다시 새해 복을 비는 덕담을 나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두 번째 새해의 의미는 좀 더 각별해서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고, 멀리 떨어져 사는 가족이 모이고, 주변 사람 들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한다. 2월의 달력을 넘기니 바로 그 음력 새해가 시작되 는 설날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어린 시절 설날이 가까워오면 엄마는 씻어 불린 쌀을 방앗간에 가지고 가서 가 래떡을 뽑아 오셨다. 말랑말랑하고 길다란 가래떡을 통째로 들고 한 입 베어 물 면, 보드랍고 쫄깃한 하얀 살이 입을 가득 채웠..
2022.12.14 -
“돈(豚) Worry, Be Happy!”돼지 해 새해 인사가 이 정도는 돼야지 2019.1
"Pigs Don't Worry, They are Just Happy. This Year. You Don't Worry Either. Be Happy!" Isn't this the real class of the New Year's Greetings for the Year of the Pigs? 2018년 1월호 칼럼을 쓰면서 아주 추상적인 새해 소망을 하나 세웠었다. 내 소망 은 ‘내 안의 좋은 것, 선한 것을 이끌어내 줄 그 무엇을 만나는 것’이었다. 개의 해 를 맞아 ‘개는 우리 안의 선(善)함을 이끌어낸다.’는 광고 카피를 보고 세운 소망 이었다. 그런데 한 해를 돌아보니 작년에 나는 내 안의 선함을 이끌어낼 무엇을 만 나는 것은 고사하고, 내 안에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분노를 끌어내는 사람을 ..
2022.12.12 -
미안해요, 사랑해요 2018.12
I'm sorry, I love you 까만 화면에 ‘미안해’라는 자막이 생겨난다. 뒤를 이어 나타나는 자막이 예사롭지 않다. ‘아침 마다 울게 해서 미안해 숙제 같이 못 해줘서 미안해’ 세 줄 자막이 생겨난 뒤에 배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텅 빈 자동차 안이다. 아무도 앉지 않은 운전석과 조수석이 보인다. 그 위로 자막이 계속 흐른다. ‘맨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그리고 잠시 모든 자막이 사라졌다가 조금 더 큰 크 기의 자막 한 줄이 나타난다. ‘일하는 엄마라서, 미안해’ 겨우 자막만 읽었을 뿐인데 눈가가 뜨 거워진다, 목구멍으로 왈칵 뜨거운 기운이 올라온다. 2015년에 제작된 기아자동차의 카렌스 광고의 이야기다. 또각또각 여자의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차 문이 열린다. 일과 육아, 살림이라는 ..
2022.12.10